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삶의 짧음에 대하여

[중산] 2021. 2. 8. 13:36

여러분은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처럼 살고 있다. 이미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갔는가를 여러분은 주의하지 않는다. 넘쳐 나오는 더운 물을 쓰듯이 여러분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나는 50세부터 한가한 생활로 물러난다. 60세가 되면 공무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럼 묻겠는데 그대는 장수한다는 보증이라도 받았단 말인가'.

 

유익한 계획을 50세, 60세가 되도록 미루어 놓고, 매우 적은 사람밖에 살아보지 못한 나이에 비로소 삶에 착수하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인간의 가능성을 저버린 어리석은 짓인가.(참고로, 세네카는 기원전 4년에 태어난 것을 감안해야 한다!)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높은 자리에 오를 사람들의 입에서, 휴가를 원하고 한가로운 삶을 바라며, 휴가는 자기의 어떤 행복보다 더 낫다는 말을 무의식중에 하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들은 이따금 자기가 있는 높은 정상의 자리에서, 혹시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다면 내려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 하나 외부에서 공격을 하든가 파괴하는 자가 없어도, 행운은 저절로 무너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은혜를 너무나 망각하지 않는 한 성스러운 견식을 쌓아올린 그 훌륭한 사람들은, 우리를 위하여 태어난 것이고, 우리를 위하여 삶을 준비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넓은 마음을 가지고 인간적 약점인 애로를 벗어나려고 하면, 거기에는 자유로 지낼 수 있는 많은 시간이 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서로 논할 수 있고, 카르네아테스(기원전 2세기의 그리스 철학자)와 회의(懷疑)를 함께 할 수도 있으며, 에피쿠로스와도 함께 평안하여 질 수 도 있고, 스토아파의 사람들과 함께 인간성을 타파할 수 도 있고, 또 큐니코스파 사람들과 함께 극복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언젠가는 죽을 몸인데, 심술궂은 자연을 탓한단 말이야. 무엇 때문에 우리는 자연에 대하여 불평을 하는가. 자연은 호의를 가지고 우리를 대해주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는가 하면, 쓸데없는 고생을 하면서 힘들고 귀찮은 일에 매달리는 사람도 있다.

 

남의 의견에 늘 좌우되고 야심에 끌려 다니다가 지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장사로 무슨 짓이라도 해서 돈을 벌려는 생각에서, 벌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쫓아가는 자도 있다. 끊임없이 남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몰두하는가 하면, 자기에게 위험이 닥쳐오는 것을 걱정하면서 전쟁에 열을 올리는 자도 있다.

 

또 고맙게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고위층의 인물에게 아부하며, 스스로 굴종하면서 몸을 축내는 자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남의 운명을 위해 노력하거나, 아니면 자기의 운명을 한탄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또 많은 사람들은 확고한 목적을 추구하지도 않고, 줏대 없는 변덕으로 싫증을 잘 내며 경솔하게 연달아 새로운 계획에 뛰어든다.

 

어떤 자는 자기의 진로를 정하는 일에도 아무 흥미가 없고, 게으름을 피우고 하품이나 하는 동안에 운은 다 가버리고 만다. 우리가 사는 삶은 눈 깜짝할 사이, 결국 그 밖의 기간은 모두 삶이 아니고 덧없는 시간에 불과하다.

 

자연이 어떤 시대와도 교류하는 것을 허락해 주는 이상, 이 짧고 덧없이 변해가는 시간으로부터 온 영혼을 기울여 자기 자신을 떼 내어서, 그 헤아릴 수 없는 영원한, 또 우리보다 훌륭한 사람들과 공유하는 일에 몰입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현자만이 인류의 온갖 제도에서 해방되어 있다. 때는 과거가 되었는가. 현자는 이것을 회상함으로써 파악한다. 때는 바야흐로 현재인가. 현자는 이것을 활용한다. 때는 미래에 있는가. 현자는 미리 안다. 모든 때를 하나로 모음으로써 현자의 생명은 영속되는 것이다.

 

과거를 망각하고 현재를 가벼이 여기며 미래를 두려워하는 자들의 삶은 매우 짧고 매우 불안하다. 삶의 종말에 이르러서야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이 오랫동안 바쁘게 지냈다는 것을 깨닫지만, 가엾게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그들은 무지한 까닭에 불안한 마음을 일으킴과 동시에,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 자체로 뛰어들려고 하는 마음이 생겨 괴로워한다.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들은 때때로 죽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루를 지루하게 생각한다든가, 약속한 저녁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불평을 한다든가, 그런 것도 오래 살고 있다는 증거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쁜 생활로부터 벗어나면, 한가한 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안달하며, 그 한가한 시간을 어떻게 쓸지 어떻게 연장할지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슨 바쁜 딴 일을 찾으려고 애쓰는데, 그 동안의 시간을 참지 못할 정도이다. 예를 들면, 무슨 흥행이나 오락의 개최를 초조하게 기다릴 때라든가, 그런 경우에는 개최 일까지 며칠을 뛰어넘어 가고 싶을 정도인데, 그런 기분과 똑 같은 것이다. 그들에게 희망하는 모든 것이, 언제까지나 꾸물대고 있는 것같이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소중하게 여기는 시간은 짧고 빠른 데다 그들 자신의 나쁜 버릇 때문에 차츰 더 짧아진다. 결국 거기에서 딴 쾌락을 찾아 옮겨 다니며, 어떤 하나의 욕망에 만족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지루한 것이 아니라 지겨운 것이다.

 

그대는 이제 속세를 떠나, 이와 같은 문제들에 마음을 돌리고 싶지 않은가. 지금 따뜻한 피가 통하고 있는 동안에, 발랄한 원기를 가지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생활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수많은 훌륭한 일들이다. 즉, 덕을 애호하고 실천하며, 정욕을 망각해버리고, 삶과 죽음을 인식하며, 깊은 안정을 갖는 생활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대체로 바쁜 사람의 상태는 비참한 것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자라면, 자기의 용무도 아닌 일에 애를 쓰거나, 남이 잔다고 덩달아 자거나, 남의 보조에 맞추어 돌아다니거나, 무엇보다도 가장 자유로워야 할 사랑과 미움을 명령을 받고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자기 자신의 삶이 얼마나 짧은가를 알려고 생각한다면, 자기만의 생활이 얼마나 적은 부분밖에 되지 않는가를 생각해 보면 안다.

 

그러므로 지위가 높은 관복을 몇 번이나 입은 사람을 보아도, 대 광장에서 명성을 떨친 사람을 보아도, 그런 것을 그대는 부러워하면 안 된다. 고관이나 명성은 삶을 희생하여 획득한 것이다. 어떤 자는 야망의 정점에 이르기도 전에, 벌써 분투의 첫 단계에서 삶에 버림을 받는다. 어떤 자는 숱한 불명예를 겪은 끝에 최고의 명예에 기어오르면, 문득 자기는 지금까지 묘비명을 위해서 이 고생을 해 왔나 하는, 비참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또 어떤 자는 최후의 노년에 이르러, 마치 청년과 같이 새로운 희망을 향하여 정력을 발휘하는 동안에, 과대하고 무모한 기획을 진행하는 도중, 힘이 달려 마침내 기진맥진하고 만다. 꼴사나운 추태는, 지긋한 나이에서 변론에 열을 올리다가 숨을 거둔 사람이다. 또 보기 흉한 것은, 아직 일도 하기 전에 생활에 지쳐, 자기 직무의 도중에 쓰러져 버리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보기 흉한 것은 계산서를 받고 있는 도중에 죽어서, 오래 기다리던 유산 상속인에게 웃음을 사는 사람이다.

 

가이우스 투란니우스는, 더할 나위 없이 부지런한 노인이었다. 이 노인은 90세를 넘어, 가이우스 황제로부터 일방적으로 집사직을 파면 당했을 때, 명령을 받은 자기를 침대에 뉘어 놓고, 주위를 둘러싼 가족들이 마치 죽은 사람이라도 대하는 것처럼 슬피 울었다.

 

가신들은 늙은 주인이 할 일이 없게 된 것을 한탄하며, 노인이 복직이 될 때까지 슬퍼하여 마지않았다. 바쁜 몸으로 죽는 것이 이렇게도 기쁠 줄이야. 대개의 사람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근무를 바라는 욕망은, 그것을 견딜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오래 지속된다.

 

사람들은 육체의 약한 것과 싸우지만, 노년이라는 말만 들어도 씁쓸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노인이기 때문에 제외자가 되는 까닭이다. 법률도 50세부터는 병사로 징집하지 않고, 60세부터는 원로원 의원도 소집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한가한 시간을 얻는 것이 법률에서 얻는 것보다 어려운 셈이다.

 

사람들은 쟁탈을 되풀이하고 있는 동안에, 또 서로 평온을 깨뜨리고 있는 동안에, 그리고 번갈아 가며 서로 불행하게 하고 있는 동안에, 삶에는 아무 결실도 없이, 즐거움도 없이, 마음의 진보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도 가까이 죽음을 응시하는 자는 없지만, 아무도 먼 곳에 기대를 거는 자도 없다.

 

사는 데 있어 최대의 장애는 기대를 갖는다는 것인데, 그것은 내일에 의존하여 오늘을 잃는 것이다. 운명의 수중에 있는 것을 늘어놓고, 현재 손바닥에 있는 것을 팽개친다. 그대는 어디를 보고 있는가. 어디를 향하여 가려고 하는가. 장래의 일은 모두 불확정 속에 존재한다. 지금 당장 살아야 된다. 시인도 다음과 같은 구원의 시를 노래하고 있다.

 

행복과 인연이 먼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가장 좋은 날은, 맨 먼저 도망쳐 가는구나.

(베르길리우스 ⌜농경시⌟)

 

<‘세네카의 인생론‘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세네카 지음,김천운님 옮김,동서문화사>

* 세네카 : 초대 로마 황제인 아우그스투스의 치하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4년 또는 기원 후 1년에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AD1년~65). 제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 시대에 철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제3대 황제인 가이우스 시대에, 세네카는 집필활동을 시작했다.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치하에서 철학과 윤리학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폭정을 펼친 제5대 황제 네로의 치하에서 수많은 철학서를 집필했다. 소년 네로의 사부로서 그를 지도하였고, 황제가된 네로의 정치최고 고문격인 집정관이라는 중책도 맡은 세네카였지만, 65년 음모사건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자결하라는 네로의 명이 떨어졌다. 그의 최후는 ‘소크레테스의 죽음’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악명 높은 네로를 세네카는 열심히 가르치려고 하다가 원한을 사게 되어 자결 명령을 받은 것이다. 네로는 세네카의 고결한 인격에 질렸다는 사실이 이면에 숨어 있었다.

 

고뇌와 비탄, 고독, 몰이해,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적극적인 '동반자'로 삼으라고 세네카는 우리에게 설득한다. 올바른 운명을 달게 받아들이는 것은 운명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안 된다. 세네카야말로 이런 의미에서 니체의 선구자였다. 

 

                                                                                         진하해수욕장

명선도
명선교

                                                         명선교에서 본 강양항, 멀리 보이는 아파트 건물이 온양(남창)이다!

명선교에서 본 명선도, 걸어 들어갈 수 있으며 그곳에 휴식공간이 있다. 해변에는 낚시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독서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울할 땐 뇌 과학!  (0) 2021.02.20
우리가 변하는 수밖에 없다!  (0) 2021.02.15
문을 밀까, 두드릴까  (0) 2021.01.28
침묵의 잔해  (0) 2021.01.08
여성시대  (0) 2021.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