부조리한 결혼이 있을 것이며, 부조리한 도전, 원한, 침묵, 전쟁 그리고 부조리한 평화가 있다. 그 어느 것이든 부조리는 둘 사이의 비교에서 생겨난다. 부조리한 감정은 현상과 어떤 현실 사이, 어떤 행위와 그 행위를 초월하는 세계 사이의 비교로 생기는 것이다. 부조리란 본질적으로 어떤 불일치이다.
부조리란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 속에 있는 것도 아니며, 다만 그 둘이 공존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세계와 인간과 부조리의 기이한 삼위일체가 무한히 단순하면서도 무한히 복잡하다.
여러 특징 중 첫 번째는 서로 분리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항목들 가운데 하나를 파괴하는 것은 전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을 벗어난 부조리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부조리도 죽음과 함께 끝난다.
부조리의 의미란 본질적인 것이며 내가 알고 있는 진리 중에 제일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판단한다면 나는 그것을 지켜야 한다. 내가 어떤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하겠다는 생각을 할 때 최소한 이것만큼은 안 된다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문제들 중 어느 항목을 슬그머니 감추는 일이다.
내 처지에는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여건이 부조리이다. 문제는, 어떻게 거기에서 헤어날 수 있는지, 사실상 유일한 조건은, 나를 으스러뜨릴 듯이 짓누르고 있는 그것 자체를 보존하는 일, 따라서 거기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존중하는 일이다. 나는 그것을 끊임없는 대결과 투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부조리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 내가 인정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투쟁에, 모든 희망의 부재와(절망과는 무관) 계속되는 거부(포기가 아님), 또 의식적인 불만족(젊은 시절 불안)같은 것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제약들을 없애버리거나 감추거나 혹은 교묘히 다듬는 그 모든 행위는(첫 번째로는 불일치를 타파하는 것에 대한 동의) 부조리를 무너뜨리고, 그때 취해질 수 있는 태도를 실추시킨다. 부조리란 오로지 우리가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완전히 도덕적으로 자명한 이치의 사실 하나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언제나 자신이 세운 진리의 희생자가 된다는 것이다.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그 사람은 거기서 떨어져 나올 줄 모른다.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부조리를 의식하게 되는 인간은 언제까지나 거기 얽매이게 된다.
희망도 없는데 존재를 의식한 인간은 더 이상 미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똑 같이 당연한 것은 자신이 그 세계 창조자이면서도 그가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애쓴다는 점이다.
실존철학을 다루면서, 그것들 모두가 내게 탈주를 권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야스퍼스는 인간적 믿음이라는 맹목적인 행위를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고, 그는 그것을 ‘일반적인 것과 특별한 것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치’라고 정의한다. 이런 식으로 부조리는 신이 되고, 몰이해는 모든 것을 밝혀주는 존재가 된다. 나는 그것을 비약이라 부를 수 있다.
야스퍼스가 고집과 무한한 인내로 초월적인 것을 경험 불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 이해된다. 위와 같은 정의는 점점 더 허황된 것으로 드러나고 초월적인 것은 점점 더 현실적인 것이 될 테니 말이다.
이렇게 야스퍼스가 악착스럽게 이성의 편견들을 파괴하려는 것은 자신의 심연 속에 가라앉아 존재를 소생시킬 그 무엇을 찾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신비사상은 그런 과정들로 우리에게 익숙하게 되었다.
“유일하고도 진정한 해결책은 인간의 판단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바로 그 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신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신에게 돌아설 때는 오직 불가능한 것을 얻으려고 할 때 만이다. 가능한 것이라면 인간의 힘으로도 충분하다.”라는 인용구가 있는데, 러시아 철학자 셰스토프가가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부조리를 발견하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부조리가 있다‘가 아니고 “여기 신이 있다. 신에게 우리를 내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설령 인간 이성이 어떤 범주와도 소통하지 않는다 해도” 혼동이 생기지 않게 하려는 마음에 자신의 처지를 말했는데, 자신이 말한 신은 증오로 가득차 있어 혐오스러우며, 이해불가능하고 모순적이겠지만, 신의 위대함이란, 바로 신이 가진 모순이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신의 잔인함이다.
욕망하는 정신과 실망만 안겨주는 세계 사이의 배반 상태, 통일에의 향수, 지리멸렬의 우주, 그리고 양자를 한데 이은 모순이 바로 부조리다. 후설의 경우 이성은 마침내 아무런 한계도 갖지 않기에 이른다. 반대로 부조리는 그의 한계를 분명히 정한다.
이성은 부조리의 고뇌를 진정시킬 힘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 키르케고르는 단 하나의 한계만으로도 이성을 부정하기에 충분하다고 단언한다. 후설의 우주에는 세계가 명확해져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친숙함에의 욕구는 쓸모없게 된다.
후설은 ‘익히 잘 알고 있고 편안한 생존 조건 속에서 살고 생각하는 고질적인 습관’에서 벗어나려는 욕구를 따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에게 마지막 비약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과 이 영원 속에서의 안락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비약은 키르케고르가 원했던 것 같은 극단적인 모험의 모습을 가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위험은 바로 전의 미묘한 순간 속에 있다. 현기증이 날 듯한 순간의 모서리 위에서 몸을 지탱할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성실한 삶이다. 그 밖의 것은 속임수에 자니지 않는다. 나는 또한 인간의 무력함이 키르케고르의 그것만큼 감동적인 조화를 촉발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는 사실도 안다.
만일 내가 뭇나무들 중 한 그루의 나무라면, 뭇 짐승들 중 한 마리의 고양이라면 이 삶은 의미가 있을까? 아니 차라리 이 삶에 의미가 있든 없든 이런 문제 자체가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세계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비약을 통해서 벗어날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부조리의 비통하고도 멋들어진 내기를 지탱해나갈 것인가? 육체, 사랑, 창조, 행동, 인간의 고귀함은 어처구니없는 세계에서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인간은 거기서 자신의 위대함을 키우기 위한 부조리라는 술과 무관심이라는 빵을 되찾게 될 것이다.
방법이란 고집스럽게 버티는 것이다. 길을 가다보면 어느 길목에선가 부조리의 인간은 그를 손짓하는 유혹을 만나게 된다. 역사 속에는 온갖 종교나 예언자들이 있다. 심지어 신 없는 종교나 예언자도 있다. 그리하여 부조리의 인간에게 비약할 것을 요구한다.
그에게 가능한 대답은 잘 이해할 수 없다는 것, 도무지 분명치 않다는 것뿐이다. 그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만 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오만의 죄라고 역설하지만 그는 죄의 개념이 뭔지 모른다. 가는 길의 저 끝에는 지옥이 있다고들 역설하지만 그는 이 기이한 미래를 머릿속에서 그려볼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상상력을 갖지 못했다.
부조리와 자살
자살 같은 행위는 위대한 작품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평정을 이룬 상태에서 준비한다. 당사자도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방아쇠를 당기거나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이다. 나중에 자살하고 말았던 부동산 관리인이 언젠가 내게 해주었던 이야기가 있다.
그는 5년 전에 딸을 잃은 뒤부터 성격이 많이 변했고, 결국 그 일이 자신을 ‘좀먹었다’고 했다. 이 시작 단계에서 사회에는 책임을 물을 만한 것이 별로 없다. 벌레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바로 거기에서 벌레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아주 작은 꿈틀거림이 죽음을 불러와 존재의 눈앞에서 인간을 광명의 세계 밖으로 탈주하도록 이끄는 것이기에, 그것을 추적하여 이해해야 한다.
자살은 어떤 의미에서, ‘힘들게 살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고백을 하는 것이다. 삶을 감당할 길이 없음을, 또는 삶을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물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행위들이 계속되는 것은 삶을 존속하는 데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많은 동기들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첫 번째가 습관이다.
자신의 의지로 죽는다는 것에는, 그 습관이라는 것이 가소롭다는 것, 산다는 것에 심오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매일같이 그렇게 부산을 떨며 산다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 그리고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무가치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나마 인정했다는 사실이 깔려 있다.
갑자기 빛과 환상이 사라진 우주 속에 있는 인간은 이방인이 되었다고 느낀다. 이런 추방이 절망적인 까닭은, 이젠 고향을 잃어버려 더 이상 고향을 추억할 수도, 약속된 땅에 대해 희망을 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과 삶 사이, 또는 배우와 무대 장치 사이의 이런 결별, 이것이야말로 바로 부조리에 대한 깨달음이다. 부조리에 대한 깨달음과, 허무를 향한 갈망 사이에 직접적인 유대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부조리의 추론’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알베르 카뮈 지음, 이혜윤님 옮김, 동서문화사 출판>
* 알베르 카뮈 : 1913.11.7 알제리 생폴 농장에서 출생. 7세 전쟁고아로 인정받음. 1942 <이방인>,<시지프 신화>,1947 <페스트>출간. 1957 노벨문학상 받음. 1960년 46세로 타계.
울주 신암 앞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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