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메밀꽃 필무렵, 산 - 이효석

[중산] 2020. 9. 11. 15:00

메밀꽃 필무렵

장돌림을 시작한지 이십 년이나 되어도 허 생원은 봉평장을 빼논 적은 드물었다.

고향이 청주라고 자랑삼아 말하였으나 고향에 돌보러 간 일도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에게는 그리운 고향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알뜰하게 벌어 돈푼이나 모아둔 적도 있기는 있었으나, 읍내에 백중이 열린 해 호탕스럽게 놀고 투전을 하여 사흘 동안에 다 털어 버렸다.

 

애끓는 정분에 그것만은 이를 물고 단념하였다. 결국 도로아미타불로 장돌림을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짐승을 데리고 읍내를 도망쳐 나왔을 때에는, 너를 팔지 않기 다행이었다고 길가에서 울면서 나귀의 등을 어루만졌던 것이다. 빚을 지기 시작하니 재산을 모을 생각()은 당초에 틀리고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러 장에서 장으로 돌아다니게 되었다.

 

호탕스럽게 놀았다고는 하여도 계집 하나 후려 보지는 못하였다. 계집이란 쌀쌀하고 매정한 것이다. 평생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신세가 서글퍼졌다. 일신에 가까운 것이라고는 언제나 변함없는 한필의 당나귀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단 한 번의 괴이한 인연! 봉평에 다니기 시작한 젊은 시절의 일이었으나, 그것을 생각할 적만은 그도 산 보람을 느꼈다.

 

장 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객줏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지.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나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 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 팔자에 있었나 부지.“

 

날 기다린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달리 기다리는 놈팽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네. 처녀는 울고 있단 말야. 짐작은 대고 있으나 성 서방네는 한창 어려워 들고 날 판인 때였지. 한집안 일이니 딸에겐들 걱정이 없을 리 있겠나? 좋은 데만 있으면 시집도 보내련만 시집은 죽어도 싫다지.....

 

그러나 처녀란 울 때같이 정을 끄는 때가 있을까. 처음에는 놀라기도 한 눈치였으나, 걱정 있을 때는 누그러지기도 쉬운 듯해서 이럭저럭 이야기가 되었네...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었어.“

 

처녀의 꼴은 꿩 먹은 자리야. 첫날밤이 마지막 밤이었지. 그때부터 봉평이 마음에 든 이 반평생인들 잊을 수 있겠나.“

 

옛 처녀나 만나면 같이나 살까 ---난 거꾸러질 때까지 이 길 걷고 저 달 볼 테야.”

 

허 생원의 이야기로 실심해 한 끝이라 동이의 어조는 한풀 수그러진 것이었다.

아비 어미란 말에 가슴이 터지는 것도 같았으니 제겐 아버지가 없어요. 피붙이라고는 어머니 하나뿐인걸요.”

돌아가셨나?“

당초에 없어요

그런 법이 세상에...”

 

생원과 선달이 야단스럽게 껄껄들 웃으니, 동이는 정색하고 우길 수밖에는 없었다.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으랴 했으나 정말에요. 제천 촌에서 달도 차지 않은 아이를 낳고 어머니는 집을 쫓겨났죠. 우스운 이야기나, 그러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버지 얼굴도 본 적 없고 있는 고장도 모르고 지내 와요.”

 

그래 대체 기르긴 누가 기르구?”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의부를 얻어 가서 술장사를 시작했죠. 술이 고주래서 의부라고 전 망나니에요. 철들어서부터 맞기 시작한 것이 하룬들 편한 날 있었을까. 어머니는 말리다가 채이고 맞고 칼부림을 당하고 하니 집꼴이 무어겠소. 열 여덟 살 때 집을 뛰쳐 나와서부터 이 짓이죠.”

 

모친의 친정은 원래부터 제천이었던가?”

웬걸요. 시원스런 말은 안해 주나 봉평이라는 것만은 들었죠.”

봉평, 그래 그 아비 성은 무엇이구?”

알 수 있나요. 도무지 듣지 못했으니까.”

그 그렇겠지.”

하고 중얼거리며 흐려지는 눈을 까물까물하다가 허 생원은 경망하게도 발을 빗디디었다. 앞으로 고꾸라지기가 바쁘게 몸째 풍덩 빠져 버렸다. 동이는 물 속에서 어른을 해깝게 업을 수 있었다. 하여도 여윈 몸이라 장정 등에는 오히려 가벼웠다.

 

이렇게까지 해서 않됐네. 내 오늘은 정신이 빠진 모양이야.”

염려하실 것 없어요.”

그래 모친은 아비를 찾지는 않는 눈치지?”

늘 한번 만나고 싶다고는 하는데요.”

지금 어디 계시나?”

의부와도 갈라져 제천에 있죠. 가을에는 봉평에 모셔오려고 생각 중인데요. 이를 물고 벌면 이럭저럭 살아갈 수 있겠죠.”

아무렴, 기특한 생각이야. 가을이랬다?”

 

동이의 탐탁한 등어리가 뼈에 사무쳐 따뜻하다. 물을 다 건넜을 때에는 도리어 서글픈 생각에 좀더 업혔으면서도 하였다.

허생원은 젖은 옷을 웬만큼 짜서 입었다. 이가 덜덜 갈리고 가슴이 떨리며 몹시도 추웠으나 마음은 알 수 없이 둥실둥실 가벼웠다.

 

주막까지 부지런히 가세나. 내일 대화장 보고는 제천이다.”

생원도 제천으로....?”

오래간만에 가 보고 싶어. 동행하려나, 동이?”

나귀가 걷기 시작했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눈이 어둡던 허 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도 해깝고 방울 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메밀꽃 필무렵에서 일부 요약 발췌, 이효석 지음, 범한출판>

*이효석 : 1907~1942. 호는 가산,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졸업. <도시와 유령>,<마작철학>,<깨뜨려지는 홍등>, 단편소설 <>,<수닭> 등이 있다. 1936년에 <메밀꽃 필무렵>을 발표했다. 1942년 뇌막염으로 35세 나이로 사망했다.

 

** 작품 해설 : 동이의 이야기를 듣던 허 생원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고, 동이의 등에 업혀 가면서 동이가 자신처럼 왼손잡이임을 알게 된다. 허 생원의 직관력은 독자들에게 전혀 거부감이 없이 앞으로 얼마든지 허 생원과 동이 어머니와의 재회를 암시하며 다가오는 것이다. 일생을 장터와 장터를 떠돌며 길 위에서 사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인물을 통해 허무주의를 바탕에 깐 채, 인간의 본연의 애정에의 향수를 달빛으로 채색해 내고 있다!

 

 

 

세상에 머슴살이같이 잇속 적은 생업은 없다. 싸울래 싸운 것이 아니라 김 영감 편에서 투정을 건 셈이다. 중실은 머슴 산 지 칠팔 년에는 아무 것도 쥔 것 없이 맨주먹으로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 원통은 하였으나 애통하지는 않았다.

해마다 새경을 또박또박 받아본 일 없다. 옷 한 벌 버젓하게 얻어 입은 적 없다. 명절에는 놀이할 돈도 푼푼이 없이 늘 개 보름 쇠듯 하였다.

 

장가들이고 집 사고 살림을 내준다는 것도 헛소리였다. 첩을 건드렸다는 생똥 같은 다짐이었으나 그것은 처음부터 계책한 억지요. 첩과 수상한 놈팡이는 도리어 다른 곳에 있는 것을 애매한 중실에게 엉뚱한 분풀이가 돌아온 셈이었다.

 

가상스런 첩의 행실을 휘어잡지 못하고 늘그막 판에 속 태우는 영감의 신세가 하기는 가엾기는 하다. 더욱 얼크러질 앞일을 생각하고 중실은 차라리 하직하고 나온 것이었다.

 

넓은 하늘 밑에서도 갈 곳이 없다. 제일 친한 곳이 늘 나무하러 가던 산이었다. 짚북데기보다도 부드러운 두툼한 나뭇잎의 맛이 생각났다. 그 넓은 세상은 사람을 배반할 것 같지는 않았다. 빈 지게만을 짊어지고 산으로 들어갔다. 그 속에서 얼마 동안이나 견딜 수 있을까가 한 시험도 되었다.

 

박중골에서도 오 리나 들어간 마을과 사람과는 인연이 먼 산협이다. 산등이 평퍼짐하고 양지 쪽에 해가 잘 쬐고 골짜기에 개울이 흐르고 나무 열매가 지천으로 열려 있는 곳이다. 양지 쪽에서는 나무하러 왔다 낮잠을 잔 적도 여러 번이었다. 수풀 속에서 찾은 으름과 나뭇가지에 익어 시든 아그배(돌배)와 산사로 배가 불렀다.

 

 

나무를 판 때의 마음이 이날같이 즐거운 적은 없었다.

물건을 산 때의 마음도 이날같이 즐거운 적은 없었다.

그것은 가장 필요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나무 판 돈으로 중실은 감자 말과 좁쌀 되와 소금과 냄비를 샀다.

산속의 호젓한 살림에는 이것으로 족하리라고 생각되었다. 목숨을 이어가는 데 물고기(海魚)쯤이 없으면 어떨까도 생각되었다.

 

무슨 까닭으로 산이 이렇게도 그리울까? 편벽된 마음을 의심도 하여 보았다. 그러나 별로 이치도 없었다. 덮어놓고 양지 쪽이 좋고 자작나무가 눈에 들고 떡갈잎이 마음을 끄는 것이다. 평생 산에서 살도록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개울가에 냄비를 걸고 서투른 솜씨로 지은 저녁을 마쳤을 때는 밤이 적이 어두웠다. 깊은 하늘에 별이 총총 돋고 초승달이 나뭇가지를 올가미지웠다. 등걸불이 탁탁 튄다. 나뭇잎 타는 냄새가 몸을 휩싸며 구수하다.

 

한 가지 욕심이 솟아올랐다. 밥 짓는 일이란 머슴이 할 일이 못 된다. 사내자식은 역시 밭 갈고 나무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장가를 들려면 이웃집 용녀만한 색시는 없다. 용녀를 데려다 밥 일을 맡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용녀를 생각만 하여도 즐겁다. 궁리가 차례차례로 솔솔 풀렸다.

 

양지 쪽에 쌓아 올려 단칸의 조촐한 오두막집을 짓겠다. 펑퍼짐한 산허리를 일궈 밭을 만들고 봄부터 감자와 귀리를 갈 작정이다. 오랍 뜰에 우리를 세우고 염소와 돼지와 닭을 칠 터, 용녀가 집일을 하는 동안에 밭을 가꾸고 나무를 할 것이며, 아이가 나면 소같이 산같이 튼튼하게 자라렷다. 용녀가 만약 말을 안 들으면 밤중에 내려가 가만히 업어 올걸. 한번 산에만 들어오면 별 수 없지.

 

하늘의 별이 와르르 얼굴 위에 쏟아질 듯싶게 가까이 왔다. 멀어졌다 한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셋 나 셋 .....

어느 결엔지 별을 세고 있었다. 눈이 아물아물하고 입이 뒤바뀌어 수효가 틀려지면 다시 목소리를 높여 처음부터 고쳐 세곤 하였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셋 나 셋 .....세는 동안에 중실은 나는 제 몸이 스스로 별이 됨을 느꼈다.

 

<1936<삼천리>에서 발표된 이효석의 작품, 범한출판>

*작품해설 : 중실은 작품 속 주인공이다. 김 영감의 집에서 쫓겨난 중실은 산속에 들어가 나무 열매를 먹고 나뭇잎 더미에서 잔다. 그가 세상에 나오는 것은 나무를 내다 팔 때이다. 요즘 말하는 자연인생활이다. 이 작품은 현실에서 도피해 은둔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보이는데 자연을 아름답게 묘사하면서도 반 도시적이고, 반사회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

                                                                      진하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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