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내 젊음의 초상!

[중산] 2024. 6. 12. 06:52

내 젊음의 초상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먼 과거로부터

내 젊음의 초상이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지난날 태양의 밝음으로부터

무엇이 반짝이고 무엇이 불타고 있는가를.

 

그때 내 앞에 비추어진 길은

나에게 많은 번민의 밤과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나는 그 길을 두 번 다시 걷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내 길을 성실하게 걸어왔고

그 추억은 보배로운 것이었다.

잘못도 실패도 많았지만

나는 절대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 헤르만 헤세

 

울주군 서생면 나사해변

 

 

늙어 감!

 

아직 몸의 상태가 나무랄 데 없는 75세의 여인은 고통스러운 류머티즘 때문에 전문의를 찾았다. 그녀는 왜 지금 이런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하며, 의사에게 이 몹쓸 병을 몸에서 몰아내달라고 호소했다.

 

남자 의사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예, 자비로우신 부인,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류머티즘을 가지고 싶으신가요?”

 

노화는 불치의 병이다. 질병은 발병 빈도가 잦아지면서 파괴력도 더욱 커지는 탓에 상대적으로 몸이 편할 때조차 비참하기 짝이 없다는 성격을 가진다. 독일 의사나 인류학자의 책에서 읽어 볼 수 있듯, 건강한 사람은 자기바깥에 머무른다.

 

그에게 속한 공간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자아와 맞물린 세계에 나아가는 게 건강한 삶의 태도다. 그러나 늙어가는 사람은 갈수록 세계를 잃어가는 ‘나’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갈수록 더 자신의 ‘몸’이 된다.

 

늙어감의 기본 상태라는 게 있다면 이 상태는 비참함과 불행함이라는 단어로 어느 정도 압축해서 표현할 수 있으리라. 비참하다는 말은 어떤 고통이 치유될 수 없을 것이라는 어렴풋한 의식이 가져다주는 답답함이다.

 

그리고 불행함이란, 그것을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실존의 공간을 채우는 어떤 ‘확신’이다. 여기서도 자기 소외와 그래도 자신을 믿고 싶다는 자신감, 자아 권태와 자아 중독이라는 애매모호함이 우리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노화 과정에서 빚어지는 자아 분열의 첫 단계는, 정신적 자아라는 의식의 에고가 다시 자신을 회복하기 위해 껍데기를 벗어버리려 원하는 단계다. 기억으로 구성된 자아가 정신적 자아이고 이는 가짜 자아이며, 껍데기인 자아라는 자신의 느낌에 저항한다.

 

“이 빌어먹을 몸뚱이 좀 평안하게 내버려둬!” 이로써 정신적 자아는 견디기 힘든 시기심이라는 짐을 벗어던지려 시도하며, 밖으로는 누군가에게 망할 놈으로 비치는 것을 거부한다.

 

노화라는 단계를 거치며 노인의 군단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오로지 몸으로 남을 뿐, 그 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 몸은 갈수록 에너지를 잃어가며 질량이 되어버려 결국 나는 더는 나일 수 없다.

 

이 사회가 ‘누려 마땅한 은퇴생활’이라 부르는 게 찾아온다. 어떤 이에게는 두둑한 공무원 연금이, 다른 이에게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연금이 주어진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역사를 써나가는 현실, 늘 새로운 형세와 국면으로 변화하는 역동적 현실로부터의 추방을 뜻할 뿐이다.

 

사회는 우리에게 사회적 연령을 지정해줬다. 사회는 우리를 파괴한다. 이제 겨우 절정에 오른 우리를, 일종의 불문율, 매일처럼 새로워지는 젊음의 법칙에 따라 우리를 파괴한다. 사회가 주목하는 것은 변화와 발전의 기회, 곧 미래를 가지는 젊음일 뿐이다.

 

오 시대여, 나는 이미 많은 것을 보았노라. 권좌가 무너지고 국가가 생겨났으며 유행은 왔다갔다 사라지고, 인간은 태어나 죽어간다. 전원에 사는 노인은 젊게 남으려 환장한 늙은이보다 사회의 노인 부정에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늙은이는 그를 짓밟고 지나간 시간을 따라잡겠다며 호들갑을 떨지만, 전원의 노인은 간단히 시간을 부정하고 시인처럼 영원만 노래한다. 그러나 양쪽 모두 허위 속에서, 허황된 믿음 속에서 살아갈 뿐이다.

 

시대에 뒤쳐졌다는 의식, 그렇다고 시대를 부정하는 방어적 태도로 굳어질 수도 없는 의식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몸의 만성적 아픔과 견주어도 될 지경이다. 시간의 흐름은 늙어가는 사람에게 불친절해진다.

 

모든 것은 시간과 더불어 허망하게 사라진다는 말은 지당한 진리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아주 해묵은 지혜는, 오로지 살아왔던 공간으로부터 빠져나온다는 불가능한 일을 과감하게 시도할 때에만 자명해진다.

 

그러나 어디로 빠져나간다는 말인가? 표시도 체계도 없는 세계, 공허한 세계, 곧 안티우주로? 시간에 저항해서도 안 되며, 시간의 꽁무니를 따라다녀서도 안 된다. 이게 진리다. 물론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빠져나와 영원함을 붙들 출구가 없다는 것도 진리다. 그런 영원함은 없음, 곧 무(無)이기 때문이다.

 

격렬한 몸의 아픔, 죽음에 앞서 진행되는 ‘학대’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무슨 마법의 주문이라도 외우듯 지워버릴 수 없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는 인간, 생각할 줄 아는 인간에게 죽어감의 사회적 현실을 넘어서서 죽음 자체를 연구해보고 싶다는 열망을 억누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인간은 늘 모순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그 모순을 극복하고 하나로 묶어내야만 한다. 죽음은 죽어감 없이는 공허하지만, 죽어감 역시 공허한 죽음이 없으면 아무 내용을 가지지 못한다.

 

죽어감에 그나마 남은 생기와 죽음이라는 총체적인 황야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이 일단 그 입을 벌린다. 엄밀한 의미에서 죽기 전에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누구도 현재형으로 죽어가지 않는다. 언제나 그저 그는 죽어갔다는 과거형으로 말해질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논리적 언어로서 죽어간다는 말은 단지 과거형 죽어갔다 하는 형태로만 쓸 수 있다. 이는 곧 인간은 자신의 끝을 마주해야만 죽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죽음의 생각할 수 없음이라는 특징은 이런 모든 노력을 허망하게 만든다.

 

죽음이라는 무(無)는 모든 논리 법칙을 무력하게 만든다. 나의 죽음을 말하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어불성설이다. 내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없다. 죽음이 찾아왔다면,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야기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니까 침을 뱉겠소.”토마스 만의 요셉4부작에서 아들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에 아버지 야곱이 한 말이다.

 

누구든 자신의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소식을 들으면 침을 뱉으리라. 죽음과 사라져 없음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든 그것을 받아들이고 마음의 정리를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지 않는가. 야곱은 더 할 수 없이 깊은 욕지기로 침을 뱉었다. 이건 아니다.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이 아니라, 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스캔들이자 일어나서는 안 될 불가능한 일이었다.

 

잔혹하면서도 반자연적인 방식으로, 인간은 뱉은 침을 다시 삼켜야만 한다. 이번에 죽은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생각할 수는 없지만, 죽음은 생각되어야만 한다.

 

“틀렸어, 그건 그냥 죽음이냐.” 장폴 사르트르는 말했다. 이 말로 철학자는 죽음을 거절했다. 인간의 실존을 불투명한 본질로, 돌처럼 굳어진 ‘존재’로 만드는 죽음을 거부한 것이다.

 

우리가 품는 모든 상념은 결국 죽음에서 깨어진다. 죽음의 완전히 공허한 진리, 그 비현실적인 현실성은 우리 인생이 가지는 무의미한 완성이다. 무(無)로 넘어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완전하게 인생을 극복한 우리의 승리는 곧 우리의 총체적 붕괴다.

 

이제 타인의 죽음을 어떤 것의 더는 존재하지 않음으로 경험하는 것은 모든 부정적 사고, 곧 변증법적 사고의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변증법의 거부이기도 하다.

 

긍정인 동시에 부정이라는 모순으로서의 죽음은 그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 부조리다. 모든 의미, 신비, 비속함, 필연적이고도 가능한 생각 등이 이 부조리 앞에서 무너진다.

 

우리의 인생은 죽음이라는 경계 덕분에 가치를 가지지만, 동시에 언젠가는 끝장을 맞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가치를 잃어버린다.

 

죽음의 부조리, 어떻게 죽을 것인가?

 

죽음은 근원적 모순이다. 이 모순은 절대적인 ‘부정’으로, 다른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부정을 포괄한다. 죽음은 부정적으로만 정의될 수 있을 따름이다. 부정적 생각은 죽음으로부터 비로소 비롯된다.

 

누군가 존재했었으며, 더는 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만 경험한다. 망가진 물건은 물리적 성질이 다르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은 인간은 영원히 사라진다. ‘주소도 없는 먼 곳으로 떠나간다.’

죽어 사물로 굳어지면서 그 자체로 분해되어버리는 망자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부정이 된다.

 

죽음으로 무얼 어떻게 시작하든 그것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잘못이다. “논리적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 독일 철학자 루돌프 카르납이 하이데거의 무(無)를 다룬 문장을 의미론적으로 분석하고 한 말이다.

 

죽은 사람이 고단한 인생 끝에 마침내 얻은 영원한 평화, 모든 인생이 그렇듯 고단하고 힘들었던 삶을 마감하고 얻은 평온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죽음의 평안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삶의 불안함을 떨쳐버렸다는 뜻이다.

 

정확한 표현은 어떤 이가 죽었으므로 그는 이제 없다는, 무(無)가 되었다는 말이다. 다만, 예외는 있다. 메타포를 즐기는 살아남은 이가 망자의 평안을 바라는 확신으로 영원한 삶을 바란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여기서 글을 쓰는 사람은 신화를 매개로 몇몇 의미를 얻는 믿음, 곧 죽음 이후에도 삶은 지속된다는 믿음의 부조리함을 들먹이려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에서 우리는 저마다 자신이 불멸의 생명을 자랑한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 말은 틀림없이 맞다. 그러나 이런 확신의 바탕은 흔히 생각하듯 ‘생물 특유’의 생명집착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수 없음을 따름이다.

 

또 한 편으로 이 확신은 신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자신은 영생할 것이라고 믿는 만큼이나 허약하고 가냘프다. 영생, 신의 은총, 참으로 알 수 없는 말이다. 경악스러운 현실을 전혀 담아내지 못하는 공허한 철자일 뿐이다.

 

프로이트가 옳았다. 누구도 자신의 임종이 임박한 순간에 저승에 희망을 걸지 않았다. 누군가 언젠가는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생각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좀 애매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죽음의 상념을 품기 시작하는 지점, 그래서 아 이제 늙는구나 하고 말하는 지점은 있다. 물론 우리가 늙는구나 하는 지점을, 젊다고 자신하는 시기를 점찍듯 정할 수는 없다.

 

심한 병에 걸려도 ‘곧 털고 일어나겠지’하며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이런 저항 능력을 확신하는 ‘몸의 지혜’일까? 그거야 생물학이 답할 문제이다. 우리가 늙어가며 깨달았다고 믿는 것은 두 가지다.

 

우선, 죽음의 두려움 혹은 죽음 상념의 절박함은 죽음이 밖으로부터, 이를테면 사고나 적의 손으로 일어나느냐(전쟁), 아니면 안으로부터 빚어지느냐에 따라서 서로 다른 강도를 보인다.

 

안으로부터의 죽음일지라도 젊은 사람들에게는, 비록 그가 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할지라도, 현실적이라는 느낌을 별로 주지 않는다는 게 또 하나의 깨달음이다.

 

늙어가는 인간은 갈수록 회한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발견하며, 그가 실제로 세상과 작별하기 오래전부터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몸의 상실, 사회로부터 소원해짐, 문화적 감각의 손실은 예전에 그가 그저 이론적 진리로만 무심하게 여겨왔던 사실을 확신하게 만든다.

 

죽음보다 죽어간다는 게 두렵다.

 

피곤해서 길을 걷기 어려울 때면 택시를 탄다. 모든 게 상당히 편안하다. 몇 장의 지폐만 내놓는다면 이 좋은 서비스는 얼마든지 맛볼 수 있다. 그러나 두려움은 나와 함께 있다.

 

무감각한, 나를 결코 떨게 만들지는 않지만 무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끈질긴 느낌인 ‘두려움‘. 그것은 쉽게 놓아주지 않는 질긴 손길로 내 인격의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움을 가졌다”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나 자신이 두려움이다”라고 말할 따름이다. 나는 죽음을 알지 못한다. 그 어떤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음을 알까?

 

핀란드에서는 저녁에 이런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주여, 당신이 부르시면 저는 기꺼이 따르겠나이다. 다만 그게 오늘 밤이 아니길 빕니다.” 자신이 죽음에 가까이 왔음을 아는 노인은 기도문을 외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불안정한 균형의 줄타기를 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은 자신이 이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한사코 부정하며 자기기만의 희생자기 된다.

 

늙어가는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벗어날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자신과 거짓말 타협을 하며 살아간다. ‘아, 이제 늙는구나!’느꼈을 때부터 이 거짓말 타협은 시작되었다.

 

나이를 먹어가며 우리는 결국 죽어감과 더불어 살아가야만 한다. 그야말로 괴이하고 감당하기 힘든 부조리한 요구다. 내일 자신이 죽는다고 아는 사람의 오늘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죽음 앞에서 겸허하게 옷깃을 여미며 자신의 존엄을 최대한 끌어올리려 노력할 게 분명하다.

 

“철학은 개념이 현실과 맞아떨어지는 것을 진리라 부른다. 이를테면 몸은 현실이고 영혼은 개념이다. 영혼과 몸은 조화를 이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죽은 시체는 현실이기는 하지만, 참된 현실은 아니다.

 

시체는 개념이 없는 현실, 즉 무(無)개념의 현실일 뿐이다. 죽은 몸이 썩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헤겔이 한 말이다. 우리 몸은 어차피 썩어 문드러진다. 품위 있는 인생, 곧 존엄으로 빛나는 삶을 원한다면, 정신을 갈고 닦을 노릇이다.

 

<‘늙어감에 대하여-저항과 체념사이에서’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님 옮김, 돌베개출판> * 장 아메리(1912~1978) : 191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943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2년 동안 강제수용소 생활을 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이후에는 브뤼셀에서 자유기고가와 방송작가로 활동했다. <죄와 속죄의 저편>, <자유 죽음>의 저서로, 1970년에 독일 비평가상을, 1971년 바이에른 예술 아카데미로부터 문학상을, 1977년 오스트리아 빈 시의 언론출판상과 함부르크 시가 수여하는 레싱상을 받았다.

 

 

울기는 쉽지

 

울기는 쉽지, 눈물을 흘리기에

날아서 달아나는 시간처럼 쉽지.

그러나 웃기는 어려운 것.

찢어지는 가슴속에 웃음을 짓고

이를 꼭 악물고

돌과 먼지와 벽돌 조각과

끝없이 넘쳐 나는 눈물의 바다 속에서

웃음 짓고 믿으며

우리가 짓는 집에 방을 만들어 나가면,

그리고 남을 믿으면

주위에서 지옥은 사라진다.

웃음은 어려운 것.

그러나 웃음은 삶.

그리고 우리의 삶은 그처럼 위대한 것.

 

- 루이스 휘른베르크

 

울주 송정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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