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보면, 가족은 혈족뿐만 아니라 생존과 잡일, 종족의 가치 전파 등을 맡은 모든 사람을 두고 포함하는 제도로 발달했다. 만약 생물학자들의 이론이 맞다 면, 남자들은 종(種)의 존속을 위해 정자를 퍼뜨리도록 유전적으로 입력되어 있고 여자들은 자신과 소중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파트너십을 추구하도록 유전적으로 입력되어 있다. 이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아마 에로스가 아주 쉽게 넘어가는 유혹을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는 결혼 제도가 가장 적합했을 것이다.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가족은 변화와 적의 침략, 자연의 파괴 식량과 보금자리를 찾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뤄지는 세계에서 하나의 견실한 단위가 되었다. 가족이라는 안정적인 단위는 종족의 신화와 사회적 역할을 지키는 수단이 되고, 종족의 가치와 초월적인 가치를 서로 연결시키는 고리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가족은 깨어졌든 온전하든, 혹은 한곳에 모여 있든 멀리 흩어져 있든 언제나 그 이상이었으며 지금도 그 이상이다. 심리적으로 가족을 떠나는 것은 인생 후반에 해야 할, 보다 결정적이고 또 가끔은 불가능하기도 한 과업이다.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또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족을 마치 우리의 정신 속에선 항상 옆에 있는 듯 느끼면서 괴로워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융은 이렇게 관찰했다.
“주어진 어떤 원형과 일치하는 상황이 벌어질 때, 그 원형이 활성화되고 어떤 강박 관념이 일어난다. 이 강박 관념은 본능적인 충동처럼 이성과 의지에도 불구하고 제 갈 길을 열고 나간다.” 이 때문에 우리의 한쪽에는 아버지가 영원히 걷고 있고, 다른 한쪽에는 어머니의 그림자가 가벼운 걸음으로 걷고 있다.
한편 모든 중요한 제도들, 말하자면 교회와 정부와 가족 등이 지닌 규범의 힘과 권위, 안정성이 지난 2세기 동안 점진적으로 약해졌으며, 그 결과 오늘날 대체로 보면 그 제도들은 향수와 냉소, 습관 등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첫 번째 요소인 향수는 ‘크리스마스엔 집에 갈게요’(I.ll Be Home for Christmas)라는 노래로 확인된다.
나의 고객들을 보면 대부분이 휴가와 관련해 불행한 기억을 갖고 있다. 아니면 가족이 무엇인가를 바로잡아 줄 것이라는 부적절한 희망을 품었다가 실망했다든가, 휴가 기간에 집을 찾았다가 자신을 괴롭히는 가족의 역학을 다시 겪든가, 혹은 죽었거나 헤어진 가족을 잊지 못해 힘들어 하고 있다. 이는 TV에서 보는, 상업화된 버전의 가족을 바탕으로 기대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그림은 아니다.
나는 모든 결혼 생활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기꺼이 던졌다. “이 사람들은 이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서로 성장하고 있는가, 아니면 서로를 유치한 존재로 만들고 있는가? 혹은 이 관계를 디딤돌로 삼아 보다 큰 자기를 구현하고 있는가? 결혼 생활에서 죽은 영혼은 얼마나 많으며, 결혼 생활에서 번창한 영혼은 또 얼마나 많은가?
최초의 불화에 서로 빗장을 걸어 잠글 것이 아니라 불화에 함께 해결해 나가기로 약속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결혼은 영혼의 고귀한 투자이다. 그러나 하나의 안전지대로, 경제적 합의로, 혹은 부모를 즐겁게 해주고 사회적 인정을 받는 한 방법으로 택하는 결혼은 영혼에 상처를 입힌다. 그러기에 우리는 가족이라는 제도가 구체적인 상황에서 영혼을 풍성하게 가꾸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가족에 대해서도 똑 같이 어려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각 구성원이 서로 다른 존재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응원과 믿음을 충분히 주고받고 있는가? 가족이 되는 데 따르는 대가가 일치하는가? 말하자면, 각 구성원의 개인적 성정이 가족의 틀 안에서 방해를 받고 있는가?” 누군가가 가족에 대해 감상적으로 미화하는 소리를 들을 때, 나는 거기서 그 사람 본인이 경험한 가족보다는 가족의 본연의 모습에 대한 향수를 종종 탐지한다. 가족 안에서 사랑과 뒤를 받쳐주는 관계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갈망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의 경우에는 존재의 바탕에 그런 사랑과 지지의 관계가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이 떠오른다. '행복한 가족은 모두 비슷하게 행복한 반면, 불행한 가족은 저마다 다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는 내용의 문장 말이다. 가족 안의 부모는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고 또 다른 가족에서 온 사람이며, 이 다른 가족은 다른 누군가의 자식, 그러니까 이미 오래 전에 역사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진 사람의 지배를 받아왔다.
부모들 중에서 자식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신들이 그런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역사는 이상한 방식으로 되풀이 되고 있다. 지금 누가 아이를 낳고 있는가? 자기 부모로부터 멀어지려고 노력하는 젊은이들, 가족의 역학 때문에 힘들어하는 젊은이들, 가족생활과 직장 생활이 요구하는 임무에 압도당한 상태에서 사는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고 있다.
조부모들은 젊은이들을 따라 잡을 에너지는 없어도 제시할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들이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자신의 모습을 더욱 분명하게 되었고 성숙을 이루며 손자들에게 예가 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자신의 인생 여행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탓에 여전히 나르시시스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언제나처럼 요구사항을 늘어놓다가 손자의 집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조부모도 있다.
“대체로 보면 아이에게 정신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모들의 살지 않은 삶이다.“ 융이 너무도 정확한 표현으로 모든 부모들의 급소를 찔렀다. 부모가 성장하기를 멈추고 두려움에 떨며 인생 여행의 모험을 감수하지 않는 그 지점에서 부모의 모델과 억제, 그리고 영혼을 거부하는 태도가 아이에 의해 내면화된다는 뜻이다.
그 결과 아이는 나중에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어 그 패턴을 자신의 가족에게 그대로 넘겨주게 된다. 이 아이는 자기 부모의 패턴을 되풀이하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부모의 살지 않은 삶에 의해 제한을 받는 가운데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거나 영혼의 깊은 상처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알코올이나 일에 중독되는 현상을 보일 것이다. 이러한 영향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패턴을 되풀이하거나 그것을 보상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사춘기 청년의 육체는 변화하고 있다. 성년을 코앞에 둔 아이들은 수시로 변화하는 호르몬과 정서적 영향에 크게 흔들리고 있다. 책임감을 느끼는 한편으로 아이로서 누렸던 안전을 갈망하는 모순적인 정서를 보인다. 그들 본인이 상충된 감정으로 내적으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십대 자식을 둔 부모에 대한 나의 조언은 언제나 똑같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결국 성장해서 당신 곁을 떠나게 될 것이다.
자식들이 집을 떠나 독립할 때, 눈물을 보이는 것도 꽤 적절하고 또 당신의 삶의 일부가 당신에게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안도의 한 숨을 내쉬는 것도 꽤 적절하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그들이 집을 나가지 않으면 나 자신이 부모로서 그들을 망쳐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영국 정신과 의사 위니콧이 말한 ‘충분히 훌륭한 부모’라는 표현에 공감하는 바가 크다.
그래도 소위 말하는 “빈둥지 신드롬”에 시달리며 우울증을 겪는 부모는 자기 자신의 발달과 자식의 발달을 혼동한 데 따른 대가를 치르고 있다. 부모의 살지 않은 삶과 나르시시스트적인 욕구, 버림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아이에게 어떤 식으로 전이되는 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이가 독립해 집을 떠날 때, 부모는 자신의 삶에서 건드리지 않은 부분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부모의 가치를 모방하라거나. 아니면 좋은 학교에 들어가거나 괜찮은 사람과 결혼하거나 좋은 일자리를 선택하라는 식으로 어떤 목표를 성취하라면서 아이에게 부담을 주는 예들이 눈에 너무나 자주 띈다. 그런 상황에서 부모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아이는 실패했다는 느낌이나 죄의식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반면에 부모의 명시적이거나 암시적인 선택에 순응하는 아이는 타인의 삶을 사는 처지에 놓일 것이다.
그럼에도 자식을 자유롭게 놓아주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자식이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도록 허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부모들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이런 자유를 자기 부모로부터 끌어내려고 노력했으면서도 정작 자기 자식에게는 주지 않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가?
앞서 보았듯이, 중년에 이른 부모의 타고난 자기와 획득한 잠정적 자기 사이의 간극이 점점 더 넓어진다. 그러다 보면 부모의 심리와 결혼 생활, 가족의 안정이 위태로울 지경에 이를 수 있다. 이는 모든 가족에게 고통스런 시간이다. “집이 나를 버리도록 내버려둘게 아니라 내가 집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느 청년은 자기 부모가 이혼할 때 느낀 감정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마찬가지로, 인생 후반을 맞는 부모는 자기 부모들이 늙어가고, 힘을 잃고, 마침내 죽는 것을 경험한다. 내가 만난 많은 환자들은 부모의 죽음에서 해방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비록 죄의식을 느끼긴 했지만, 그들이 더 이상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부모의 죽음 앞에서 불안 발작을 경험했다. 이는 부모가 눈에 보이지 않는 보호의 울타리가 완전히 제거되었고, 그로 인해 세상의 충격을 완화시켜줄 완충지대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십대 자녀를 키우면서 동시에 부모를 돌보고 있는 사람들을 흔히 “샌드위치 세대”라 부르는데, 이들은 자신의 발달을 꾀하려고 아무리 의식적으로 노력해도 그 욕구를 채우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입장에 있는 사람이 분노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식이나 부모를 돌보는 일을 더욱 의식적으로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는 곧 자신을 위한 시간을 따로 떼어놓은 가운데 자식이나 부모를 부양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분노는 좀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무의식 속에서 곪게 된다.
자신을 오랫동안 무시할 경우에 그 결과는 어딘가에서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아마 육체적 병이나 우울증으로 나타나거나 아니면 억압된 분노가 새어나오는 현상인 변덕으로 나타날 것이다. 어려운 과제는 자신의 개인적 자유나 성장에 대한 욕구와 타자의 요구 사이에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만약에 늙어가고 있는 부모가 젊은 시절에 자신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지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그들은 성인이 된 자식에게 특별히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로 성장한 사람에게 어떻게 갑자기 성숙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예전보다 둥글어지는 모습을 보이기보다 더욱 모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지금 푸념하는 사람은 갈수록 푸념을 더 많이 할 것이다. 지금 의존적인 사람은 갈수록 더 어린애처럼 굴 것이다. 지금 부인하는 사람은 갈수록 남 탓을 더 많이 할 것이다. 성장을 무시하면서 자신의 정신적 행복에 대해 책임지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기력이 떨어질 때 남이 그 책임을 대신 져줄 것이라고 기대할 것이다.
이중의 부담을 진 중년들은 삶의 다른 영역에서 아무리 유능할지라도 이처럼 많은 요구하는 부모와의 사이에 건전한 균형을 꾀하기가 특별히 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현대의 가족은 각자의 영혼이 추구하는 다양한 가치들이 지지를 받고 소중히 여겨지고 촉진되는 그런 가족이다.
다양성은 그냥 인내해주는 것이 아니다. 다양성은 근본적인 선물로 칭송되어야 한다. 갈등은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에 의해 해결될 수 있으며, 어느 누구도 자신이 추구하는 존재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하는 부담을 져서는 안 된다. 모든 가족이 이런 점을 의식한다면, 거기서 얼마나 큰 자유가 일어나겠는가!
현대 가족을 창조하는 일은 성숙과 용기, 개인적 모험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도 자신의 길은 어디까지나 자신만이 갈수 있다는 진리를 받아들여야 하듯이, 우리 모두는 똑 같이 자기 자신을 찾는 외로운 여행에 나선 각 구성원들을 응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가족은 마무리되지 않은 과거에 좌우되지 않는 영혼의 대리자가 될 수 있다.
영혼에 바탕을 둔 가족을 창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구성원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우리가 자신의 확장에 필요한 행동을 할 때, 그것은 곧 타인들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고 타인들의 발달을 지지할 도덕적 확장을 성취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 관계는 친밀한 결혼 관계든 효과적인 가족 관계든 이기적인 계획에 이로운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이로우며, 이 자기는 영혼을 이롭게 하게 되어 있다.~
<‘인생2막을 위한 심리학’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제임스 홀리스 지음, 정명진님 옮김, 부글출판>* 제임스 홀리스 : 미국 일리노이주 출생, 1962년 매체스터 대학, 1967년에 듀크 대학 졸업 여러 대학에서 인문학 교수를 지냈다. 1977~1982년까지 스위스 취리히의 융 연구소에서 정신분석을 공부했다. 현재 워싱턴에서 융학파 정신분석가로 치료 활동을 벌임과 동시에, 샌프란시스코 세이브룩 대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독서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똑똑한 사랑법! (42) | 2023.01.05 |
---|---|
그 많던 신들은 어디에 숨었나? (43) | 2022.12.24 |
인생의 베일! (44) | 2022.12.09 |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다! (44) | 2022.12.04 |
괴테와의 대화 (53) | 2022.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