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 나는 병에 걸렸고 다시는 회복되지 못했다. 독감인 줄로만 알았던 병은 만성병이 되었다.
그 피로감 때문에 낮잠이나 심지어 밤에 자는 것은 고사하고 집중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파리에서 병이 난 이후 나는 수많은 질병과 질환으로 진단 받았다. 만성피로면역기능장애 증후군으로 알려진 바이러스감염후유증, 바이러스성중추신경계장애, 만성피로증후군 등 그것들이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런 불편한 몸이 너무 싫어’
‘다시는 직장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떡하지?’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내 생각에 변화가 일어났고, 이제 내가 바라는 마음의 고통의 끝은 ‘마음속 고통’의 끝이 되었다.
병에 걸린 후 침대에 누워 있게 되었을 때 어느 날 불교 수행자인 카말라 마스터스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래서 조용히 되뇌었다.“이곳에 아픔이 있지만 나는 아프지 않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앞의 이야기에 영감을 얻어 그 말을 자꾸만 반복했다. “이곳에 아픔이 있지만 나는 아프지 않다. 이곳에 아픔이 있지만 나는 아프지 않다....” 몇 분 뒤 나는 깨달았다. “그래! 내 몸에는 병이 있지만 ‘나’는 아프지 않아!” 이것은 뜻밖에 생겨난 크나큰 위로의 원천이었다.
집안에 묶인 몸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우정의 운명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나를 찾아오지 않는 그럴 만한 이유를 살펴보는 대신 이런 생각을 되풀이했다. “내 친구들은 날 보러 오는 걸 그만두면 안 돼.” 그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상처와 분노가 따라왔다. 그 한 가지 생각은 내 삶에 늘 존재하는 고통의 근원이 되었다.
바이런 케이티는 스트레스나 고통의 근원이 되는 생각의 타당성에 의문을 품는 방법인 질문 수행이 있다. 첫 단계에서는 그 생각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묻는다 그 경우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럼, 내 친구들이 날 보러 오는 걸 그만두면 안 되는 건 사실이지.” 두 번째 단계에서는 “그것이 사실인지 내가 ‘확실하게’ 알 수 있냐? 음, 아무래도 이 질문은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겠어....‘ 그다음 단계에서는 그 생각이 없다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겠는지를 명상하는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그 생각이 없다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상상했다. ”나는 나에게 펼쳐지는 대로 오늘 하루를 살 거야. 누가 나를 찾아올지 아닐지에 만 초점을 맞추는 대신 오늘 하루가 나에게 무엇을 가져올지를 살펴볼 거야.“
마지막 단계에서는 직관을 거스르는 단계이다. 케이티는 우리에게 ‘뒤바꾸기’를 요청한다. ‘뒤바꾸기’는 스트레스를 주는 생각을 원래 표현과 정반대로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 내 친구들은 나를 보러 오는 걸 그만두어야 해.”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때는 터무니없게 들렸다.
그러나 원래의 생각을 이런 식으로 뒤바꾸자 친구들이 오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픈 사람 주변에 있는 것을 불편해한다. 나를 방문하면 힘들게 할까 봐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람들은 저마다 바쁜 일상에 매여 있다.
뒤바꾸기 작업을 하자 예상치 못한 통찰 두 가지가 생겼다. 첫째, 단지 나를 찾아오지 않거나 전화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나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다거나 내가 나아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라고 둘째, 친구들이 나를 보러 오지 않는 이유는 내 마음이 아닌 그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깨달았다.
내가 마음 챙김 명상을 다시 시작하기까지는 7년이 걸렸다. 틱낫한의 책들이 계기가 되었다. ‘현재 순간에 깨어 있음’이 어떻게 고통을 줄일 수가 있는가에 대한 두 가지 수행법이다. 첫 번째는 ‘놓아 버리기’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마음을 현재 순간에 떼어 내어 의식적으로 과거로 데려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마도 수백만 분의 일 초 동안만 놓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만 놓아 버린 뒤 자신의 주의를 감각 기관을 통해 입력되는 것으로 들린다. 수행을 하다보면 ‘놓아 버리라’는 명령에 의해 그 기억은 사라지고 거기에 뒤따라오던 고통도 사라졌음을 알게 될 것이다.
두 번째는 불안의 근원이 되는 ‘미래’의 어떤 것(더 큰 불안한 일)을 생각함으로써 현재 순간으로부터 마음을 의식적으로 떼어 놓는 것이다. 두려움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자주 떠올린다. ‘아 그래. 내 오랜 친구인, 병원에 갈 것 같은 불안감.’ 그런 다음 그렇게 떠오른 생각을 다만 놓아 버린다. 그리고 나의 주의를 시각이나 청각, 후각이나 촉각으로 돌린다. 미래에 대한 생각을 놓아 버릴 때마다 나는 현재 순간 속에서 휴식하고, 고통은 무거운 짐을 덜어 버린 듯 사라진다.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미래에 대한 스트레스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긴 인생은 살았고 어려운 시절을 많이 보았지만(중략) 그것들 중 대부분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하늘 바라보기 명상
‘무아’를 경험하는 것을 돕기 위해 이 명상을 이용한다. 티베트 불교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우리 집 뒤뜰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선을 편안하게 둔다. 몸이나 마음에서 ‘개별적인 자아’라는 관념은 모두 사라진다.
지나가는 산들바람의 감각이나 소리 혹은 일어나는 생각이 있더라도 그것은 모두 흘러가는 에너지일 뿐이다. 이 드넓은 느낌이 몇 초간만 지속된다 할지라도 그 몇 초는 커다란 해방감을 준다. 침대에 누워 있을 때는 하늘 바라보기를 변형한 방법을 이용한다. 눈을 감고 눈동자를 머리 위쪽으로 올림으로써 불쾌한 육체적 감각을 자각하던 의식적으로 돌린다. 이것은 하늘 바라보기와 동등한 의식 변화를 만들어 냈다는 신호이다.
음악을 듣는 동안 엷은 미소 짓기
2~3분 동안 음악 한 곡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노랫말, 음향, 리듬,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들숨과 날 숨을 관찰하면서 미소를 지으십시오.
차를 준비하는 동안 깨어 있기
향기롭고 따뜻한 차를 찻잔에 따르고 있음을 알아차립시오. 그 이후의 모든 단계를 깨어 있는 마음으로 하십시오. 부드럽게 평소보다 더 깊이 숨을 쉬십시오. 마음이 산만해지면 호흡을 붙잡으십시오.
현재 순간에 머물 때 우리는 바로 눈앞에 있는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볼 수 있다. 갓 태어난 아기와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을. <탁닛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고통을 줄이는 법이나 마음속 고통을 끝내는 법을 가르치면서 붓다는 여덟 가지 바른 길을 제시했다. 그 중에서 한 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명한 행동(바른 행동)이 그것이다. 자신을 고통의 끝으로 이끄는 행동은 발달시킬 필요가 있고 고통을 증가시키거나 커지게 하는 행동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명한 ‘비 활동’이란 우리 상태를 더 악화하는 행동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병에 걸린 뒤 나는 현명한 비 활동을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하지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다. 증상 악화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고통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집과 마당에 갇혀 있을 때조차도 무리한 행동을 피하려면 엄청난 훈련이 필요하다. 창문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 가구 표면의 먼지를 닦는 것 등은 고통을 키우는 행동이 되었다.
현명한 행동은 예전에 할 수 있던 일과 그것 대신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기 사이에서 중도를 찾는 데 놓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만성병 환자에게 있어 현명한 행동의 핵심은 극단을 피하는 것이다. 예전과 같은 힘과 육체적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며칠 동안 우리를 침대에 누워 있게 만들 무리한 행동을 할 위험이 있다.
한 번에 한 가지씩
현명한 행동에 대한 또 다른 지침은 선불교의 숭산(1927~2004)큰 스님으로부터 나온다. “책을 읽을 때는 책만 읽어라. 밥을 먹을 때는 밥만 먹어라. 생각을 할 때만 생각만 해라.” 즉 ‘여러 가지를 하지 마라!’는 뜻이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그대로, 꽃은 피어나고 더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로버트 아이트켄>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지혜로운 대화법에는 다섯 가지 특징이 있다. 진실하게, 좋은 의도로, 도움이 되도록, 애정을 담아, 적절한 때에 말하는 것이다. 세 가지 사항이 포함된 말로 요약하면, ‘해야 할 말이 진실하고 친절하고 도움이 될 때만 말하라.’는 것이다.
편을 가르고 남을 욕하는 말
이의 반대말은 각각 ‘화합하는’과 ‘진심 어린’이다. 다른 사람과의 교류에 화합을 가져오려는 목적으로 진심어린 말을 건넬 때 우리는 그들을 향해 자애심을 가질 수 있다. 편을 가르고 남을 욕하는 말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근원인 질투심과 분노, 억울함이라는 마음 상태를 불러일으키고 특히 만성병 환자에게는 육체적 고통을 보태기 때문이다.
“나는 바깥세상의 벗을 잃었어.”
그 상실감은 단지 저녁 식사나 영화 관람을 함께할 수 없다는 것보다 훨씬 깊다. 많은 만성병 환자들이 친구를 잃은 데다 집 밖으로도 나갈 수 없이 고립되고 그 상태가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된다. 고립 자체가 중립적인 상태임을 내가 깨닫게 되기까지는 몇 년이나 걸렸다.
아주 많은 시간을 홀로 있어야 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면 홀로 있음 그 자체가 반드시 부정적인 경험은 아님을 깨달음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잇을 것이다. 그것은 중립적인 상태이다. 우리는 거기에다 지금 상태 이외의 다른 것을 바라는 욕망을 더한다. 이를테면 동반자가 생기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금 상태와 다르게 되기를 바라는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 우리는 고통을 받는다.
거짓말, 편을 가르는 말, 남을 욕하는 말, 그리고 잡담을 삼가는 연습을 하는 것이라고. 붓다는 잡담을 경계했다. 잡담이 종종 악의적인 수다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시시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악의 없는 수다조차도 고통의 근원인 질투심이나 그 밖의 마음 상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외로움은 참 재미있어. 마치 어떤 사람 같아. 네가 허락만 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게 너를 따라다닐 거야.” 이 문장을 듣고 나자 순식간에 내 마음과 가슴이 열려서 홀로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물론 내가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날에는 고독의 영광 속에 무척 기뻐하다가 어떤 날에는 너무도 외롭게 느껴져서 눈물을 흘린다.
“이것이 바로 나의 삶이다. 이 순간 내가 외롭더라도 잘못된 것은 없다.”그런 다음 날씨 명상으로 옮겨 가도 된다. 외로움이라는 마음 상태가 다른 모든 것처럼 영원하지 않음을 나 자신에게 일깨운다.
이틀 밤 잠을 자지 못했을 때,
새벽 2시, 나는 자애를 불러오고 있었다.
‘착한 내몸, 잠을 자려고 이렇게 애쓰는구나.’
새벽3시에는 자비였다.
‘잠이 필요하지만 잠들지 못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는 건 참 힘든 일이야.’
새벽4시에는 평정심이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야. 내 몸은 지금 당장 잠들지 못하고 있어.’
그리고 셋째 날 밤, 나는 잠들었다.
불쾌한 기분이 혐오로 바뀌는 것을 방지하는 이런 수행을 했기 때문에 증상들이 이전보다 더 강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자애와 자비 이 두 가지 불교 수행이 서로 협력하여 어려운 시간을 헤쳐 나가도록 도와준 것에 나는 무척 감사한다.
가슴속에 얼마나 많은 고통이 존재하는지 마침내 깨닫게 되면 겁먹은 아이를 향해 몸을 돌리는 어머니처럼 마음도 돌아선다.<스티븐 러바인, 살아갈 일년에서>
<‘살아있는 것은 아프다‘에서 P235 중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토니 버나드지음, 이현님 옮김>
*토니 버나드: 2001년 캘리포니아 법대 교수이자 학생처장이었던 토니 버나드는 파리 여행에서 원인 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독감인 줄 알았던 그녀의 병은 결국 영원히 회복되지 않는 만성병이 되었다. 그녀는 삶의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인생의 정점에서 갑자기 찾아온 이 상실은 진정한 배움의 시작이 되었다. 그녀는 병의 치료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치료임을 발견했고, ‘아픔과 함께 잘 살아가는 법’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 깨달았다. 삶에서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고통과 외로움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고 말한다.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것들을 선물로 여기는 것이 언제나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녀는 깨진 계란 속에서 오믈렛을 발견했다. 우리들에게는 그녀의 오믈렛 요리법이 하나의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