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칼 융이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고대에 신의 형상을 낳았던 최초의 에너지는 어디로 가지 않았다. 그 에너지는 지하로 들어갔을 뿐이다.
그 에너지는 지금 무의식이 되었기 때문에 신으로 구현되던 옛날보다 기괴한 영향력을 훨씬 더 강하게 발휘하고 있다. 인간이 세상에 눈을 뜨면서, 신들이 구현했던 영적인 힘들은 인간의 정신 속으로 들어갔으며, 그 때문에 인간은 신들로부터 분리와 소외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다.
이 상실에 따른 고통은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개인적 혹은 사회적 병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문화적인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일상생활의 정신 병리학”이다.
위대한 종교적 전통들은 예외 없이 신들을 무시하는 것을 최악의 죄로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신들이 구현한 에너지를 무시하면 그 에너지의 자율적인 동력이 풀리면서 인간에게 위험하게 작용하게 된다는 말은 일리가 있다.
융이 암시하듯이, 무시되고 투사되고 육체의 병으로 바뀐 그런 깊은 에너지들은 신경증이 되었다. 아니면 그 보다 더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공포증, 강박증, 그리고 통제 불가능한 열광이나 폭력으로 폭발하는 대중 감정 등은 이런 무시된 힘들이 지닌 해악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진보와 진료, 그리고 인류의 오랜 저주에 대한 해결책을 찾게 될 것이란 희망으로 시작한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세기가 되었다. 개별 정치인들의 신경증이 대중의 무의식적 동력을 악용하면서 중세의 사탄보다도 더 악랄하게 대중을 현혹시켰다.
대중 매체, 말하자면 신문과 잡지, 영화, TV 등은 대중의 주의를 흩뜨려놓는 한편으로는 유혹까지 했다. 이들은 이전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전달하게 되지만, 대중적 공상과 집단 투사, 소망적 사고, 모호한 동기, 지성을 현혹시키는 모호한 의제 등을 복잡하게 뒤섞어 놓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같은 존재론적 공허감을, 말하자면 사라져버린 신(하이데거의 표현)들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신들 사이의 의미의 간극을 우리의 일상의 자질구레한 것들이 채우고 있다.
우리는 자신들이 신화를 가질 필요성을 극복했다고 믿으면서 조악하고 가끔 파괴적이기까지 한 인간 본성의 힘들 앞에 발가벗은 채로 위태롭게 서 있다. 자신과 자연을 지배하고 있다는 인간의 오만한 믿음은 단지 우리로 하여금 각자의 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을 더욱 의식하지 못하게 만들 뿐이다.
아득한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어떤 신이 화가 났는지 물은 다음에 그 신에게 공물을 바치고 옳은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개인 및 종족의 문제로부터 풀려 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누군가가 사랑의 여신(아프로디테)을 화나게 만들었다고 말하면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 옛날에는 이 여신의 일에 마음을 더 많이 쏟는 행위를 통해서 여신의 사랑을 간청하고 나설 필요가 있었다.
21세기 들어, 심리학적 탐구가 활기를 띠고 있다. 부분적인 이유는 교육적, 기술적, 과학적, 예술적, 인본주의적 성취뿐만 아니라 사회 제도와 종교들까지도 20세기의 대량학살과 광기를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감각의 공격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고, 중독으로 내몰리고 있고, 필요 이상으로 약에 의존하고 있고, 줄기차게 움직이도록 자극을 받고 있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어느 때보다 더 멀어지고 있는 이 세상을 심리학적으로 보지 않는다면 달리 어떤 방법으로 볼 수 있을까?
칼 융은 우리가 심리학적 지식을 갖춰야 하는 이유를 하나 더 제시했다. 종족의 신화와 제도의 권력이 약화됨에 따라, 한때 인간을 자연이나 연결시켰던 영적 이미지들이 손상되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영적인 기준점들이 사라졌다면, 현대의 감수성은 그런 집단적 이미지들이 일어나는 곳을 찾기 위해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 현대인들은 환영 같은 이런 모든 신들을 능가했다고 상상하면서 자신들이 이미 명석함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능가한 것은 단지 말(言)의 유령들이지 신의 탄생을 부른 정신적 사실들은 아니다.“
영원한 존재인 신이 죽을 수 있다는, 융은 어떤 형식에 붙여진 이름은 사라지지만 그 형식 뒤에 있는 에너지는 변형되어 다른 곳에서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설명한다. 결집력을 낳는 신화적 이미지들을 지키고 있는 문화들은 개인들을 신비의 네 가지 차원, 즉 초월적인 존재(신들)와 환경(자연 속에 있는 신들의 집), 종족(사회적 관계의 망), 그리고 각자의 심리적 바탕(개인적 정체성)과 연결시켜 준다. ~
<‘인생2막을 위한 심리학’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제임스 홀리스 지음, 정명진님 옮김, 부글출판>* 제임스 홀리스 : 미국 일리노이주 출생, 1962년 매체스터 대학, 1967년에 듀크 대학 졸업 여러 대학에서 인문학 교수를 지냈다. 1977~1982년까지 스위스 취리히의 융 연구소에서 정신분석을 공부했다. 현재 워싱턴에서 융학파 정신분석가로 치료 활동을 벌임과 동시에, 샌프란시스코 세이브룩 대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 세계1, 2차 세계대전이 있었던 20세기의 인류는, 노예해방을 하며 인권을 되찾기 위해 피를 흘린 지난 세기 와는 달리 편리하고 풍족한 삶을 살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소련의 스탈린, 독일의 비스마르크,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일본의 천왕 등 세계 몇몇 독재자들이 중세의 사탄보다 더 악랄했다.
이들의 어리석고 불안전한 병적인 집착이 대중의 무의식적 동력을 선동, 악용하면서 전 세계의 무고한 인간의 생명을 도륙하였다.
오늘날 장기집권을 하면서 욕망의 괴물이 된 푸틴이 똑 같이 그런 행위를 재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1차 대전 때도 독일이, 오늘날에는 러시아가 영토 야욕의 대상으로 삼았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기독교에 기반을 둔 정교회란 큰 종교를 가지고 있다.
종교지도자 마저 신의 참 뜻을 거역하고 욕망의 독재자 푸틴을 옹호하고 나서고 있으니 인류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전쟁의 역사이다. 크고 작은 전쟁이 수없이 자주 일어난다. 이제 겨우 한 세기 지난 지금, 반성도 잠시 대중을 선동하고 군림하는 독재자란 괴물이 또 탄생되어 힘을 키워서 큰 전쟁을 벌이고 있다.
책에서도 말했듯이 믿음의 신이란 존재가 희미해진 대신 우리는 불안전한 병적인 존재가 되었다. 신앙이 없더라도 고차원적 정신적 성장을 하는 방법도 있다. 그것은 드물고 힘든 과정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종교적인 믿음으로 의지하고 참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고자 한다. 토속신앙이든 인간을 참되게 교화시키는 종교든 인간의 욕망과 죄악을 억누르는 순기능들을 많이 하고 있다.
오늘날 이 혹한의 추위에 거처할 곳과 먹을 것마저 다 파괴된 포악한 인간의 행위들을 목도하는 순간이다. 인간이 인간을 동물처럼 지배하는 세상이 끝나고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고 싶다.
사랑을 실천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온 누리에 울려 퍼져서 평화스런 날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염원해본다. 하늘엔 영광, 지상엔 평화! 거룩한 성탄절을 맞으십시오. 메리 크리스마스!! <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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