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담론

사랑과 전쟁, 또 휩싸이고 싶다!

[중산] 2021. 4. 2. 14:11

얼마 전 큰아들이 손주를 데리고 우리 집에 왔다. 큰 아들 집에는 여덟 살 큰 손자와 두 살 터울 손녀가 있다. 제법 어른들 말투나 행동들을 흉내 내기도 하고 재롱을 부리는 나이기에 할비할미의 혼을 쏙 빼놓기도 한다. 농원에 가있다가도 손주가 온다면 다 팽개치고 부리나케 달려오는 나인지라 이날도 예외 없이 손주들 옆에 껌딱지가 되어 찰싹 붙어 놀고 있었다.

 

마침 저녁때가 되어 같이 식사를 하면서 나는 내 밥보다 손주 밥을 먼저 거들었다. 생선뼈를 발라주고 반찬을 이것저것 숟가락에 얹어주곤 하였다. “그렇게 주지 말아요. 김치가 너무 커요, 매워요, 양이 너무 많아요” 등등 하면서 집사람이 자꾸 옆에 와서 제지를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러다 말겠지 했지만 대여섯 번 정도 계속 이어졌다. 먹이는 방법이 서툴고 자상하지 못해서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여느 때도 좀 그랬지만 이날따라 집사람이 심하다 할 정도라고 느꼈다.

 

애들은 싫으면 뱉어내든가 안 먹는다는 자기표현을 하는데 집사람이 먼저 나서서 지적하는 것이 영 서운하게 들렸다. 그냥 서로 하는 방식대로 놔두면 될 일이지 일일이 입을 대는 것에 대해 내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는 순간 할비로서의 존재감에 상처를 주는 행위라고 여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몇 번 이어지다 보니 집사람의 행위에 공개적으로 제동을 걸어야겠다는 심보가 순간 작동했다.

 

집사람을 갈구는 나의 재잘거림에 참고 있던 큰아들이 "꽥~"하는 괴성과 함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멍했다. 귀여운 복슬강아지 밥 먹는 자리가 말 그대로 개판이 되어버린 것이다. 평화로운 밥상이 이내 짜증스런 밥상머리가 되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던 아들은 이내 사과를 했지만 평온해야 할 밥상에 폭탄이 날아들었으니 기분이 묘할 수밖에 없었다.

 

행위를 멈추든지 자리를 떠났으면 되었을 텐데 어른스럽지 못하게 투덜댔던 것이 화근이 된 셈이다. 예고된 수순이었다. 세심하지 못하게 손주 밥그릇을 보살피는 자체가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물론 집사람이 입을 대지 않고 같이 즐겼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는 나름의 서운함도 한 구석에 남아 있다.

 

이 일이 있은 후 큰 손자는 자기 아빠 고함지르는 행위 등을 그대로 재현하면서 우리를 웃게 하면서도 한편으론 겸연쩍게 만들었다. 돌이켜 보니 손주를 놓고 사랑과 전쟁을 벌인 것이다. 우리 부부는 다른데 불만은 그런대로 잘 삭히는 편인데 손주들만 오면 서로가 흥분되는 것 같다. 지나친 사랑 전쟁이랄까. 사랑의 질투처럼 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이런 데는 내가 머리를 더 들이대는 것 같다. 그 옛날 할아버지들처럼 먼발치서 그저 보고 즐기면 될 일이지 손주 밥상머리에까지 와서 설쳐대니 이런 사단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사단을 벌이고 나니 아들하고도 한 동안 서먹하게 되었다.

 

이반 세르게예비치의 ‘아버지와 아들‘에서 아버지와 아들관계를 이렇게 말했다. 자식들은 젊음을 무기로 사고의 유연성을 가진데다 부모는 낡은 언어를 쓰고 구식일지도 모르는 고집스런 면이 있어 이를 세대차라는 표현을 했다. 현재의 부모인 니콜라이도 어릴 때는 자기 부모를 이해할 수 없다고 반항했던 세대이다. 지금의 아들 역시 나중에 똑 같은 상황을 맞을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인생의 비경험자와 경험자간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굴러가는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다.

 

어느덧 우리부부가 함께한 생활이 40여년이 되었고 칠순이 가까워지다 보니 지나 온 시절이 주마등처럼 어렴풋이 보인다. 승패를 따지는 경기로 치면, 인생 전반기는 나의 존재를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보면 그저 어렵사리 끌고 온 무승부 경기를 치른 것 같다.

 

베이비붐 첫 세대, 가난한 농부출신, IMF를 혹독히 겪은 세대 등으로 시대상황을 핑계댈수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패배한 경기다. 열악한 외부환경의 영향과 가부장적 갑옷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그대로 답습해 온 삶이였기에 회환도 많이 남는다. 이 질곡 속에서도 집사람이 무던히 잘 참아가면서 가정을 잘 지켜주었고 자식들 또한 어려운 환경을 잘 견뎌주어 오늘날의 우리를 있게 하였다.

 

인생 후반기의 두 번째 판에는 일찍이 집사람이 초인이 되어 나타났다. 그 옛날 잘 참아내던 가부장적 시절의 아내 모습은 온데 간 데 없고 할 말을 딱 딱 하는 당찬 여인으로 환생한 것이다. 갱년기를 지나면서 고통스런 신체적 변화와 더불어 정신적으로도 빅뱅을 한 것 같다. 번데기가 나비로 변한 것이다. 꿈틀대지 않고 훨훨 날라 다닌다. 반대로 중원을 달리던 숫 사자인 나는 집토끼로 변해 버렸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환경적 영향도 있지만 신체적 호르몬의 변화가 더 크다고 말한다.

 

사르트르의 '구토'에서 주인공과 연인이었던 안니와의 대화처럼, 완벽한 사랑을 꿈꾸던 안니와의 사랑이 식어버리자 뜻이 맞지 않고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헤어졌다. 헤어졌어도 주인공은 안니와의 재회의 미련을 내심 기대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인생의 종착역에서 다시 만났을 때 자기는 변했는데 상대는 변하지 않았다며 원망과 과거의 잘못을 상대의 책임으로 돌렸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과연 변했는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자신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하물며 나 자신을 모르는데 상대인 부부를 이해한다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다.

 

“그래요. 난 당신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기뻐요. 만약 누군가가 당신이라는 이정표의 위치를 바꿔놓거나, 새로 칠하거나, 다른 길가에 박아놓거나 했다면, 난 내 방향을 결정하는데 갈피를 잡을 수 없었을 거예요. 당신은 나한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에요. 난 변해요. 당신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난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 당신과의 관계로 측정할 수 있어요.“ “지적인 변화로군요! 난 눈의 흰자위까지 변해버렸는데.” 경멸을 담아 서로를 자극하고 상대를 탓하며 원인을 뒤집어씌우는 대화를 한다.

 

안니는 이제 자유로운 여행을 다니고 있으며 새로운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것을 지금의 주인공에게 허세를 부리며 자랑을 한다. 사실 서로가 변했으면 이별이라는 큰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한 때 열렬히 사랑했던 연인이었지만 헤어진 이유를 상대에게 쏟아 붓고 있으니 서로의 존재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은 그 무엇도 희극이 될 수 없다고 하였던가. 우리는 자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당혹스러운 존재들인 것만은 틀림없다.

 

일찍이 사르트르는 존재는 사물이라는 조형을 만들기 위한 찰흙원형 자체였다고 하였다. 갈매기란 ‘존재하는 갈매기’라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보통 존재는 숨어 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다고 했다. 존재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막연한 불안을 품으면서, 다른 존재에 대해 자신을 잉여로 느끼고 있다고 했다.

 

이제 할비가 된 ‘나’ - 무기력하고, 초췌하고, 같은 말을 되씹고 있는 - ‘나 또한 잉여 존재가 되었는가 보다’. 죽음조차 잉여일 텐데 그래서 이제 나는 영원히 잉여의 존재로 남겠지만 일시적으로나마 가족 속에서 잉여의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나를 삭제시켜버리는 노력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카뮈는 <이방인>과 <전락>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란 어느 정도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잘못을 저지르고 난 뒤 인간의 반응과 태도를 보여준다. 자신의 잘못을 먼저 참회하고 난 후에야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단죄할 수 있다." 문학에서나 있을 법한 카뮈의 이야기처럼 세상을 그렇게 너그럽게 바라 볼 수만 있다면 부부간의 다툼과 헤어짐은 없을 것이다. 부부가 한 울타리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대화나 배려 등 서로의 노력도 많이 필요하겠지만 고집스런 에고의 틀을 깨는 정신적 자아성장을 본인 스스로 계속 하여야 할 것이다.

 

차라리 뜻이 안 맞으니까 상대를 탓하며 헤어질 구실을 찾게 된 이 주인공들은 미성숙의 헤어짐이다. 이별 후 다시 만나고 나서야 당시의 오해와 말하지 못한 사연들을 털어 놓는다. 마치 요즘 TV프로인 '우리 이혼했어요'처럼 좋은 추억보다 헤어진 원인을 반추해 보는 것이다. "안니, 난 여태껏 완벽한 순간이 어떤 것인지, 당신도 나에게 한 번도 설명해 주지 않았잖아." "네, 알아요. 당신은 조금도 알려고 노력을 안 하죠. 내 옆에 말뚝처럼 서있기만 하지."

 

"아! 그게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아?" "모두 자업자득이죠. 당신 책임이 커요. 미동도 하지 않는 당신의 태도가 나를 괴롭혔어요. 당신은 '나 말이야? 나야 정상이지'하는 태도였어요. 오로지 정신적으로도 건강이 넘치고 있었죠. 당신은 친절한 듯이 말했지만 건성으로 물었어요" 이 외에도 안니의 어릴 때 아픔도 이야기를 했다. 12살 때 어머니에게 매를 맞고 4층에서 뛰어내려 어머니에 대한 증오로 가득찼던 일, 처음 주인공을 만나서는 너무 사랑했는데  헤어질 때는 가장 증오했다는 이야기들을 다 쏟아 냈다.

 

진즉 살 때는 이 모든 소중함을 다루지 않고 뒤늦게 아쉬움과 원망을 토로한다. 가부장적 시대에 살았던 우리세대는 누구나 한번쯤 이별을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이들 연인들처럼 이유를 대며 헤어진다면 수없이 갈라섰을 것이다. 당시에는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남자들은 대개 권위를 무기로  일방적으로 그저 뭉개고 말따먹는 화술의 기교만 부리는 논쟁을 한 편이었다.

 

우리세대에서 특히 여성들에게는 가정을 깬다는 것은 인간적 도리가 아니라며 숙명적으로 여기며 무던히도 참고 살았다. 세월의 연륜만큼 살갗이 해지고 상처가 아물기를 반복했다. 이 시대적 통과의례마저 참지 못했다면 셰익스피어의 희극비극같은 여러 장르를 결국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인생의 단맛쓴맛은 고사하고 그저 간만 보고 막을 내렸을 것이다. 이미 옛날의 예쁜 데는 오간데 없고 볼 품 없는 여자로 나타난 안니와의 재회 또한 그저 지난 한 때의 마음을 소회해보고 확인해보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사실 상대를 바꾸고 싶으면 자기부터 변해야 하는 게 정설이다. 상대는 객체다. 우리나이에는 이런 문제들이 많이 부각되는 것 같다. 코로나로 정신적,경제적 여건이 안 좋은데도 황혼이혼은 꾸준히 늘고 있다는 것이 이를 반증시켜주어 실로 안타까울 뿐이다.

 

흔히 우리는 가정이라는 소사회 속에 살고 있다. 여기에는 부부의 노력과 역할이 중요하다. 살아갈수록 가족의 울타리는 자식, 며느리와 손주들의 새로운 버팀목들이 튼튼히 박혀있어 큰 힘이 되는 것이다. 서로 정체성이 다른 사람이 만나 교집합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는 많은 숙성시간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된장을 숙성시키듯이 인생을 배우고 뜸들일 시간 말이다.

 

벌써 손주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방과 후에는 학원을 다닌다. 이제 손주들도 자유로운 시간이 많지 않다. 나 역시 몸이 쇠잔해가는 걸 느낀다. 지난날 아버지께서도 몸이 불편할 때 반가운 손주가 가까이와도 안아주지 못하고 내치시는 것을 목격했다. 몸이 우선 불편하니까 예쁜 손주도 가까이 하시지 못하는 것이다.

 

지나고 보면 반가워하는 마음도 순간이다. 더 경쟁적으로 비집고 들어가 얼굴을 내밀면 어떠하랴. 잘 하다가 질책 받는다고 서운해 하지 말고 몸을 날려서라도 이 순간을 즐겨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집사람과의 다툼도 손주를 통해서 찾아온 기쁨의 순간이 무너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른바 사랑의 쟁탈전인 셈이다. 그밖의 다른 이유는 없다. 

 

인생 후반기에는 이런저런 언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 이제는 나의 과거도 죽었고 현재의 자유만 있을 뿐이다.  그저 삶을 꾸려나가는 것만도 다행이지 않는가. 큰 질병이 엄습해 오지 않고 편안히 지내는 것만이, 천천히 고요하게 존재하는 것만이 바랄뿐이다. 말없는 바위처럼, 저 나무처럼....!

 

조용한 산골 농원은 때로는 고독하다. 고독하지만 자유롭다. 그러나 나이 들어 찾아 온 자유에 손주들 영상마저 아른거리지 않는다면 어딘지 모르게 스산할 수도 있다. 오늘도 산골 농원에서 홀로 긴 밤을 보내고 있다. 이런 손주와의 사랑전쟁을 회상 해볼 수 있는 가족영상이 있어 즐겁다. 또한 나의 존재를 느긋하게 음미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만으로도 호사라면 호사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2021.4.1 중산>

 

*p.s : 이 글을 적고 난 후 사흘 째 되는 날, 집사람이 식탁위에 놓여 진 냄비 나무받침대를 들고 와 여기에 새겨진 글의 의미를 읽어 보란다 'Having somewhere to go is Home, having someone to love is Family, Having both is a Blessing!'(갈 곳이 있는 집이 있고, 사랑할 사람이 있는 가족이 있고, 둘 다 있는 것은 축복이다!). 구입하고 나서 일 년 이상 눈여겨 보지 않았던 명언을 이제 서야 제대로 의미를 새기며 읽어 보게 되었다~!!

 

** 지루한 글, 끝까지 읽으셨다면 대단한 인내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시간 되십시요~^^

 

복사꽃
'사랑과 전쟁'의 주인공, 손자와 손녀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