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함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느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 천상병, <행복> 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가 취하기 관점에서 보면, 부탄왕국 국민의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통계 결과가 쉽게 이해가 갑니다.
부탄왕국이 아니라 한국, 다시 말해 후기 자본주의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욕망을 자극하고 소비를 강요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기인으로 산 천상병 시인처럼 마음을 가난하게 갖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이제 행복을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요소가 작용하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객관적이고 구조적인 요소들이 주가 되는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사적 행복’과 구분되는 ‘공적 행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사회와 연관된 행복 문제를 다루기도 하지요.
아저씨,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줄까요?(…)
예쁜 전갈 하나가 잘 생긴 남자 전갈
몇 명을 데리고 사막을 걸어갑니다. (…)
그런데요 이렇게 정답게 다니다가
배가 고프면 말이에요.
예쁜 여자가 그중 제일 여리고
귀여운 남자를 은근슬쩍 부른다네요.
남자는 좋아라 다가가겠지요.
여자는 남자 목잡아 끼고 꼬옥 껴안는답니다.
남자는 앙큼한 생각에 이게 웬일이다나,
황홀하고 몽롱해져서는 가만히 있는다지요.
그러면 여자는 남자의 사타구니를
쓱 벌린 다음 자기 성기를 꼭 찔러 넣는대요.
나른하게 퍼지는 게 독인지도 모르고
남자는 오르가슴에 떨겠지요.
독 퍼질 즈음에서야 비로소 정신 차리고
반항하지만 어쩌겠어요?
이미 독 퍼진 다음이라 몸 축 늘어질 밖에요.
남자는 제 대가리를 뜯어 먹는
여자의 사각거리는 입질 소리
어질어질 들으면서 세상 하직하겠지요?
잔인하다구요?
사막인데요?
나도 너를 잡아먹고 너도 나를
잡아먹지 않을까요?
사막에서는, 에이 거짓말 말라구요?
그런 사막이 어디 있느냐구요? 저기요,
압구정동이라는 사막, 막 또 다른 여자 전갈과
남자 전갈이 길을 나서네요. 한번 쫓아가보세요.
내 말이 맞나 틀리나.
- 정우영, <압구정동이라는 사막>전문 일부에서
이 시에서 ‘압구정동’은 욕망과 쾌락을 충족시켜주는 가상의 공간으로 ‘소비물질주의의 낙원’을 상징합니다. ‘예쁜 여자 전갈’은 <오징어>에 묘사된 “눈앞의 저 빛!/찬란한 빛!”이고 에스키모 이야기에서 나오는 “칼날에 묻은 피”이며, <어플루엔자>의 소비물질주의 바이러스라고 해석해야겠지요.
여기서 ‘어플루엔자(Affluenza)‘는 물질적 풍요를 뜻하는 '어플루엔스(Affluence)와 유행성 독감을 뜻하는 ’인플루엔자(Influenza)‘를 합한 용어인데, 물질적 풍요가 만들어낸 치명적인 바이러스라는 뜻입니다.
토머스 네일에서 쓴 책에서 “고통스럽고 전염성이 있으며 사회적으로 전염되는 병으로,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과중한 업무, 빚, 근심, 낭비 등의 증상을 수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 철학카페에서 시읽기’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김용규지음, 웅진 지식하우스출판>
* 김용규 :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인문학과 철학의 풍부한 재료를 맛깔스럽게 풀어내며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해 인문학의 연금술사로 불린다. <알도와 떠도는 사원>, <다니>,<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서양문명을 이해하는 코드 신>,<설득의 논리학>,<데칼로그>등 지은 책들이 있다.
폴 세잔
세잔의 그림 속 신성한 존재는 우리들 사이에 마치 육체를 가진 인간처럼 실재한다. 양자물리학이 도입되기 훨씬 이전부터 세잔은 모든 순간순간이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한다는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이 그렇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확고하게 믿고 있지만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은 착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세잔은 전체를 움직이게 하는 여러 힘 사이에서 풍경이 깨어져 보이도록 그렸다.
세잔은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시인이자 번역가로 예술가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식견이 뛰어난 독서광이었다. 아마도 당대에 책을 가장 많이 읽은 화가였을 것이다.
말년에 세잔은 자신을 우울증 환자라고 했으며,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영감의 원천이 되지 않는다면 특별한 친구가 필요하지 않고 배우자는 말할 것도 없다고 했다.
세잔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으로 건축가를 고용해 저택을 지었다. 2층에 북쪽으로 커다란 창문을 내어 간접채광이 들어오도록 하고, 남쪽으로 작은 창문을 내어 햇볕을 쬘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세잔이 산을 사랑한 이유는 빛의 방향을 그대로 받아 만들어진 특별한 모습과 914미터 남짓한 친근한 높이, 그리고 여성스러운 자태 때문일 것이다.
세잔은 종교적 관점에서 이해한 신성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화가라는 직업을 하느님께 부름 받은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풍경 앞에 나아가 그 안에서 종교를 끄집어냈다”고 표현했다.
말년의 세잔은 온전한 은둔자가 아니었다. 릴케는 말년의 세잔을 ‘늙고 이상한 외톨이 늑대’라 칭하며 “늙고 초라해서 작업실로 가는 길마다 아이들은 그가 길을 잃은 개라도 되는 양 돌을 던졌다”고 했다.
그럼에도 세잔은 위대한 신비, 즉 죽음이라 불리는 또 다른 삶의 형태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오랜 시간 고독 속에 홀로 그림 그리는 길을 선택했다.
우리가 세잔에게서 배워야 할 점에 대해 릴케는 이렇게 말했다. “최고의 사랑은 작품 밖에 있다. 감상주의자는 ‘여기 있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여기 있는 이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린다.
세잔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그림은 그가 본 것, 그의 앞에 놓인 세상, 그리고 그것에 대한 그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세잔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그림 속 물체와 하나가 된다. 그것이 사과든 생트 빅투아르 산이든 말이다.
세잔은 1890년에 로마 가톨릭으로 귀의했다. 그의 인생에서 강렬했던 마지막 시기의 시작이었다. 고독한 은둔생활, 홀로 우뚝 선 빅투아르 산에 대한 집착, 여기에는 분명 연관성이 있다. 당뇨로 무너져 내리면서도 황폐해진 눈으로 ‘성스러운 승리의 산’의 환영을 그리고 또 그렸다.
인간은 자연을 학대해왔지만 자연은 소리 없이 계속해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며 스스로 치유해 왔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죽음을 감수해 왔기 때문이다. "조화에 있어 예술은 자연과 매우 유사하다." 세잔은 예술이 자연과 똑같지는 않더라도 유사하다고 말했다.
"나는 고립에 적합한 인간이오." 당뇨를 치료하지 않아 감정기복이 심했던 날에 세잔이 쓴 글이다. 세잔은 오직 고독 속에서 그림에 자신을 오전히 바칠 수 있었다. 세잔은 그림을 통해서 하느님께, 하느님을 통해서 인간에게 나아갈 수 있었기에 고독을 사랑했고, 고독의 시련을 견텨 낼 만큼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했다.
차가운 가을비가 내리는 10월에도 세잔은 산에 올라 그림을 그렸다. “날씨 때문에 계획을 바꾸지 마라. 마음을 다스리며 날씨를 따라라. 날씨가 그 위엄과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도록 두어라.” 그러다 결국 폐렴에 걸려 며칠 뒤 사망했다.
그처럼,
골짜기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끝자락에 서서
마지막 한 번 더, 돌아선다, 머뭇거리다, 멈춰 선다.
그렇게 우리는 살다가 영원히 작별을 고한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비가>중 제8가에서
생트 빅투아르 산을 보라! 저 기백,
빛을 갈구하는 당당한 모습.
하지만 어둠이 내려앉으면 슬픔에 젖는다.
세상 모두 우울을 들이마시며 …
- 폴 세잔
<‘고독의 창조적 기쁨’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팬탄 존슨지음, 김은영님 옮김, 카멜북스출판> * 팬턴 존슨 : 창의적인 논픽션과 소설을 쓰는 작가. 미 정부의 문학상인 람다 문학상을 수상했다. 일곱 번째 저서인 <고독의 창조적 기쁨>은 뉴욕타임스 북리뷰 ‘편집자의 선택’도서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