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잔해
비행기들은 구름 뒤에 침묵하고 있는 침묵을 찾아 하늘을 샅샅이 뒤지고, 프로펠러의 진동소리는 침묵을 공격하는 아우성 같다.
대도시는 거대한 소음의 저수지이다. 소음은 마치 하나의 상품처럼 도시에서 제조된다. 소음은 그것이 나온 대상과는 완전히 절연된 채 쌓여 그 도시 위에 진을 치고 있다가 인간과 사물위로 떨어져 내린다. 그러나 밤에 불들이 꺼지게 되면, 거리는 마치 소음이 그 안으로 굴러 떨어져 사라져버린 갱도처럼 보인다. 그 도시의 인간들과 사물들은 이제는 더 이상 소음이 그들을 채워주지 않는 까닭에 수축된다.
사람들은 그림자처럼 가볍게 집들을 스쳐 지나가고, 집집마다의 벽들은 무너져버린 거대한 묘석의 전면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베개에 귀를 대고 잠자고 있는 사람들은 저 밑 땅속 깊은 곳으로 사라져버린 소음을 찾아, 아니 어쩌면 침묵을 찾아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대도시는 침묵에 대항하는 요새이지만, 그 주위는 파멸의 냄새로 둘러싸여 있다. 대도시의 격렬함 속에는 말하자면 몰락을 향한 어떤 몸부림이 있다. 도시는 죽음을 찾고 있다. 살아 있는 침묵을 가지지 못한 도시는 몰락을 통해서 침묵을 찾는다.
확실히 하나의 세계로서의 침묵은 파괴되었다. 소음이 모든 것을 차지했고, 이 지상은 소음의 것인 듯이 보인다.
정신이나 종교, 박애, 정치에 의한 세계의 하나 됨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음 속에서의 세계의 하나 됨이 존재할 뿐이다. 모든 인간과 모든 사물이 소음 속에서 서로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도 소리 없이 아침이 열리고, 나무들이 소리 없이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고, 그러한 것들의 침묵이 오늘날보다 더 완벽했던 적도 결코 없었고, 오늘날보다 더 아름다웠던 적도 결코 없었다. 그러한 것들의 침묵은 고독하다.
예전에는 그러한 것들로부터 지상의 다른 사람들에게, 인간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던 침묵의 위력이 이제 완전히 자기 자신 안에서만 작용한다. 어느 가난한 사람이 한번은 다른 가난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나를 존중하지 않아. 그래서 스스로 나 자신을 존중하게 되었지. 나 혼자서만.” 그러한 경우들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그것들에게 침묵을 주지 않고, 아무도 그것들에게 침묵을 가져가지 않는다. 그것들은 침묵을 자기 자신에게 주고, 자기 혼자서만 가지고 있다.
병, 죽음 그리고 죽음
오늘날 인간에게 잠이 없는 것은 인간에게 침묵이 없기 때문이다. 잠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침묵과 함께 보편적인 거대한 침묵 속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에게는 잠의 보편적인 거대한 침묵에게로 데려다줄 자기 내부의 침묵이 결여되어 있었다. 오늘날 잠이란 소음에 의한 피로현상이며, 소음에 대한 반작용일 뿐이다. 잠은 이제 결코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다. “잠자는 사람 또한 일을 하고 있으며,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에 협력하고 있다.“(헤라클레이토스)
종종, 한 병자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면, 그 병자는 마치 침묵이 자리 잡고 앉은 한 장소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병이 오고, 침묵이 그 뒤를 따라왔던 것이다. 병은 다만 침묵을 위해서 자리를 만들어주는 한 가지 길 인 것 같다. 천천히 침묵이 병자들의 몸을 점령해가고, 병자의 말과 문병객의 말은 이 침묵을 뚫고 나가기 어렵다.
뇌졸중을 앓은 이후로는 아주 느리게 밖에 말할 수 없게 된다. 침묵으로부터 다시 한마디 말을 끌어내는 데 성공하면 그것은 하나의 창조와 같다. 건강했을 적에는 그 자신이 결코 이루지 못했던 것, 즉 침묵으로부터 말이 나오는 것을 비상한 일로 체험하는 일을 병을 통해서 이룰 수도 있다.
병자에게는 항시 침묵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병자에게 있는 침묵은 예전과 같은 침묵은 아니다. 오늘날 병자 곁에 있는 침묵은 조금 섬뜩한 것이다. 왜냐하면 건강한 생명의 일부여야 하며, 그 건강한 생명 안에서 작용해야 하는 침묵이 이제 거기서 쫓겨나서 병자 곁에만 머물기 때문이다.
고약한, 복수심에 찬 침묵 자체인 듯한 질병들이 있다. 침묵이 복수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쫓겨났기 때문이며, 병이라는 어두운 굴을 통하지 않고는 위로, 인간에게로 뚫고 올라갈 수 가 없기 때문이다. 암이 바로 그러한 병이다. 암이라는 병은 침묵에 싸여 있다. 침묵에 싸여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 병의 원인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은 어떤 고약한 침묵의 징후와 같은 것일 뿐인 그 모든 증상들을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더 심하게 암에 의해서 병들어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죽음은 더 이상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삶의 마지막 잔해, 모두 소비해버린 삶일 뿐이다. 이제 침묵은 결코 죽음의 소유가 아니며, 다만 죽음에게 대여된 것, 동정심에서 대여된 것일 뿐이다.
“죽음이 우리에게 불가시의를 가장 잘 느끼게 만든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죽음은 우리에게 반대로 삶을 더 무게 있는 것으로 만드는 역할을 할 수 도 있는 최후의 것일 수밖에 없다. 죽음이 공동의 운명으로 우리 모두의 머리 위에 어쩔 수 없이 드리워놓은 침묵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죽음을 우리의 공동성의 분명한 상징으로 존중하도록 하자.”(오버베크)
침묵과 신앙
침묵 속에서 인간과 신의 신비가 처음으로 서로 만난다. 신의 침묵은 인간의 침묵과는 다르다. 신의 침묵은 말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신에게는 말과 침묵이 하나이다. 말이 인간의 본질이 되듯이, 침묵은 신의 본질이 된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이 드러난다. 그것은 말이며 동시에 침묵인 것이다.
신의 침묵은 사랑을 통해서 말씀으로 변한다. 신의 말씀은 스스로를 바치는 침묵, 인간에게 스스로를 바치는 침묵이다.
나는 가장 많은 빛들을 받아들이는 천국에 있었고
그리고 많은 것들을 보았으되 그러나 그곳에서 도로 내려온
어느 누구도 그것들을 말로 이야기할 수 없었으니,
왜냐하면 동경의 자취를 따라 황급히
한없이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우리의 정신은
기억을 더듬어도 되돌아갈 길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단테, ⌜신곡⌟ “천국”)
“세계의 현 상태, 생활 전체가 병들어 있다. 만일 내가 의사이고 그래서 당신이 무슨 충고를 해주겠느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침묵을 창조하라! 인간을 침묵에게로 데려가라. 이렇게는 신의 말씀이 들릴 수 없다. 그리고 소음 속에서도 들릴 수 있도록 소란스런 방법을 사용하여 신의 말씀을 외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의 말씀이 아니다. 그러므로 침묵을 창조하라!“(키에르케고르)
<‘침묵의 세계’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님 옮김>
* 막스 피카르트 : 1888년 독일 슈바르츠발트 지방에서 태어나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의학부 조교를 거쳐 뮌헨에서 개업한 의사이다. 만년에는 스위스에서 문필 활동을 하다가 1965년에 영면했다. <사람의 얼굴>,<신으로부터의 도주>,<우리안의 히틀러>등이 있다.
신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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