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본질적으로 인간의 현상이다. 프로이트가 충동과 본능의 목적, 그리고 대상을 구분하는 이론부터 검토해 보자. 그 이론 따르면, 섹스의 목적은 성적 긴장의 감소이다. 섹스의 대상은 성적인 파트너다 내가 보기에, 이런 주장은 오로지 신경증적 성욕에만 유효하다. 신경증적인 사람만이 우선적으로 정액 분출에 집착한다.
분별 있는 사람에게 섹스 파트너는 ‘대상’ 이 전혀 아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파트너를 또 다른 주체, 또 다른 인간 존재로 본다. 자신도 그 인간성 속의 자신으로 바라본다. 그가 진정으로 그 속의 자신을 사랑하면, 파트너 속에서도 또 다른 사람을 보게 된다. 그 사람은 바로 그가 자신에게서 보았던 그만의 독특한 존재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독특함을 붙잡는 것은 일부일처제의 관계를 낳는다.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 파트너는 더 이상 교환할 수 없다. 역으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난교의 상황으로 결말지어질 것이다. 자위행위가 긴장 감소라는 목적을 만족시키는 의미이기 때문에, 난교는 파트너를 대상으로 본다는 의미가 된다. 어느 경우에도 인간의 성적 잠재성은 실현되지 않는다.
난교를 탐닉하는 것은 파트너의 독특함을 무시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이는 사랑의 관계를 배제시킨다. 사랑이 담겨진 섹스만이 가치 있고 만족스럽기 때문에 그런 사람의 성적 생활의 질은 형편없을 수밖에 없다. 그는 놀랍게도 이런 특성의 결핍을 섹스의 양으로 채우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영원히 자극을 증가시키고 강화시켜 주는 것이 절실하다. 그런게 있다면, 포르노그라피일 것이다.
단순히 즐기기 위한 섹스가 뭔가 진보된 것이라는 신화는, 그게 좋은 장사꺼리가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조장한 것이다. 장사는 그에 맞는 수요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재의 문화는 성의 인플레이션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배경 설명은 실존적인 공허이다.
실존적 공허 속에서 성의 인플레이션을 야기한 것은 이런 이상 발달이다. 다른 종류의 인플레이션처럼 성적 인플레이션은 가치 하락을 동반한다. 성은 비인간화된 가치로 전락한다. 그래서 성 생활이 한 개인의 삶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단지 쾌락만을 위해 살아가는 경향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성의 비인간화는 실존적 좌절감, 의미 추구에 대한 절망감의 증상이다.
의미 추구에 대한 좌절감에서 비롯된 행복 추구는 중독과 마취상태를 겨냥한다. 이는 자기 방어로 분석될 수 있다. 행복은 자기 초월을 통해 나온 삶의 결과로 일어난다. 삶을 바쳐야 할 명분이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헌신만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성적 행복보다 더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없다. 그것을 겨냥할수록 놓치기 쉽다. 남성 환자가 성기능에 대해 거정하면 할수록, 불감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여성 환자가 오르가즘을 경험할 능력이 있음을 내보이려 하면 할수록, 불감증에 걸리기 십상이다.
섹스를 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면, 섹스에서 임신에 대한 걱정을 벗겨 주고, 그래서 섹스가 사랑에 대한 순수한 표현이 되게 해준 것은 피임약이다. 인간적 섹스는 쾌락의 중요성에 봉사하는 단순한 도구로 삼지 말아야 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성적 터부들과 금기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성관계의 자유가 주어졌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책임성 있게 살지 않으면, 그 자유가 방종과 전횡으로 쇠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존스홉킨스 대학이 국립정신병원의 의뢰를 받아 48개 대학 7,948명의 학생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도 있다. 이 조사에서는 삶의 첫 번째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16퍼센트의 응답자자들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답했다. 반면 78퍼센트의 학생들은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것”이라고 응답했다.
뉴욕 주립대 조셉카츠 교수는 몇 번의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취업 전선에 뛰어드는 다음 세대들은 돈이 아니라 의미 있는 경력에 관심을 두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는데, 자명한 전망일 것이다.
“삶의 표준 개선”에서는 *마슬로우의 욕구위계가 여기에 적용 될 수 있다. 첫 번째는 만족스런 삶의 표준 달성이다. 그 후에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기에 접근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행복한 삶을 구가하는 것이 오로지 사회⦁경제적 상황의 개선만으로 가능한지 여부이다. 가령 돈을 많이 벌면 정신분석가를 사서 정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단언하건데, 그렇다 않다. 몸이 아파서 건강하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최상의 인생 목표가 건강일 것이다. 그러나 실상 건강은 최종 목표에 도달하는데 수단이나 다름없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무엇이라고 여기든지 간에, 그것을 얻는데 있어서 건강은 하나의 전제조건인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그 수단의 이면에 있는 목표를 먼저 찾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다. 그런 의미를 찾기 과정은 소크레테스의 대화법(상대방과 문답식 대화를 통해 자신이 어떤 사실을 알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방법) 같은 방식이 적당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높은 욕구와 낮은 욕구 간에 차이가 아니다. 개개의 목적이 단지 수단인지, 아니면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 마슬로우가 낮은 욕구와 높은 욕구를 구분하는 것으로는 낮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경우 ‘의미에 대한 의지’처럼 높은 욕구가 가장 화급해지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인류학에서 근본적인 사실은 인간 존재란 자신이 아니라 어떤 사람, 어떤 대상을 항상 지목하고 지향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채워야 할 의미, 혹은 조우해야 할 사람, 보살피거나 사랑해야 할 이유를 지향한다. 이런 인간 실존을 위한 자아 초월적인 삶을 살았을 경우에만 진정한 인간인 것이고,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아실현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자신을 잊고 관조하면서, 바깥 세상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된다.
백내장에 걸린 눈은 대상을 구름처럼 본다. 녹내장인 눈은 빛 주변에 무지개 같은 녹내장을 본다. 눈 자체의 이상 현상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건강한 눈은 그것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것이 자아 초월이다.
이른바 자아실현이란 자아 초월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파악해야 한다. 그렇게 남아야 한다. 자아 실현을 의도적인 목표로 삼는 것은 자기 파괴적이고, 자멸적인 것이다. 자아 실현도 실상은 정체성과 행복에 집착한다. 행복을 없애는 것은 바로 ‘행복에 대한 추구’이다. 우리가 행복에 집착할수록 더 많은 행복을 놓치게 된다.
*에이브러햄 마슬로우 : 미국 심리학자로 인본주의 심리학의 창설을 주도했다. 생리적 욕구에서부터, 사랑, 존중, 자기실현에 이르기 까지 충족되어야 할 욕구에 위계가 있다는 욕구 5단계설을 주장했다.
<‘의미를 향한 소리없는 절규’에서 P243중 극히 일부 요약 발췌,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박사님 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