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밀까, 두드릴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퇴고(推敲’)라는 말은 당대의 시인 가도(賈島)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가까운 데 이웃이 적어 한가로운데 閑居隣竝少
풀숲의 길은 황량한 들판으로 들어가네. 草徑入荒園
새들은 연못가 나무 위에 잠들고 鳥宿池邊樹
스님이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리네. 僧鼓月下門
이 시의 마지막 행 두 번째 글자인 ‘고 鼓’는 ‘두드리다“는 뜻이다. 시인은 애초에 이 글자가 들어 간 자리에 ”민다“는 뜻의 ’퇴推‘를 썼다고 한다. 어느 날 노새를 타고가면서도 ’퇴‘로 할지 ’고‘로 할지 골똘하게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그만 길을 지나던 고관의 행차와 부딪치고 말았다.
고관 앞에 끌려간 가도는 글자 한 자를 결정하지 못해 실수를 범했노라고 아뢰었다. 그 고관은 당시의 최고 문장가 한유였다. 그는 호쾌하게 잠시 생각하더니 ‘퇴’자보다는 ‘고’가 낫겠다는 의견을 내 놓았다. 그때부터 둘은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그 이후 글을 수정할 때 퇴고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그런데 한유는 왜 ‘퇴’보다 ‘고’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일까? 이것을 단순히 취향에 의한 단어 선택의 문제로 보면 곤란하다. 새들도 잠든 한가하고 고요한 밤에 스님이 문을 ‘밀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 그 뒤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새로운 이야기도 사건도 등장인물도 필요 없다. 문을 밀고 들어가는 것은 자신의 거처이므로 스님은 발을 닦고 이불 펴고 잠들면 그만이다.
자신의 집이 아니라고 해도 주인과 미리 약속이 되어 있으므로 거리낌 없이 들어가면 될 뿐이다. 긴장감 없는 정황은 울림이 없는 시를 만들고 만다. 그러나 스님이 낯선 집의 대문을 두드리게 되면 그 대문까지 걸어온 탁발의 고된 길이 보이고, 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 새들이 날개를 푸덕이는 소리가 들린다. 또 집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와 스님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문을 두드리는 순간에 시가 역동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스님을 맞이하는 이가 수염이 덥수룩한 산적 같은 사내면 어떻고 어여쁜 여인이면 또 어떻겠는가?)
1940년도에 처음 나온 글쓰기 지침서 이태준의 ⌜문장강화⌟ 는 모두 제9강으로 되어 있다. 다섯 번째 ‘퇴고의 이론과 실제’에서 “심중엣 것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퇴고는 ”우연이 아닌, 계획과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산문 ⌜무서록⌟에서도 퇴고에 대해 힘주어 말한 적이 잇다. ”아마 조선문단 전체로도 이대로 3년이면 3년을 나는 것보다는 지금의 작품만 가지고라도 3년 동안 퇴고를 해놓는다면 그냥 지난 3년보다 훨씬 수준 높은 문단이 될 것이다.“
퇴고의 중요성을 백 번 천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습작이란 퇴고의 기술을 익히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퇴고가 외면을 화려하게 만들기 위한 덧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위장술이 되어서도 안 된다. 퇴고를 글쓰기의 마지막 마무리 단계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퇴고는 틀린 문장을 바로잡거나 밋밋한 문장을 수려하게 다듬고 고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퇴고는 글쓰기의 처음이면서 중간이면서 마지막이면서 그 모든 것이다.
소월도 3년 동안 고쳤다.
김소월의 ⌜진달레꽃⌟은 1922년 7월 ⌜개벽⌟에 처음 발표되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말업시
고히고히 보내들이우리다.
영변엔 약산
그 진달레꽃을
한아름다다 가실 길에 부리우리다.
가시는 길 발거름마다
뿌려노흔 그 꽃을
고히나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흘니우리다.
시행을 바꿔 전체적으로 리듬을 유려하게 살렸고, ‘고이고이’는 ‘고이’로 줄였으며(‘한아름’은 ‘아름‘으로), ’그‘라는 불필요한 관형사를 지웠다. 특히 3연은 대폭 손질한 흔적이 뚜렷하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앞서 등장한 ‘길’과 ‘뿌리다’ ‘고히’라는 말이 3연에 다시 반복되어 있는 것을 보고 언어의 장인인 소월은 못 견뎠을 것이다. ‘마다’라는 조사는 얼마나 가시처럼 그의 눈에 거슬렸을까? 이러한 퇴고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걸음걸음’이라는 생동감 넘치는 한국적 언어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신도 시를 고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라. 밥 먹듯이 고치고, 그렇게 고치는 일을 즐겨라. 다만 서둘지는 마라. 설익은 시를 무작정 고치려고 대들지 말고 가능하면 시가 뜸이 들 때까지 기다려라. 석 달이고 삼년이고 기다려라.
절망하여 글을 쓴 뒤에 희망을 가지고 고친다고 한 이는 소설가 한승원이다. 니체는 ‘피로써 쓴 글’을 좋아한다고 했고,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다”고 말했다. 바로 고심참담과 전전긍긍의 문법이다. 시를 고치는 일은 옷감에 바느질을 하는 일이다. 끊임없이 고치되, 그 바느질 자국이 도드라지지 않게 하라. 꿰맨 자국이 보이지 않는 천의무봉의 시는 퇴고에서 나온다는 것을 명심하라.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의 시작법’에서 극히 일부 요약발췌, 한겨레출판>
*안도현 시인 :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현재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집으로 <서울로 가는 전봉준>,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쓸쓸한>,<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윤동주상 등 수상.
1월에 핀 매화
순간 따스함에 화들짝
눈뜨고 웃음을 내 보인다.
이내 찬 기운 불어 닥쳐
화사한 옷 다 헤질 텐데
이불을 덮어 주어
더 잠들게 하고 싶지만
한 번 깬 선잠 계속
뒤척이기에 마음만 애써본다. <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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