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기는 쉽지, 눈물을 흘리기에
날아서 달아나는 시간처럼 쉽지.
그러나 웃기는 어려운 것.
찢어지는 가슴속에 웃음을 짓고
이를 꼭 악물고
돌과 먼지와 벽돌 조각과
끝없이 넘쳐 나는 눈물의 바다 속에서
웃음 짓고 믿으며
우리가 짓는 집에 방을 만들어 나가면,
그리고 남을 믿으면
주위에서 지옥은 사라진다.
웃음은 어려운 것.
그러나 웃음은 삶.
그리고 우리의 삶은 그처럼 위대한 것.
- 루이스 휘른베르크
이 새로운 우정도 옛 우정과 같다고 느꼈다. 마치 새로운 세월이 하나의 고랑에 의해 다른 세월에서 분리되지 못하듯, 우리 욕망이 그 세월을 붙잡거나 변경할 수 없어 몰래 다른 이름으로 덮는 데 불과하다.
그러나 내가 친구인 질베르트에게 이 새로운 세월을 바쳐 본들, 또 자연의 눈먼 법칙에 종교를 포개듯이 새해 첫날에 품었던 특별한 관념을 이 새해 첫날에 새겨 보려고 노력한들 아무 소용없었다.
새해 선물은 받았지만, 나를 즐겁게 해주는 단 하나의 선물인 질베르트의 편지는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난 아직 젊었다. 그녀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고, 편지를 통해 내 고독한 사랑이 꿈꾸는 걸 얘기하면서 그녀에게도 비슷한 감정이 일깨워지기를 기대할 수 있었으니까.
나이 든 사람의 서글픔은 편지를 써 봐야 아무 효과도 없다는 걸 깨닫고 그런 편지조차 쓰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의 욕망은 서로 부딪치고, 이런 삶의 혼동 속에서는 행복이 그 행복을 요구한 욕망 위에 정확히 놓이는 일이 극히 드물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3,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1에서.
나는 암벽과 나무들이 병풍처럼 드리워진,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화가처럼 살았다.
그들 사이로 보이는 호수의 정경을 그리려
붓을 들었다. 그러나 이미 밤이 찾아와
그릴 수 없었으며, 체념한 사이 낮은 다시 밝아왔다!
-프루스트, <되찾은 시간>에서
사유실체로서의 자아는 쇠락하는 몸을 비-자아라고 폄훼하며, “빌어먹을 위장”이라거나 “더럽게 아픈 다리”라고 말하길 즐긴다. 물론 자아라는 것은 이 위장과 다리 이상의 것이기도 하다.
바로 그래서 내가 치통을 온전히 자신의 고통으로 몰입하는, 그래서 본격적인 진리가 밝혀지기 시작하는 과정이 열리는 ‘고통의 축제’의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주목해야만 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누구나 건강하고 싶지, 병들고 싶지는 않다. 젊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늙고는 싶지 않다. 아픔으로 자아 발견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휘파람 섞인 야유나 들을 소리다.
정상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가 작동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개념일 뿐이며, 우리가 여기서 시도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병적으로 비칠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관심사는 불가피한 ‘살아낸 주관적 현실’에 근접해보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