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 중고등교육을 받은 여성 인구가 해마다 늘면서 남녀 간 교육 격차를 줄였다. 현재 고등교육을 받는 여학생과 남학생의 비율은 3 대 2다. 유럽에서는 남성보다 평균 10퍼센트, 노르웨이에서는 18퍼센트 더 많은 여성이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잘 배운 남자가 덜 배운 여자와 결혼한다는 전통적인 관념도 바뀌기 시작했다. 20세기에 2세대 페미니즘이 여성해방 운동을 벌일 무렵, 미국 대학은 여성이 고등교육에 더 쉽게 접근 할 수 있도록 입학 정책을 바꿨다. 요즘 들어 다시 입학 요건을 완화하는 추세인데, 이번에는 남학생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남학생의 입학 비율이 급격히 감소했기 때문이다.
교육 격차는 서양 사회 전반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자 남자아이들이 갈수록 학교 공부를 따라오지 못하는 현상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보다 더 많이 학습 ‘장애’와 주의력 결핍 문제를 겪으며 더 많이 ‘동기부여’를 필요로 한다. 어린 여동생을 학교로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의젓한 오빠의 이미지는 여전히 벨기에 학교 앞 표지판에 그려져 있지만,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 이제는 딸들이 롤모델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아들들은 엄마 속을 썩이는 역할을 한다. 존 팬트의 소설 ⌜마이 도그 스튜피드⌟에 나오는 교사는 에세이를 표절한 남학생에게 F학점을 주지만, 그 학생 어머니에게는 따로 편지를 써서 자신이 읽어 본 글 중 최고였다는 찬사를 전한다. 아들의 숙제를 대신해주는 어머니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이다.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보다 성적이 좋지 못한 원인은 확실치 않다. 고등교육을 받는 남학생의 경우, 여학생과 비교해 비디오 게임을 하고, 파티를 다니고, 섹스 할 상대를 쫓아다니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이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지난 50년 동안 고학력 여성과 고위직에 오른 여성 인구는 그 이전 2500년 동안의 고학력, 고위직 여성을 합친 것보다 더 많으며 그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25년쯤 후에는 사다리 꼭대기에 오른 남자들이 보호가 필요한 희귀종이 되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남성들은 요즘과 같은 지식 기반 경제에서 점점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 것이다. 사회 최하층에 속한 일하지 않는 남성들은 전통적 성역할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생계부양자를 자처한 여성들은 아이의 아버지가 가정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미혼모 인구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이 아버지가 자기 역할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아이 어머니가 그 남자를 자신의 배우자이자 아이의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미혼모 집단을 보면, 결혼을 선택하는 여성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2011년 미국에서는 신생아 절반이 30세 미만의 미혼모가 출산한 아이였다. 이 여성들은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꾸려 나가기를 원하며, 대체로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고 다른 여성들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를 돕는다. 이들은 사랑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이런 경향은 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이 3명 중 1명이 미혼모에게서 태어나고, 7명 중 1명이 한 부모 가정에서 태어나며 앞으로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네덜란드는 2030년이 되면 전체 가정의 22퍼센트가 한 부모 가정일 것으로 추산한다.
대조적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혼인율이 다시 증가하고 있다. 여성이 자기보다 교육 수준이 낮은 남성과 결혼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상적으로는 둘 다 수입이 높은 직업을 갖고 있으며 가사는 공동으로 부담한다. 이것이 ‘이상적인’이유는, 실제로 육아의 책임은 여전히 여성/어머니에게 지워진다는 사실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계층의 혼인율이 증가하긴 했지만, 이들 중 비혼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사람 또한 급격히 많아졌다. 우리의 사랑 관계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현재 이혼율로 보건데, 임상심리학자들은 요즘 젊은이들이 애착 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베이비부머 세대인 부모가 관계에 실패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진화심리학자들은 남자는 화성, 여자는 금성에서 왔으니 ‘둘이 절대 합쳐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말에도 어느 정도 진실이 있을 테지만, 이혼율이 상승한 가장 명백한 이유는 그리 복잡하지 않으며 지난 50년간 사회에서 일어난 변화와 관련이 있다. 즉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의 증가와 그에 따른 여성의 경제적 독립, 확실한 피임법의 보급 같은 요인들이 작용해 남녀 사이의 권력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미국에서는 여성 청소년이 저지르는 폭력 범죄율이 급격히 올랐다. (물론 여전히 남성 청소년 범죄율이 훨씬 더 높다) 동시에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이 감소하고, 여성이 가한 가정폭력이 증가했다. 사회심리학에 따르면, 여성은 ‘부드럽고’ ‘타협적‘이라는 사회적 기대가 사라졌을 때 비로소 여성의 폭력성이 드러난다고 했다. 가부장제의 종말은 남성이 특권적 지위를 잃었으며 이제 자신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남성들의 이 상실은 두려움을 초래하고, ‘투쟁 혹은 도피’라는 예상 가능한 반응을 일으킨다.
오늘날 남성은 여성보다 사춘기를 더 오래 겪는다는 인식이 있다. 또래 여성에 비해서도 독립이 늦다. 남성들이 싱글을 택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섹스 파트너가 충분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여자들이 두려워서일 수도 있다. 일본에서는 후자를 ‘초식남(草食男)’이라는 이름을 붙이기까지 했다. 草食男은 감히 여자와 관계를 시작하려고 하지 않는다. 남성 청소년의 3분의 1, 미혼 남성의 3분의 2정도가 초식남으로 추정된다.
가부장적인 빅토리아시대를 살았던 프로이트는, 남성 내면에서 상충하는 성욕과 두려움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지극히 그 시대다운 답변을 내놓았다. 다정한 애정 관계는 점잖은 아내와, 공격적인 섹스는 하찮은 성매매 여성과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이 이런 이분법에 새로운 형태를 부여했다. 어떤 커플들은 이메일, 채팅, 또는 웹캠 같은 가상 세계에서 은밀한 관계를 맺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만남을 꺼린다.
반대편 극단에는 ‘훅업(hook up)문화가 존재한다. 아무런 감정적 교류 없이 섹스만 즐긴다는 점에서 ’원나잇‘의 새로운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런 문화는 미국 대학가에서 시작됐는데, 학생들은(대부분 남학생이었으나 점점 더 많은 여학생도) 애정과 무관하게 쾌락을 위한 잠자리 상대를 찾아다닌다. 진지한 관계는 나중이고 경력 관리가 먼저다.
여성을 향한 두려움은 오랜 주제다. 가부장제가 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때에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이 현상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아이들은 자기 어머니를 전능한 존재로 생각하며 이 전능함이 어머니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여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딸은 스스로 여성/어머니가 됨으로써 이 두려움에서 탈출할 수 있다. 반면 아들의 경우, 성인 남성이 되어 여성에게 성적으로 의존하게 되면서 두려움이 더 심해진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남자는 더 애원하는 위치에 있고, 그러므로 ‘여자가 원하는 것을 신은 원한다.’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설명은 남성의 심리에 초점을 맞춘다. 서양 문화에서 섹슈얼리티는 수 백 년 동안 심하게 억압받았고 악한 것, 부끄러운 것, 또는 위험한 것으로 비춰졌다. 주도권을 가진 성별(즉 남성)에게 자신의 욕구를 통제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여성을 억압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표현으로는 하와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여성은 원죄의 근원이 되고, 남성은 또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억압해 여성들 스스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공격하게 함으로써 자기 안의 성적 갈등을 회피할 수 있었고, 면죄부를 받을 수도 있었다. 섹슈얼리티와의 싸움은 사회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여성에 대한 억압과 공격은 여성 교육 금지부터 ‘단정한’복장 의무화까지 가부장제의 다양한 사회적 규칙들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교회 예배당, 유대교 회당, 이슬람 모스크에 여성을 구분하는 공간이 따로 있음은 물론이다.)
여성 참정권거부와 교육 기회 제한 등의 구조적 공격성은 이제 상당부분 사라졌다. 어쩌면 공격성보다 두려움이 더 많아졌을지도 모른다. 이 맥락에서 두려움의 증가는 섹스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가부장적 권위는 섹슈얼리티를 억압한다. 섹스는 나쁘고, 비도덕적이고, 부끄러운 것 된다. 가부장제는 이렇게 성역할을 배정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여성에게 상당한 권력을 쥐어주었다. ‘머리가 아파서 아무래도 오늘밤은 안 되겠어요.’라고 말하는 아내와 같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섹스는 무기다. 프랑스영화 ⌜소스: 아내들의 파업⌟은 마을 남자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할 때까지 섹스 파업에 돌입한다. 부당한 처지를 바꾸고자 ‘섹스’를 이용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러자 남자들은 금세 평화협정을 타결한다. 여성들이 임신 걱정 없이 섹스를 즐길 수 있고, 그로 인해 섹스를 분명하게 욕망할 수 있었던 것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고작 지난 50년이 전부이다.
가부장적 권위가 사라지면서 섹스에 관해서만큼은 확실히 자유로워졌다. 어떤 사람들은 도덕적 재앙이라고 생각하며, 결혼한 3쌍 중 2쌍이 이혼하고 관계를 쌓아가기가 어려워진 현실의 원인이라고 여긴다. 그들은 그 원인은 다른데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를테면 강요된 개인화라거나, 우리와 우리 관계에 부과된 자유 시장 원칙들이 그 원인일 수 있다.
섹스와 임신의 연관성이 끊어지자 섹스, 나이, 성별의 연관성도 상당히 느슨해졌다. 성애를 표현하는 것이 부부, 또는 비슷한 연령대의 남녀 사이에서만 허락되는 것도 아니다. 나이 든 여자가 훨씬 어린 남자와 관계를 가지기도 하며 그 반대는 물론이다. 남녀 모두 예전 보다 더 많은 섹스를 한다. 그 결과, 섹스가 갖는 영향력 자체가 다소 줄어들었다. 이제는 여자가 먼저 섹스를 주도할 수 있다. 우리는 결혼 시장의 원칙에 따라 이성 관계에 ‘투자’를 한다.(‘누가 가장 좋은 상품일까?’) 많은 경우 상대를 고르는 일은 온라인에서 이뤄진다. 짝을 고를 때에는 합리적 숙고가 아닌 직감에 따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렸다.
비혼족이 늘어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에게 강요된 자율성 때문이다. 모두가 ‘자신만의 것’을 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미국 사회학자 세넷은 ‘개인’에 대한 만연한 강조와 개인 삶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에 지나치게 초점이 맞춰진 나머지, 우리가 사회적 동물이란 사실을 망각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인과 부대껴야 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다들 자아를 찾는 여행을 떠나지만 아무도 만족스러운 답을 찾지 못한다.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개인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정체성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얻는다.
개인과 개인 심리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는 것 외에도, 우리사회는 지나치게 성에 집착하고 있다.(성은 팔리니까.) 세넷은 이 현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는 짜증날 만큼 끈질기게 성기를 통해 자아를 찾으려고 한다.” 불행히도 그 결과로 이전에 없던 불만족스러움이 생겨났다.
가부장제는 사람은 남자거나 여자라는 젠더 이분법에 기초한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분(남자/여자, 자연/문화, 신체/정신)에는 눈에 띄는 특징이 하나 있다. 언제나 한쪽이 우월하면 한쪽은 열등하고, 한쪽이 지배적이면 한쪽은 수동적이라는 것이다. 입장이 역전되는 일은 가능하지만, 이분법적 체계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오직 이성에게만 호감을 느껴야 했다. WHO는 1990년이 되어서야 정신질환 목록에서 동성애를 삭제했다.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만큼 (비)정상적이며 다양하다. 2001년 네덜란드에서 동성결혼이 처음 법적으로 허용된 후에 여러 국가에서 그 흐름을 따르고 있다. ‘성‘,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구분 짓는 작업은 의문의 여지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온 젠더 이분법을 재고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심리적 정체성과 성적 지향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로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 양성애자까지 아우르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이렇게 범주가 넓어지면서 각각 다른 정체성들을 구분하던 경계선이 흐려졌다는 것이다.
전통적 관점에 따르자면 여자들은 ‘일반적으로 여성스럽고(온화하고, 어머니 같고, 살짝 순진하고, 상대를 위로한다.)’,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남성스럽다.(경쟁심 있고, 공격적이고, 위계질서를 따지고, 결과 중심적이다.)’ 그러나 20세기 말 이뤄진 연구 결과를 통해 이런 남녀 성향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양육환경과 문화 영향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이 주장은 점차 사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지난 10년간 과학자들은 뇌과학의 발전을 토대로 남자와 여자의 신경학적 차이를 열심히 찾아내고 있다. 실제로도 남자와 여자의 뇌가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는 결과가 나왔다.
예전에는 결혼하는 것이 당연했으며, 아이를 낳지 않으면 동정을 받거나 의심을 샀고, 이혼은 가문의 수치였다. 남자는 도덕적으로 정당하게 섹스를 하려고 결혼을 했고, 덤으로 가정부까지 얻을 수 있었다. 여자는 자녀와 든든한(자기 집 마련을 목표로 하는) 생계부양자를 꿈꾸며 시집을 갔다. 이제는 남자들이 아이를 더 갖고 싶어 하고, 섹스에 대한 이견 충돌이 이혼 사유가 되기도 한다. 현대에 들어 생겨난 ‘가족’ 개념의 다양성을 들어다보면, 핵가족, 대가족, 일인가구, LAT(living apart together, 따로 함께 살기)족, LTA(living togetherapart, 함께 따로 살기)족, 성소수자 가족, 다문화 가족, 기러기 가족, 비 혈연 가족 등 아주 다양하다.
과거 여자들의 성공은 어떤 남자와 결혼하는지에 따라 결정됐다. 이는 지금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 이유는 완전히 다르다. 이제는 배우자가 집안일을 얼마나 분담하는가, 누구의 경력을 우선시하는가 하는 사안을 따져야 한다. 가령 출세를 꿈꾸는 야심가와 결혼한 젊은 여성은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 아직까지 남성 전업주부는 극히 소수다.
병가로 결근을 하고 번아웃을 겪는 직장인들이 속출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계속 일하기'는 갈수록 불가능해지고 있다. 가장 뻔한 해결책은 일과 수입의 균형을 다시 맞춰 더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얻고 '워라벨'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쪽은 남자들이다. 고학력 여성들은 확실하게 피임을 하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을 택한다. 남편이 아무리 안심을 시켜도 육아의 책임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란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는 피라미드식 구조로 작동하며, 군대와 교회가 그 예시이다. 여성은 이러한 예시에 거의 해당되지 않는다. 이는 여성들 사이에서 피라미드식 구조가 덜 퍼져 있다는 뜻이다. 가부장제가 쇠퇴하고 고학력 여성들이 리더의 지위를 차지하면서, 일부 사람들은 여성이 지배하게 되면 공감과 설득, 장기적인 안목과 같은 소위 전형적인 여성적 특징들에 기초한 온화한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러한 바람은 고대부터 존재했다. 여성들의 섹스파업에 대해 글을 썼던 아리스토파네스는 말년에 쓴 희곡에서 여성들이 지배하는 사회를 그리기도 했다. 나는 이와 같은 전망에 회의적이다. 공감과 설득, 미래를 길게 내다볼 줄 아는 안목 같은 특징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이것들이 정말로 여성적인 특징인지는 잘 모르겠다. 성비가 균형 잡힌 집단이 단일성별로 이뤄진 집단보다 일을 더 잘한다는 것은 내 개인적인 경험과 학술 연구로 증명되었다.~ <‘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에서 P342 중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파울 페르하에허지음, 이승욱님 외2명 옮김반비 출판>*파울 페르하에허, 벨기에 헨트 대학교의 교수, 임상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 *내용이 방대하여 요약 발췌분의 문맥흐름이 매끄럽지 못하다. 상세 내용은 책을 통해서 이해하길 바란다. 누구나 바쁜 일상에 매몰되어 시대적 흐름을 놓치기 쉽다. 책 제목처럼 성장이 멈춘 어른이 되면 나 자신과 가까운 주위만 힘들어지게 된다. 가부장적 시대에 살아온 남성들이 특히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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