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변하는 수밖에 없다.
경제위기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뒤흔들었다. 사방에서 변화해야 한다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대중에 영합하는 자들은 타락한 지도층에게 죄를 묻고 지식인들을 ‘시스템’에, 정치가와 경제학자들은 ‘시장’에 책임을 돌린다. 모두가 확신을 품고 있다. 어쨌든 내 탓은 아냐. 나는 피해자일 뿐이야. 남들이, 다시 말해 외국인, 실업수당을 받는 실업자, 탐욕스런 은행가, 인정머리 없는 경영인이 순응하면 만사 다 잘 될 거야. 유감스럽게도 이 남들이 누구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저항은 익명의 괴물(은행가)을 향하고, 무의미한 길거리 폭력과 우울한 무기력이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
증시 역시 같은 모습이다. 과잉행동증후군 아이처럼 뛰어다니다가 다시 바닥을 모르고 추락한다. 양극성장애(예전에는 조울증이라고 불렀다)는 신자유주의 삶 자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인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해결책 역시 외부에서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딘가에 기적의 묘약이 있거나 모든 문제를 일시에 해결해줄 새로운 영도자가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 탓에 진실을 놓치고 만다. 그 사이 우리 모두가 많건 적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물이 들었다는 진실 말이다. 우리의 사고도 우리의 행동도 알게 모르게 물이 들었다. 물론 정체성 형성 과정의 가장 불쾌한 결과이다. 청소년이나 청년들만 신자유주의적 정체성을 키운 것이 아니다. 부모들 역시 이런 방향으로 힘껏 떠밀려왔다. 오늘날 모두는 일차적으로 바겐세일 사냥꾼이다. 직원을 자르는 경영자에 대한 분노는 상당히 근시안적이다. 해고는 단기적으로 더 많은 이익을 내고 싶어 하는 주주들 때문에 일어난다.
“최고의 상품을 최저가에!” 우리 모두는 이 모토를 추종한다. 고속도로 곳곳에 동유럽 트럭들이 출몰하여 불안하다고 투덜거리는 사람은 그 트럭들이 저임금 국가에서 생산된 염가의 소비재를 싣고 우리에게 달려오는 중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 인간은 이상한 분열에 시달린다. 새로운 형태인 인격 분열이다. 우리는 체제를 비판하고 체제에 적대적이면서도 변화를 꾀할 만큼의 힘은 없다고 느낀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체제를 강화하고 확장하는 생활방식을 고수한다. 우리가 먹고 마시며 입고 이동하고 여행하는 방법이 다 여기에 포함된다. 우리는 우리가 비난하는 그 체제의 일부이다.
저항한다고 우익이나 좌익 정당에 투표하는 것으로는 변하지 않는다. 타인들만 변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우리 자신도 변해야 한다. 소비만 할 것이 아니라 다시 국민의 권리를 고민해야 한다. 선거만 할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도, 아니 무엇보다 생활방식을 먼저 바꾸어야 한다.
가장 먼저 만연한 냉소주의를 버려야 한다. 냉소주의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배타적 진리로 생각하게끔 유혹한다. 대안이 없다는, TINA 신드롬(There is no Alternative), 오늘날의 위기가 환상의 위기임을 잘 보여준다. “이러다 살다 죽지 뭐”.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자” 같은 식의 숙명론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이기주의, 경쟁의식, 공격성은 당연히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다. 악의 평범함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타주의, 협력의지, 연대감, 요컨대 선의 평범함 역시 똑 같은 우리의 본성이며, 이중 어떤 특징이 주도권을 잡느냐는 환경이 결정한다. 우리는 영장류에 대한 드 발의 연구로부터 이런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영장류에 대한 큰 차이점은 우리는 우리의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 인정받을 때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 행복감이야말로 오늘날의 전형적인 상태, 즉 우울한 쾌락주의, 우울한 향락과 극명하게 대립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엇도 도움이 안 돼. 난 처음부터 글러먹은 인간이야. 불행했던 어린 시절 탓이야. 이 사회가 문제야 ∙∙∙∙ 어느 정도까지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확신이 우위를 점하면 우울증이 심해진다. 우울한 환자가 병을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길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일부나마 자기가 책임을 지는 인생의 측면에 집중하는 것이다.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지도 않다.
오늘날 우리 모두인 그들에게 이런 호소를 하고 싶다. 모두가 소비 습관을 바꿀 수 있다고 호소하고 싶다. 소비자에 머물지 않고 시민이 되어야 한다. 정치가에게 공익을 실천할 의무가(이전보다 더욱 더 절실하게)있다면 우리 역시 공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자면 물질을 포기하고, 다시금 새로운 윤리를 키워나가야 한다. 이 윤리는 항상 자율과 연대, 개인과 집단의 균형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푸코는 마지막 강연에서 파레시아, 즉 진실을 말할 용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리는 이 말을 너무 안이하게 해석한다. 종교단체를 비판하거나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우리 의견을 거침없이 ‘포스팅’하는 수준으로 말이다.
브뤼셀 수도권 대중교통에서 폭력 사건이 발생하자 저널리스트 니나 페르하에허는 그런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손 놓고 구경만 할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대처하자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용기이다. 인터넷 포털에서 욕을 하는 것으로는 너무 미약하다.
연대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예를 들어 버스 기사가 공격을 당할 경우 승객들이 함께 나서서 대응하는 것이다. 그 버스 기사가 바로 우리이다. 베르하에그는 새로운 버전의 밥(BOB)캠페인을 제안한다. 최대한 기억하기 쉬운 키워드를 이용해 연대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이다.
딥 프레임을 건드리면 행동도 바뀐다.
누구나 쉽게 기억할 수 있어 널리 회자되는 키워드는 숨어 있던 직관의 문을 열어 행동을 자극한다. 우리는 합리적-인지적 방법을 통해서만 행동이 변화한다고 믿는다. 효과가 한 참 후에 나타나더라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바를 설명해주기만 하면 절로 깨달아 설사 힘들더라도 올바른 결정을 내릴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오랜 세월 수많은 캠페인들이 이런 전략을 구사했고 이로 인해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결론은 뻔하다. 그런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특정한 메시지는 그것이 깊이 뿌리내린 감정과 가치를 건드릴 때 가장 가슴에 와 닿는다. “깊이 뿌리 내렸다.”는 비유는 우리가 이를 거의 의식하지 못하며 나아가 이것이 여기저기로 가지를 뻗어나간다는 의미이다. 요즘의 인지심리학은 딥 프레임(deep frames)이라고 정의한다. 프로이트는 심리치료를 하면서 특정한 키워드를 활용하면 환자들로 하여금 이런 복합물과 정서에 영향을 미쳐야만(프로이트의 경우 정신분석을 통해)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학관계자들을 앞에 두고 강연을 하면서 ‘학문의 자유’라는 말을 던지면 청중은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같은 강연에서 ‘검둥이’라는 말을 자꾸쓰면 청중은 마음의 문을 닫고 만다. 이유는 키워드가 깊이 숨어 있던 연상의 해석 모델을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다. 이 모델은 정서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직관에서 나온’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변화를 원한다면 합리적 요인보다 정서적 가치를 통해야 한다. 두뇌는 소용이 없다. 직관이 유용하다. 변화가 필요한 때이다. 개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공동의 가치를 부각시킬 용기를 내야 한다. 마음이 조급한 사람들은 새로운 이데올로기 체제의 강제도입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소위 전복이나 혁명을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역사는 이로 인한 대가가 엄청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모든 혁명은 제 자식을 잡아먹는다. 뿐만 아니라 모든 체제는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자유주의든 시간이 흐르면 자신의 캐리커처로 변질되고 만다. 이 또한 역사의 교훈이다.
지속적인 변화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며, 직관에서 나온다.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든다면 이미 변화는 시작된 것이다. 지금의 우리도 그러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변화를 조직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런 실패부터가 이미 핵심 문제, 즉 과도한 개인화의 상징이다.
연대는 합리적인 논리로 강요할 수 없다. 특히 지금과 같이 에고를 숭배하는 현실에서는 자기 행복의 배려야말로 최고의 출발점인 듯하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에피멜레이아(epimeleia), 즉 자기배려이다. 너무나 개인주의적으로 변한 우리에게 변화의 출발점은 다음과 같은 질문일 것이다. 좋은 삶, 행복한 삶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좋다고 느끼나?
자기배려를 이기심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기란 얼마나 힘든가? 요즘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자기배려는 남을 희생시켜야 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더구나 신자유주의 서사는 자기배려를 물질적, 외적으로 해석하는 관념을 사주한다. 더 많은 돈, 더 많이 편리함, 더 매력적인 몸, 이 모든 것은 피할 수 없는 경쟁과 질투를 낳는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정말로 더 행복하다고 느낄까? 그것이 정말로 자기배려인가?
마초 같은 경쟁의식은 자기배려와는 아무 관련이 없고 즐겁지도 않다. 누군가는 나보다 도 나은 성과를 올릴 테고 누군가는 더 비싼 제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위하려면 반드시 남을 희생시켜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타인의 정체성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나의 정체성이 변하면 이는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거꾸로도 역시 마찬가지다. 원래 의미의 자기배려는 자신의 삶을 윤리적으로 살아가면서 공익도 더불어 생각할 책임을 포함한다.
음식과 술, 섹스와 미용에 관한 한 우리는 쓰러질 때까지 즐겨야 한다. 그렇게 즐기는 동안 우리는 어떤 기분을 느끼나? 대답은 명약관화하다. 좋은 느낌이 아니다. 과유불급이다. 기껏해야 따분함을 느낄 테고, 더 심하면 장애와 예속을 낳는다. 돈이나 안락은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더 많은 행복을 선사하지 못한다. 오히려 반대다. 실망만 늘어난다. 이게 다야? 이것밖에 안 돼? 물질이 쌓일수록 물질로는 보상할 수 없는 뭔가 근본적인 것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강렬해진다.
실존적 차원의 결핍에, 삶의 위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물질적 대답은 없다는 사실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죄와 책임자를 찾는 것이다. 아이가 너무 뚱뚱하다고? 패스트푸드 체인점의 책임이다. 월요일 아침에 눈이 5cm 내리는 바람에 도로가 꽉 막혔다고? 기상청 책임이다. 예보를 정확하게 해주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테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고, 인생이나 사랑이나 죽음 같은 중요한 일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하면 견디기 힘들다. 그 때문에 이런 결핍이야말로 창의성의 원천이며, 타인들과 힘을 합하여 추구해 나갈 더 숭고한 목표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는다. 이런 목표가 학문일지, 이데올로기일지, 예술일지, 종교일지는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사람들한테 엮어 중요한 질문에 공동의 대답을 찾는 공동체를 꾸려준다는 사실이다.
신자유주의 정부는 외부 개입을 축소시켜 개인에게 더 많은 자유를 선사하는 자유 정부가 아니다. 정반대로는 늘어만 가는 계약과 규정의 양을 느낄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장은 어쩔 수 없이 과도한 개입을 몰고 온다. ‘더 많은 국가’냐, ‘더 많은 개인주의’냐를 두고 토론을 벌이는 짓은 쓸데없다. 제 기능을 다하는 국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듯 독립적인 개인도 없다.
푸코는 신자유주의의 강제 소비와 생산을 자유주의와 대비시켰다. 그가 말한 자유주의는 정당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잠식하는 훈육에 맞선 비판적 운동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바로 그런 비판적 운동이다.
우리에겐 자유로운 선택의 힘겹지만 꼭 필요한 균형을 회복시킬 정치체제가 필요하다. 이런 사회질서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주도해서 말이다. 셰익스피어라면 뭐라고 했을까?
인간은 때때로 운명의 주인이 된다네.
우리가 아랫것 노릇 하는 잘못은, 브루투스,
별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니까. <줄리어스 시저>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 가는가’ p287 중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파울 페르하에허 지음, 장혜경님 옮김, 반비출판>
* 파울 페르하에허 : 벨기에 헨트 대학의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이다. 2000년 출간된 <정상성과 장애에 관하여>로 괴테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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