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그대 있음에!

[중산] 2024. 6. 7. 20:50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마음이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삶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 김남조,<그대 있음에>전문

 

진하 명선도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진정으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비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바로 ‘그’를 ‘그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를 ‘그대’로서 대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김남조(1927~2023) 시인의 시에서 내용을 잘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곳은 당연히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라는 구절입니다. 상식대로라면, 먼저 내가 있어야 ‘그대’가 있지요. 왜냐하면 ‘그대’란 나의 상대로서만 존재하는 대상의 명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왠일인지 시인은 거꾸로 노래하고 있지요.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1889~1973)<형이상학 일지>의 ‘그대-이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침묵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응답할 수 있는 상대로 간주되는 2인칭으로 말을 건넵니다.

 

응답이 가능하지 않은 대상에게는 3인칭을 사용하지요. 예컨대 나무나 돌에게는 ‘너’또는 ‘그대’라는 2인칭을 쓰지 않고 ‘그것’이라는 3인칭을 사용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는 본디 ‘나’라는 1인칭과 ‘그, ’그녀‘, ’그것‘이라는 3인칭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3인칭 관계에 있는 대상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제삼자‘이고, 당연히 서로 응답하지도 배려하지도 않으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1인칭인 ‘나’가 3인칭 대상에게 ‘2인칭 관계’를 맺어 ‘너’ 또는 ‘그대’라고 부를 때에만 3인칭 대상도 나를 2인칭으로 부르면서 응답하고 존재를 인정하게 되지요. 

 

마르틴 부버가 <나와 너>에서 ‘나-그것’의 관계와 ‘나-너’관계를 구분한 것과 짝을 맞춰 생각하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후일 사르트르(1905~1980)가 <존재와 무>에서 ‘외적관계’와 ‘내적 관계’를 구분한 것과도 상응하지요.

 

사르트르는 “타자의 출현이나 소멸로 인하여 나의 존재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관계를 외적 관계라 하고, ”타자가 나의 나됨, 곧 내 존재의 탄생과 소멸에 개입하는“관계를 내적 관계라 불렀기 때문입니다.

 

3인칭 대상은 “나에게 현존(現存)이 아니고 부재(不在)다”라는 마르셀의 말이 뜻하는 것은, 그, 그녀, 그것과 같은 3인칭 대상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에게 응답하지 않고, 또 나를 배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나에게 응답하고 나를 배려하는 2인칭 상대들의 존재만이 나에게 의미가 있다는 말이지요. 당신이 거대한 왕궁에 살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혼자 왕이 되어 왕처럼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참 좋겠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당신은 점차 당신이 존재하는 의미가 없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마 한 달도 채 지나가기 전에 당신은 자신이 그곳에 있는 나무, 돌, 탁자, 의자 같은 사물과도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될 거예요. 왜냐하면 그곳에는 당신을 왕이라고 부르며 응답하고 배려하는 2인칭 상대가 없기 때문이지요.

 

마르틴 부비(1878~1965)가 ‘진리의 진지함으로 말하노니 그대여, 사람은 ’그것‘없이는 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외친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 나는 ‘나’를 말할 때마다

무로 향하는 컴컴한 돌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가겠지요.

하지만 오늘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너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 심보선, <‘나’라는 말>부분

 

“당신이 없다면,/나는 ‘나’를 말할 때마다/ 무(無)로 향하는 컴컴한 돌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가겠지요”라고 고백하는 거지요. 그대가 없으면 나도 없다! 마르셀은 ‘나’와 ‘그대’사이에 존재하는 이런 관계를 ‘상호 주관적 매듭’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나는 내가 ‘그대’라고 부르는 상대에게서 역시 ‘그대’라고 불릴 때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표시인 포옹이 그 징표입니다. 포옹은 내가 타인을 안는 행위이자 동시에 내가 타인에게 안기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악수도 마찬가지지요. 내가 다른 사람의 손을 잡는 것이자 내 손이 다른 사람의 손에 잡히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마르셀은 ‘상호주관적 매듭’ 개념을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 교훈한 사랑 개념에서 얻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에서 신의 본성인 사랑에는 사랑하는 자인 성부와, 사랑받는 자인 성자, 그리고 사랑인 성령, 이 세 요소가 사실상 하나이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은 ‘사랑하는 것이 곧 사랑받는 것이 된다’는 것을 설파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상호주의적 매듭’안에서는 ‘우리가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보다 언제나 존재하며, ‘우리가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마르셀에 있어서는 주관성이 상호주관성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주관성이 주관성을 정립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내가 있어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어 내가 있다는 말이지요.

 

존재물(또는 사물)의 세계에서는 내가 있어야 그대가 있지만, 존재(또는 존재의 의미)의 세계에서는 그대가 있어야 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대가 있어야 내 존재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바로 이 말은 유대인 랍비인 마르틴 부버는<나와 너>에서 “‘나’는 ‘너’로 인해 ‘나’가 된다‘라고 표현했고, 김남조 시인은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 철학카페에서 시읽기’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김용규지음, 웅진 지식하우스출판>

* 김용규 :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인문학과 철학의 풍부한 재료를 맛깔스럽게 풀어내며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해 인문학의 연금술사로 불린다. <알도와 떠도는 사원>, <다니>,<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서양문명을 이해하는 코드 신>,<설득의 논리학>,<데칼로그>등 지은 책들이 있다.

 

** 김남조 시인(1927~2023) : 1951년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숙명여자대학교 명예문학박사 학위 취득. <성수>,<잔상>,<목숨><나무와 바람><동행> 등의 시집이 있음. 참고로, 송창식님의 ‘그대 있음에‘ 노래 가사는 김남조 시인의 시에서 전문이 인용되었고, ’오, 그리움이여‘을 ’오 그리운 이여‘로만 문구 변경이 되었음을 알린다.

 

송창식 노래 : '그대 있음에'  https://youtu.be/WnJju65yBb8?si=Yfz9HKHKj8qaqXhs

 

'독서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 폴 세잔!  (11) 2024.06.16
내 젊음의 초상!  (39) 2024.06.12
특권의식  (44) 2024.06.04
쌀 찧는 소리를 들으며!  (36) 2024.05.31
어리석은 사람!  (31) 2024.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