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한 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치스런 고독의 시간을 갖다!
열차가 세상의 모든 시끄러운 것을 실어 가버리고
호수의 물고기들도 이제 굉음에서 벗어날 때
나는 더욱 고독하다.
앞으로의 긴 오후 동안 나의 명상을 방해하는 것은
저 멀리 길을 지나가는 짐마차의 희미한 울림뿐이다.
고독은 가장 가까운 친구. 그런데 왜 우리는 고독을 싫어할까. 자, 이제 나의 소중한 친구에게 손을 내밀어 보자!
가능한 한 혼자 지내는 것이 유익하다.
사람과 같이 있노라면
설령 그가 몹시 훌륭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금세 지겨워지므로 시간 낭비다.
나는 혼자가 좋다.
고독만큼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본 적이 없다.
우리는 방 안에 혼자 있는 것보다
바깥에서 사람 속에 있을 때
더욱 고독을 느낀다.
어디에 있건 생각을 하거나 일을 할 때는
늘 혼자다.
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현실을 비추어보자. 그러면 그대는 무엇이 자신을 옭매는지를 알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거기에 아무리 덧칠을 하더라도 결코 진실만큼 아름답지 않다.
영원한 것은 진실뿐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있어야 할 곳을 벗어나 잘못된 곳에 있다.
나약한 마음으로 자신이 놓인 상황을 규정하고, 거기에 스스로를 끼워 맞춘다. 그
래서 두 개의 상황을 동시에 살다보니
거기서 빠져나오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독서는 심심풀이 땅콩이 아니고, 수면제도 아니다. 그대의 혼을 모두 불태워 집중하는 명상의 시간이다!
인류는 아직 위대한 시인의 작품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위대한 시인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작품은 대중이 별을 대하듯 천문학이 아니라 고작 점성술로 읽혔을 따름이다.
고귀한 지적 훈련이어야 할 독서에 대해서는 거의, 아니 아무것도 모른다.
사치품처럼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고,
고도의 능력을 잠시 잠들게 하는 것은 독서가 아니다.
발끝까지 정신을 모으고 가장 머리가 맑은 시간을 가려서 하는 것이 바로 독서다.
무슨 일을 하든 생활 속에 여백을 가득 마련해 두고 싶다!
머리를 쓰는 일이건 손을 쓰는 일이건
어떤 일을 위해서건
지금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희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몇 번이고 마음에 새긴다.
생활에 여백을 두고 싶다.
여름 아침이면 늘 하듯 목욕을 마치고 나면,
때로는 해가 떠서 점심때까지
소나무, 호두나무, 옻나무에 둘러싸인 채
흔들림 없는 고독과 정적 속에서
햇빛 잘 드는 문 앞에 앉아 공상에 젖어든다.
새들이 노래하며 소리도 없이 집 안을 빠져 나간다.
왜 인간은 이렇게나 고뇌하는가.
먹지 않으면 일할 필요도 없다.
개 짖는 소리가 시끄러워 사색을 할 수 없는 집에
살고 싶어 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귀찮은 집안일도 해야 한다.
이렇게 찬란한 날에 투박한 문손잡이를 번쩍번쩍
빛이 나게 닦고 욕조를 청소해야 한다니!
그럴 바에는 집 같은 거 없는 게 좋지 않은가.
그래, 나무 구멍에라도 살면 된다.
그러면 오직 딱따구리만이 문을 두드릴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태어난 후로 줄곧 생활에 푹 파묻혀 산다. 난 도저히 거기에 따를 수 없다.
샘에서 길어온 물 한 잔과 선반 위에 검은 빵 한 조각만 있으면 난 그만이다.
일하는 만큼 손해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 일로 인생의 만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생을 소모하는 행위이다!
나는 아주 튼튼하고 밝고 청결한 집에 사는데,
집을 짓는데 드는 비용은
그대들이 그 초라한 집을 위해 지불하는
일 년치 집세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당신도 마음만 먹으면 한두 달안에
자신의 성을 세울 수 있다.
나는 커피와 홍차, 버터나 우뉴, 신선한 고기를 먹지 않으므로
그것을 사기 위해 노동을 할 필요가 없다.
노동을 하지 않으니 음식도 조금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그대들은 커피, 홍차, 버터, 우유, 쇠고기를
먹어야 하기에 열심히 일해야 한다.
노동으로 소모된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많이 먹어야 한다.
그렇다면 결국 일을 하건 않건 마찬가지 아닌가.
일은 무언가를 온전히 성취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노동자의 목적은 생활비를 버는 것과 ‘좋은 일자리’를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끝까지 잘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나아가 금전적인 의미에서도 노동자는
생계유지라는 수준 낮은 목적 때문이 아니라
과학적이고 도덕적인 목적을 위해 일한다고 느끼는 편이
실제로 경제적이다.
돈을 위해 일하는 인간을 고용하지 말고,
좋아서 그 일을 하는 인간을 고용해야 한다.
지혜의 기운은 자연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자주 자연에 접하고 그 기운을 마셔야 한다!
다함없는 자연의 활력,
거인의 나라 광대한 지형,
파괴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해변,
숨 쉬는 나무와 메마른 나무가 뒤엉킨 들판,
비구름,
3주나 내리퍼부어 홍수를 일으키는 비를 보고
사람은 원기를 회복해야 한다.
인간의 한계가 무너지는 순간이나
인간이 결코 발을 들이밀 수 없는 장소에서
다른 생명이 자유롭게 풀을 뜯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부패를 보고 혐오감과 구역질을 일으킬 뿐이지만,
대머리독수리가 그것을 쪼아 먹고
건강과 활력을 되찾는 모습을 보면
힘이 솟구쳐 오른다.
걷자 않는 다리는 여위고 만다. 반면 숲을 걷는 영혼은 풍성해진다!
나는 적어도 하루에 네 시간, 아니 대체로 그 이상 모든 일상사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숲이나 언덕과 들판을 걸어 다니지 않으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킬 수 없을 것 같다.
가게 주인이,
마치 다리가 서거나 걸어 다니기 위해서가 아니라앉기 위해 존재하는 양
오전 중은 물론이고 오후에도 꼬고 앉은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저렇게 살면서
어떻게 자살하지 않았는지 참 대단하다고 감탄하고 만다.
숲에 들어가서 세속을 생각하는 것은 그만두자. 그럴 바에는 숲속에 들어오지 말 일이다!
오후에 산책할 동안은 오전 중의 일이나 세상사에 대한 의무를 가능한 한 잊으려 한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제정신을 잃고 멍해질 때가 있다.
숲 바깥 일만 생각한다면 대체 왜 속에 왔을까.
설령 세상에서 높이 평가하는 일이라 해도 가끔 자신이
너무 깊이 빠져들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느냐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고 만다.
가장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 가장 야성적이다.-
생명과 야성은 서로 통한다. 가장 생명력 있는 것이 가장 야성적이다.
아직 인간에게 속하지 않기에 그 존재는 인간에게 활기를 준다.
끊임없이 전진하면서 결코 일을 놓지 않는 인간,
급속하게 성장했음에도 더욱더 인생의 향상을 갈구하는 인간은
늘 새로운 전원이나 들판으로 들어가 생명 속에 몸을 맡길 것이다.
그리고 원시림 안에서 땅을 기어가는 뿌리를 타고 넘을 것이다.
나에게 미래와 희망은 잔디나 경작지,
도회지나 마을 안이 아니라 탁하게 물을 머금은 습지에 있다.
자연과 하나가 될 때 나는 서정 시인이며 인생을 달관한 현자다.-
오늘은 기분 좋은 밤이다.
온몸이 하나의 감각이 되어 모든 털구멍에서 기쁨이 솟구친다.
나는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가 되어 신비로운 자유를 맛보며 거닌다.
으스스하게 흐린 날,
세찬 바람을 맞으며 셔츠 차림으로 호숫가 자갈길을 걷노라면
딱히 새로운 깨달음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자연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그 어느 때보다 나와 조화를 이룬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황소개구리가 밤을 예감하며 울어대고 잔물결을 일으키며 불어가는 바람을 타고
쏙독새의 지저귐이 건너편에서 들려온다.
바람에 흔들리는 오리나무와 포플러 이파리가
애처로워 숨이 막힐 것 같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도구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인간은 스스로 만든 도구의 도구가 되어 버렸다.
배가 고프면 마음껏 나무열매를 따먹던 인간이
농부가 되었고
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던 인간이
집주인이 되었다.
지금은 하룻밤이라도 야외에서 자는 사람이 없다.
흙 위에 살면서 우리는 하늘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잡초가 많은 것도 기뻐할 일이다.
머뭇거리거나 불평하지 말라.-
수확에 실패할 리 없다. 풀씨는 새들의 먹 거리가 되므로
잡초가 무성한 것도 즐거워해야 하지 않겠는가.
밭에서 거둬들이는 작물이 농부의 창고를 가득 채울 수 있는가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올해 숲에서 도토리가 많이 열릴 것인지 다람쥐가 걱정하지 않듯,
참다운 농부는 쓸데없이 머뭇거리지 않고
오늘의 노동에 충실할 것이다.
그리고 작물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최초의 낱알에서 마지막 낱알까지
마음 깊이 신에게 감사할 것이다.
걷지 않는 다리는 여위고 만다. 반면 숲을 걷는 영혼은 풍성해진다.-
나는 적어도 하루에 네 시간,
아니 대체로 그 이상 모든 일상사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숲이나 언덕과 들판을 걸어 다니지 않으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킬 수 없을 것 같다.
가게 주인이,
마치 다리가 서거나 걸아 다니기 위해서가 아니라 앉기 위해 존재한다는 양
오전 중은 물론이고 오후에도 꼬고 앉은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저렇게 살면서 어떻게 자실하지 않았는지 참 대단하다고 감탄하고 만다.
무작정 걷노라면 자연이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준다.-
때로 어디로 걸을 것인지 정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어째서일까.
자연계에는 아주 섬세한 자력이 있어서
가만히 따르기만 하면
저절로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줄 터이다.
아무 데로나 가면 되는 것이 아니다.
분명 올바른 방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고 무딘 신경 탓에 잘못된 방향을 선택하고 마는 것이다.
<‘고독의 즐거움‘에서 P327 중 극히 일부 발췌,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양억관 님 옮김>
* 헨리 데이비드 소로 : 1817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태어나, 열여섯 살에 장학금을 받으며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다. 졸업 후 형과 사립학교를 열어 교사 생활을 한 뒤 목수, 석공, 조경, 토지 측량, 강연에 이르기까지 시간제로 여러 일을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산책하고 독서하며 글 쓰는 데 보냈다. 저명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랠프 월도 에머슨을 만나면서 그의 집에 머무르며 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 잡지에 글을 기고했다. 이후 1845 3월부터 윌든 호숫가에 집을 짓기 시작하여, 1947년 9월까지 그곳에서 홀로 지냈다. 그곳 2년간의 삶을 기록한 책이 윌든이다.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며 <시민의 불복종(1849)> 역작을 저술했다. 1859년 노에제도 폐지 운동에 헌신하며 의회에 탄원서를 제출, 1862년 콩코드에서 결핵으로 45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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