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이었더라.
단순한 기억을 되살리려고 당신은 미간을 찌푸린다. 여기서 몇 번 버스를 타야 집으로 가더라.
막상 버스가 나타나면 그 낯익은 번호를 곧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당신은 믿고 있다. 그러나 제각기 다른 번호의 버스들이 여남은 대 정차했다 떠나는 것을 당신은 다만 지켜본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모든 번호는 낯설다. 모든 숫자들이 힘을 합해 당신을 밀어내고 있다.
그제야 당신은 깨닫는다. 지금 부모님의 집으로 가는 게 옳으리라는 마음의 부담 때문에, 당신의 원룸으로 데려다줄 버스 번호를 기억할 수 없는 거라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다. 이 주말에 당신은 부모님을 위로하러 가야 한다. 당신이 그들을 애써 위로하지 않는다 해도, 남은 자식이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은 위로받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한다.
혼자 있고 싶어한다.
<‘한강’- ‘회복하는 인간’에서 일부 발췌, 문학동네출판> * 한강 : 1970년 생. 서울신문 신춘문예<붉은 닻>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 시작했다. 장편소설<채식주의자>,<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희랍어 시간> 등, 시집<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등이 있다. 만해문학상, 이상문학상, 동리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인터내셔널부커상 등을 수상했다.
소확행
말에도 생명력이 있어 낯선 말이 어느새 익숙한 말로 자리를 잡는 경우가 있다. ‘소확행’이란 말이 그렇다. 소확행(小確幸)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하는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랑겔한스섬의 오후>에 처음 등장한 말이라고 한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만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을 소확행이라고 했다.
문방구에 들러 잉크와 공책을 샀다. 만년필에 넣을 파란색 잉크와 설교문을 적기에 적절한 노트를 사 가지고 나올 때 문득 행복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그랬다. ‘이런 게 소확행이구나!’
<‘하루 한 생각’에서 일부 발췌, 한희철 지음, 꽃자리출판>* 한희철 : 감리신학대학교 졸업, 강원도 작은 마을 단강에서 15년간 목회했다. 1988년 <크리스찬 신문>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 <작은 교회 이야기>, <네가 치는 거미줄은>등이 있다.
전체주의 심리학
전체주의의 심리적 기반은 일종의 최면 현상이다. 그러나 대중 형성과 고전적 최면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고전적 최면에서는 최면에 걸린 사람의 의식 영역만 좁아질 뿐, 최면에 빠뜨리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최면술사)은 ‘깨어’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대중 형성에서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도 그 이야기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대개 지도자는 대중을 통제하는 내러티브의 이데올로기적 기반(내러티브 자체가 아니라)을 열광적으로 믿기 때문이다.
대중 형성은 지도자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 태도를 낳는다. 개인은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신뢰할(그리고 대중 속으로 사라진다)수도 있고, 반대로 완전히 불신해 그가 고의로 악한 계획을 실행하는 사람(예, 음모자)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 이 극단적인 두 관점의 기반에는 비슷한 오해가 깔려 있다. 두 부류 모두 잘못된 태도로 지도자에게 사실상 절대적 지식(그리고 권력)을 부여한다. 첫 번째 부류는 긍정적인 차원에서, 두 번째 부류는 부정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한다.
이 밖에 지도자들이 대개 돈(예, ‘돈을 쫓는다’, ‘이해득실을 따진다') 혹은 가학적 쾌락(예, 사이코패스적이거나 변태적인 성격의 소유자다)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는 오해도 있다. 하지만 이런 진술은 역사적으로 분명히 입증되지 않는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나치의 수장은 불법적인 이익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고, 변태와 사이코패스 성향을 지닌 사람은 체계적으로 징발에서 제외했다. 사회적 규율을 침해하는 데서 본질적 쾌락을 찾는 ‘고전적인’범죄와 대조적으로, 전체주의 범죄는 전체주의적 사회 규율 체제를 무비판적이고 분별없이 고수하는 데 있다.
심지어 그 체계가 극도로 비인간적인 성향을 띠고 윤리적 경계를 빠짐없이 넘어서는데도 말이다. 이런 점에서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정확히 보여준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전체주의는 괴물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병적이고 비인간적인 사고방식 또는 ‘논리’를 고수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논리는 전체주의가 형성되는 초기 단계에서 사람들을 장악한다.
대중(또는 인구의 상당 부분)은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신념에 젖어 더는 이를 현실과 구분하지 못한다. 20세기 초 러시아와 독일에 나타난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가 좋은 예다.
다른 인종 중에서도 폴란드인과 유대인에 대한 낙인과 탄압은 ‘사실’을 근거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와 유사한 현상이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동안에도 나타났다.
특정 무리의 사람들은 예방접종 거부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사실 정보를 근거로 정당화된다고 점점 확신한다. 그들이 바이러스를 퍼뜨린다는 것을 수치가 보여주지 않느냐면서 말이다.
이러한 역동들은 그러한 논리를 점점 제도화하고 사회에 강요하는 전체주의 당과 전체주의 지도자의 출현을 서서히 야기한다. 그리고 대개 열광적이고, 맹목적이며, 무지비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히틀러는 자신의 힘이 그의 ‘얼음같이 차가운 추리력’에서 나온다고 믿었고, 스탈린은 그의 성공의 비밀이 '자신의 변증법의 무자비함‘에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정당화에 따라 ’삶에 부적합‘하고 ‘죽어가는 계급’에 속하는 인종들은 메스로 도려내듯 가차 없이 사회에서 배제되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대중의 지도자가 지니는 특성은 탐욕이나 가학성이 아니라 그가 믿는 이데올로기적 허구에 맞추어 현실을 조정해야 한다고 보는 병적인 이데올로기적 욕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욕구는 정신적, 정서적 맹목성을 낳는데 그 정도가 놀라울 정도로 심할 때가 있다. 예루살램 재판에 출석한 나치 지도자의 믿기 어려운 증언 방식이 잘 보여준다. 나치는 실제로 자신들의 의도가 선하다고 확신하곤 했다.
대중형성에 사로잡힌 사람은 어떤 면에서 자신이 행하는 일을 알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용서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대중 형성 혹은 최면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윤리적 선택을 내릴 능력이 있다.
대중에게 주어진 익명성 - 군중 속으로 사라진 개인은 자신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느낀다 - 은 기본적으로 변명에 불과하다. 당원들이 계속해서 친구, 동료, 그 외 주변 모든 사람을 체제의 터무니없는 잔혹성에 희생되도록 만들고, 결국 당원들 자신마저 전체주의의 괴물에 잡아먹히게 하는 당혹스러운 역동을 초래했다.
전체주의 지도자는 놀라울 만큼 원칙이 부족하고 법을 혐오한다는 점에서도 이상주의자와 엄연히 다르다. 전체주의 지도자는 주로 자신의 재량에 따라 조정되는 임시적 규칙을 기반으로 하는 법령에 따라 통치한다.
그가 진정으로 옹호하는 유일한 법은 법이 없다는 것뿐이다. 이는 오늘날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 상황에서도 존재하는 위험 요소다. 이 위기 동안 비상 규칙이 기존 법과 기본권을 대체했다.
이런 비상 상황에서는 항의할 권리도 없고, 정부가 의회로부터 정책 승인을 받을 필요도 없으며, 사유 재산을 존중할 필요도 없다. 최근 수십 년간 우리 사회에도 수많은 불안 대상이 등장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들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나타나 시민의 자유에 점점 더 많은 제약을 가한다.
전체주의 체계의 논리는 끊임없이 유동적이며 대개는 갈수록 터무니없어진다. 전체주의 체계의 존재 이유는 무엇보다도 불안의 대상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데 있다.
따라서 전체주의는 끊임없이 새로운 불안 대상을 찾아내야만 한다. 테러리즘, 기후 변화, 코로나바이러스가 그 예다. 처음에 코로나 봉쇄 조치는 ‘감염 곡선을 누그러뜨린다’는 점에서 정당화 되었다.
어차피 바이러스는 확산될 것이므로, 관건은 확산 추세를 늦추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감염률을 제로로 만드는 것, 그러니까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목표를 달성하는 쪽으로 초점이 옮겨졌다.
예를 들어 코로나 대응 조치로 인해 피해(거주 보호센터의 격리)를 본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조치에 찬성하는 주장에 이용된다. 이 희생자들은 부주의하게 사망자 수에 추가되면서 대응 조치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된다. 같은 맥락에서 유엔은 봉쇄가 초래하는 기근으로 수백만 명이 사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렇게 사회는 악순환에 빠진다. 조치가 엄격해질수록 피해자가 늘어나고, 피해자가 늘어날수록 조치가 더 엄격해지는 것이다. 이는 악의적이고 의도적인 기만(음모)이 아닌 대중 심리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전체주의 체계의 자기 파괴성은 반대의 목소리에 재갈을 물리고 반대파를 침묵시키는 순간 정점을 찍는다. 소비에트 연방은 1930년경에 이 지점에 도달했고(당시 스탈린은 거의 무한한 권한을 틀어쥐고 대숙청을 시작했다), 나치 독일은 1935년경 이 지점에 다다랐다.
여기서 우리는 전체주의와 독재 정권 사이의 뚜렷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거의 언제나 독재정원은 확고하게 권력을 획득하는 순간 공격성을 누그러뜨린다. 독재자는 자신의 상식을 사용하곤 한다. ‘권력을 유지하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내가 유익한 존재임을 확신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전체주의 지도자는 이데올로기 및 이에 수반되는 대중 형성에 눈이 멀어 있는 까닭에 상식을 발휘하지 못한다. 완전한 권력을 거머쥔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광기어린 논리를 집요하게 추구한다.
대중의 내러티브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공명을 깨뜨리는 반대의 목소리가 없을 때, 전체주의 체계는 급격한 자기 파괴에 빠진다. 최면이 완전해지는 것이다. 이때 전체주의 국가는 아렌트의 표현대로, “자신의 자식들을 집어삼키는 괴물”이 된다.
스탈린 지배 하에서 나타난 다양한 박해와 대량학살의 파도를 기술한 솔제니친의 글을 읽어보라. 이 시기에 스탈린 정권은 인구 중 새로운 그룹을 겨냥해 그들을 ‘객관적인 적’으로 규정했다.
맨 처음 그들은 부르조아를 강제 이송했고, 뒤이어 해외에서 돌아온 군 장교를(자본주의 논리에 도취된 자들), 그 다음으로 종교에 관련 있는 모든 사람(공산주의자로 개종하지 않은 자들), 그리고 금을 소지했을 법한 사람(치과의사, 보석 세공인), 다음으로 조금 잘 사는 소작인들을 가차 없이 강제 이송했다.
무작위로 고른 ‘범죄자’ 인구 집단이 파괴의 대상이 되었다. 전체주의 체계의 격렬하고 파괴적인 역동은 나치 독일에서도 일어났다. 집시와 유대인을 강제 수용소로 이송한 후, 폴란드 인뿐만 아니라 심장병과 폐병이 있는 독일인마저 표적으로 삼으러 했다.
볼셰비키의 선한 의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을 바꿨다. 토지와 가축에 대한 애착을 보니 부농들 역시 공산주의적 전체주의 국가를 사랑하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소작인 계급을 몰살시키는 법령을 정했다.
르봉은 “군중은 파괴하는 힘을 가졌을 뿐이다.”라는 유명한 글을 남겼다. 군중과 그들의 통치자는 파괴의 소용돌이 속으로 맹목적으로 빠져들어 결국 그들의 마음을 독점했던 논리-죽어 있고, 영혼이 없는 우주에 대한 기계적 논리-가 불러오는 궁극적인 결과를 맞닥뜨린다.
이러한 곤경의 진짜 주인은 전체주의 체제의 지도자들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와 그 기저에 깔린 이데올로기다. 모두를 사로잡는 이 이데올로기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모두가 자기 몫을 수행할 뿐, 각본 전체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체주의 심리학’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마티아스 데스멧 지음, 김미정님 옮김, 원더박스출판>
* 마티아스 데스밋 : 코로나 19 팬데믹에 적용되는 대중 형성 이론의 세계적인 전문가이다. 벨기에겐트대학교 심리학 및 교육학부에서 임상심리학교수로 재직 중이며, 정신 분석적 심리치료를 제공하는 상담가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심리학에서의 객관성 추구>, <주관성에 관한 라캉의 논리> 등이 있다. 2018년 정신분석 사례연구상을, 2019년 네덜란드 빔 트라이시버스 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