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의미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해요.
하지만 생은 우리 스스로 부여하는 만큼만 의미를 지니지요.
이런 이야기는 모두 하나로 통해요.
바로 삶은 사랑을 통해서만 의미를 얻는다는 것.
즉, 우리가 더 많이 사랑하고 스스로를 내어줄수록,
우리의 삶은 더 의미가 있어진다는 것입니다.
- 헤르만 헤세, 마리안네 베델에게 쓴 편지, 1956년 6월 1일
어른이 되기 위해 이별해야만 하는 것들!
‘또 지겨운 하루가 시작되는 구나.‘ 맥없는 아들을 보다 못한 아버지가 “남자 놈이 패기가 없다”고 야단이라도 치면 그는 “내가 이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방으로 들어가곤 한다.
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른이 되기까지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이때 아이들은 그 시간이 상실의 시간임을 알지 못한다. 많은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고 그 빈자리에 차가운 현실감이 스며들어 오는 시간임을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에는 과거와의 이별이란 슬픔이 내포되어 있다. 새로운 출발은 항상 과거에 친숙했던 것들과의 이별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무엇을 잃어버리는 것일까?
첫째,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보호해 주고 사랑해 주던 따뜻한 부모의 품과 이별해야만 한다. 언제까지나 나와 함께하면서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 줄 것만 같았던 부모와 헤어진다는 것은 슬프고도 불안한 일이다.
둘째, 어른이 되고 난 뒤 어느 순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놀라는 때가 있다. 어릴 적 꿈꿔 온 내 모습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당황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가 바로 또 하나의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이다.
어린 시절의 거대한 꿈과의 이별 또한 거울을 깨 버린다고 내 모습이 변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 체념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것은 어떤 잘못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으며,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나면 누군가 틀림없이 나타나 상황을 바꿔 줄 것이라는 어릴 적의 기대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는, 가진 권리만큼 의무도 커진 시절이 왔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계를 깨닫는 것, 더 이상 선택할 수 없게 된 것들을 인정하는 것, 꿈과 현실의 간극을 깨닫는 것 등은 인간으로서 필연적인 과정이다.
당신에게 세상이 지루하고 우울하게 비친 까닭
삶에서 권태로운 시간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쁘게 일하다가 잠시 빈둥거리며 지루해하는 것과,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빈둥거리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말을 빌리자면 전자는 건설적 권태이고, 후자는 파괴적 권태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파괴적 권태를 ‘이상적인 것의 질병’이라 부른다. 누구나 부모의 기대처럼 멋지게 성공해서 사람들의 박수갈채 속에서 살고 싶다는 높은 ‘자아이상(ego-ideal)'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라는 땅에서 한계를 인정하고 꿈을 현실에 맞춰 수정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즉 높은 자아이상을 떠나보내고 이를 애도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자아이상이란 ‘나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는 자신에 대한 요구를 의미한다. 그것은 성장과정에서 부모로부터 받은 칭찬이나 부모가 추구하는 가치를 내재화시키는 가운데 형성되는 것으로, 양심과 함께 초자아를 구성한다.
그런데 자아이상이 너무 높으면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초라한 자신과 현실에 실망하고 우울해지기 쉽다. 점차 나이 들수록 꿈과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자기 자신 사이의 괴리감이 더 커지면서 좌절할 수밖에 없다.
자아이상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받고 싶은 부모로부터 거절당할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이 물려온다. 그의 인생은 이제 의미가 없어버린다. 이러한 좌절감은 그의 분노를 자극하고, 한없이 초라하다고 느끼며 무력감에 빠져 항상 피곤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권태는 ‘고통스러운 고독’이자 ‘자신에 대한 환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주로 사용하는 방어 기제는 퇴행과 투사, 그리고 회피이다. 이 두려운 감정을 방어하기 위해 부모가 모든 것은 해주고 자신은 가만히 있으면 되었던 어린 시절로 퇴행해 버린다.
또한 외부 현실에서 아무런 자극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자신의 내부가 공허하기 때문이 아니라 외부의 자극이 형편없기 때문이고, 부모가 자신을 잘못 키웠기 때문이라며 그 탓을 외부로 투사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좌절만 안겨주는 현실을 애써 모른 척 회피하려고만 한다. 그런데 이런 미숙한 방어 기제를 쓰느라 에너지를 낭비하면서도 결국 망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애도를 미루지 말자
과거와 이별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와 이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이별이 아무리 슬프고 싫어도 말이다. 이 떠나보냄의 작업이 바로 ‘애도’이다.
이때 애도는 한 순간에 일어나지 않고 일련의 과정을 밟는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라며 고개를 젓고 그것이 내 곁에서 멀어졌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차츰 현실이 반복적으로 펼쳐지면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냔 말이야!“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상실에 분노한다는 것은 그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 슬픔의 기간에 우리는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이해를 얻게 된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슬픔을 이겨 낸 후에는 관념이 찾아온다. 슬픔이 관념으로 바뀔 때 우리의 심장을 후벼 파는 슬픔은 그 힘의 일부를 상실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자체는 비록 순간적이라 해도 약간의 즐거움을 내뿜게 된다.”
이 과정이 끝나면 우리는 비로소 잃어버린 것에 대한 추억을 내면에 깊이 간직한 채로 새로운 만남을 향해 출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애도란 충분히 슬퍼함이고 받아들임이다.
그리고 떠나보냄이고, 새로운 출발이다. 또한 잃어버림이고, 그 잃은 것을 내 안에 영원히 간직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애도를 못 하면 과거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그 안에 사로잡혀 과거 속을 망령처럼 살 게 된다. 현재에 있으나 현재를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는 그 시절이 돌아올 수 없음을 인정한다 해서 과거의 추억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 추억은 나의 정신 구조의 일부를 형성한다. 영원히 내 마음 안에 살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와 성장은 우리가 상실을 삶의 불가피한 요소로 받아들이고, 잃어버린 것을 슬퍼하며 애도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른이 될 때까지 크고 작은 애도 과정을 거치며, 죽을 때까지도 계속 떠나보냄과 맞아들임을 반복하게 된다.
성장한다는 것은 사실 슬픈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인정한다면 나의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 과도한 이상이라는 쇠사슬에 꽁꽁 묶여 고통당하지 말고, 이제 그만 그것들을 훌훌 떠나보내고 새로운 인생을 두 팔 벌려 맞이하라!
<‘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들을 위한 심리학’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김혜남지음, 메이븐 출판> * 김혜남 : 1959년 서울 생,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졸업하고 국립정신병원에서 12년간 정신분석 정공 의로 일했다. 성균관대, 인제대 외래교수이자 서울대 의대 초빙교수 역임. 김혜남 신경정신과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80만부 베스트셀러<서른 살이 심리학에 묻다>와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당신과 나 사이>,<보이지 않는 것에 의미가 있다>등의 10여권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