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감온도 35도 이상 푹푹 찌는 삼복 더위다. 밤이 돼도 방에는 여전히 군불을 지핀 듯 열기가 가득하다. 스치는 소파도 걸치는 옷가지에도 불덩어리 귀신이 붙어 있는 거 같다. 에어컨을 한번 켰다가 끄면 정든 님 떠나보낼 만큼 아쉽고 여운이 깊다.
에어컨 바람은 사람을 붙들고 놓아 주지 않아서 되도록이면 뿌리치고 자연의 상태로 있으려고 하지만 그 또한 쉽지 않다. 덥기는 무지 더운 날씨다. 나는 여느 때처럼 선선한 바람이 부는 새벽녘에 도시락을 챙겨서 오늘도 농원을 향해 나섰다.
한낮의 열기를 피해 아침 일찍 나서야 한다. 그래야 오전 일찍 기본적인 일을 끝내고 내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이에는 늙은 수사자처럼 무리를 벗어나 자기만의 공간에 머물어야 자유롭고 편안하다.
숲속 어디든 갈 곳이 있기에, 이삼 일마다 나설 때는 마음은 늘 소풍가는 것처럼 들뜨게 된다. 나를 반기는 작물과 가축이 있고 쉴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몇 권의 책까지 들고 가면 등장인물과의 대화로 심심할 틈이 없다.
한 여름의 뙤약볕에 시든 작물에게 물을 주고 나면 작물들은 이내 생기를 머금고 화답을 하며 말을 걸어오는 거 같다. 마치 친한 친구와 서로 만나 교감을 나누듯이 말이다.
사각 콘크리트 아파트와는 달리 방문만 열면 넓은 마당이고 광활한 대자연이다. 그곳에서는 풀벌레, 매미, 새들의 오케스트라 연주로 나를 유혹하며 자유로운 영혼에 동참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럴 땐 그들이 부르는 숲속으로 산책을 자주 나선다.
삼복 더위에 독한 말벌에게 몇 방을 쏘이다!
오늘따라 안 가던 길로 걷고 싶었다. 좁은 숲길을 지나가면서 앞을 가로막는 나무 가지를 치웠는데 갑자기 우~웅하는 소리가 들렸다. 흔들리는 가지사이로 살짝 흰 공의 실루엣처럼 뭔가 보였다. 직감적으로 말벌이구나 하는 느낌이 확 들었다.
아이구야! 본능적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몇 미터를 냅다 뛰었지만 끈질기게 여럿마리가 따라와서 머리, 턱, 등 쪽을 마구 쏘아댔다.
덜 쏘이기 위해 몸을 비틀면서 뛰었기에 벌 입장에서는 완벽하게 독을 주입하지 못했지만 나로서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래도 큰 말벌에 쏘인 터라 느낌이 싸 해서 병원에 얼른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배낭에 짐을 대충 주섬주섬 챙기면서 상태를 살펴봤다. 정수리를 빗나 간 머리와 턱 그리고 등 두 곳에 독을 주입한 듯 했다. 등은 따끔거리고 아렸지만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말벌한테 네 방이나 쏘이고 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삼복 더위라 하지만 마치 북극 빙하의 바다에 뛰어든 듯 온몸이 오싹 굳어졌다. 그래도 혈관이나 눈 등 예민한 곳에 쏘이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서서히 아려오는 상처가 걱정이 되었다.
말벌의 인간에 대한 공격성은 꿀을 훔치러 올 때와는 딴 판이다.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기 집을 위협 받았을 경우는 페로몬을 뿜어내며 집단 공격을 감행한다. 말벌은 시야도 넓고 마치 열추적장치를 장착한 것처럼 끝까지 추적해 따라온다.
말벌과의 불행한 조우는 예견된 실책이었다. 복장도 숲속을 산책하는 사람의 차림이 아니고 마치 마트 가는 사람처럼 가볍게 입었고 안 가던 길을 즉흥적으로 택한 것이 화근이었다.
키우는 토종벌에는 많이 쏘여 봤지만 말벌은 강도가 다르다. 7,8 두어 달 열심히 집을 짓고 유충을 기르는 시기라 더욱 예민해져 있다. 이 시기를 깜박하고 가지 않는 숲속 샛길을 비집고 들어갔으니 자업자득이다.
아무래도 염려가 되어 가까운 병원으로 차를 몰고 가서 해독주사를 맞고 먹는 약을 받아 집으로 왔다. 피를 빼는 부항기가 본가에 있어 즉석에서 응급조치를 못했지만 뒤늦게나마 독을 빼내는 처치를 하였다.
근육부위에 주입된 독은 부항기로 피를 뽑아내면 통증이 좀 빨리 사라지는데, 혈관이나 주요부위에 주입된 경우는 신속히 병원으로 가서 응급조치를 받아야 한다.
특이한 점은, 꿀벌은 전력을 다해 침을 꽂아 독을 한 번에 주입하고 벌은 이내 산화하지만 말벌은 죽지 않고 독침 부위가 튼튼해서인지 연속 쏘면서 독을 주입한다. 운 좋게도 빠르게 뛰면서 피한 것이 그나마 큰 불상사를 막은 거 같다.
자연은 인간을 시험 한다
자연에 머문 지 햇수로는 제법 되지만, 자연은 가까이 다가오는 인간 누구에게도 차별하지 않고 넓은 등을 기꺼이 내어 준다. 다만 침입자인 나만 겁 없이 무모하게 다가갔을 뿐이다.
이처럼 자연은 미숙한 인간에게 준엄한 심판을 내린다. 짧게는 모기와 진드기 등이 인간을 괴롭힌다. 조금 더 머물게 되면 조금 더 강한 뱀, 지네, 말벌들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침입자를 시험한다.
그 다음에는 더 강자인 고라니와 멧돼지들이 나타나 텃세로 광기를 부리며 침입자를 괴롭힌다. 역설적이지만, 이런 시련들이 몇 번 반복 되다 보면 대처능력과 지혜가 쌓여 오히려 의지는 꺾이지 않고 종국에는 자유를 쟁취하여 편안히 안착하게 된다.
마치 물리학에서 말하는 문턱 값, 심리적인 한계점인 몇 번의 깔딱 고개를 넘다보면 자연은 통 크게 양 팔을 활짝 벌려 결국 받아들인다. 아쉽지만 집사람은 이런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벗어 놓은 장화 속 지네에 물려 병원 치료를 받은 이후로는 아예 전원생활에 발길을 뚝 끊은 상태다.
자연에 입문하는 사람들은 이런 몇 단계의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고 발길을 되돌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미리 니어링 부부의 삶과 장자크 루소와 소로의 발자취를 여러번 되뇌어 봐야 한다.
무슨 일이든 당하고 나면 뒤늦은 후회와 교훈이 따른다.
이처럼 산골에서는 뱀, 벌, 지네 등을 쉽게 만난다, 대다수 인기척이 나면 그들이 먼저 피한다. 그들이 피할 틈도 없이 영역을 급히 침범하면 말벌과 같은 이런 불상사를 겪게 된다.
예전엔 이른 새벽녘에 똬리를 틀고 밤새 쉬고 있던 뱀을 밟아 혼난 적이 있었다. 또한 최근에 잠시 방문을 열어 둔 사이에 뱀이 들어와 방 안의 물건을 다 치우면서 까지 한바탕 소동을 벌인 적도 있다.
근 이 십 여 년을 내 안방처럼 자유롭게 드나들던 자연의 쉼터도 매순간 마다 조심해야 한다. 인간이 자연의 주인인 듯 설쳐대지만 내 생애 땅뙈기를 잠시 빌려 쓰는 입장일 뿐 인간은 그저 자연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안전한 곳에 삶의 터전을 잡고 있는 벌집에 인간이 느닷없이 불쑥 침범을 하였으니 벌은 사력을 다해 집단방어를 한 것이다. 벌에 쏘여 정신이 없던 차에, 한참 영글어 가는 옥수수 밭에 고라니가 휀스를 넘고 들어와 한바탕 다 훑고 지나 간 것을 발견했다.
잘 익으면 손주한테 주려고 땀 흘려 키운 옥수수인데 말이다. 어쩌겠나? 자연에서는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소로의 스승인 에머슨은 "자연은 인간에게 오성과 이성을 동시에 훈련시키는 학습장"이라고 말하며 "천둥이 으르렁거려도 개의치 말라"고 했다.
그래도 몸은 약간 고되지만 영혼은 자유롭다
가끔 이런 혼란속에서도 한편으로는 자연이 나를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고 나 또한 순간의 행복감에 젖을 수 있기에, 나와 자연은 하나가 되어 영원과 행복을 동시에 만끽하게 된다.
"영원의 순간이 되면 인간 몸 전체가 '투명한 눈동자'가 되고. 인간적 지식은 하등의 의미가 없는 무시간의 순간이 된다," 고 에머슨은 말했다. 이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초월적 시간을 의미한 거와 일맥상통한다.
아직은 알듯 모를 듯하지만, 순간의 행복감을 붙들고 긴 시간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 몰입하거나 명상을 통해 영원으로 연결시켜 보기도 한다. 흔히들 바쁜 일상을 완전히 손 놓고 순간의 행복감에 젖는 멍 때리기와 비슷한 원리지만 좀 더 심오하다고 보면 될 거 같다.
"삶이 그대 직업이 아니라 오락이 되게 하라. 모험과 믿음이 부족하여 인간은 지금 있는 그곳에 있고, 지지고 볶으면서 한평생을 농노처럼 보낸다."는 소로의 말들을 새삼 떠올려 본다.
노년에 깨친 주의 사항들
나이 들수록 자동차의 점멸등처럼 깜박거리는 몇 가지 주의사항들이 있다.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대로 곧 바로 움직여서는 곤란하다. 중요한 일은 움직이기 전에 누워서든 앉아서든 곰곰이 몇 번을 되뇌어 보고 실행해야 한다.
둘째는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수행하여 뇌에 과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순서도 어긋나고 사용하는 도구도 자주 잊어버린다. 셋째는 왕년의 능숙한 경험만 믿고 습관적으로 쉽게 덤벼들지 말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나이 듦에 따른 노화 현상이라고 자연스레 받아들여야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혹여 깜박 잊어버리더라도 자책하는 것 보다 "뭐 그럴 수 있지, 괜찮아!"하며 자신을 다독여야 우울한 잔영은 사라지고 어린아이가 칭찬받은 듯 이내 밝은 분위기로 전환 될 것이다.
나이 들어 시간이 많다고 여유로움이 생기는 게 아니다. 노인들 사고 중 무단 횡단 사고율이 높은 게 이를 방증해 준다. 그리고 젊었을 때부터 바쁘게 활동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있어 쉽게 고쳐지지도 않는다.
나 또한 운 좋게 말벌에 쏘이고도 살아남았지만 질병이든 사고든 우리의 허점을 늘 노리고 있다. 물론 말벌 같은 경우도 큰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래 말벌에 쏘여 죽을뻔 해놓고 뭐가 그리 좋아 산골에 뻔질나게 가느냐?"고 묻는다면, "불편은 그 때 잠시일 뿐, 머무는 그 순간부터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의 편안함과 소소한 작물, 더 나아가 자연과 일체가 됨을 느끼기 때문이다"라고 둘러 대고 싶다.
벌에 쏘인 오늘 밤은 선풍기도 필요 없이 열대야도 전혀 못 느끼며 겨우 눈을 부쳤다. 한여름에 귀신 나오는 오싹한 놀이터에 가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눈 뜬 그날마다 축제를 펼치자
나이 들면 자랑거리가 없다. 말벌에 쏘였다고 아들과 집사람에게 말해봤자 돌아 올 대답은 괜한 걱정과 어린애들 염려하듯 줄곧 건강당부밖에 없다.
하루하루가 중요하다. 말벌로 하루 연극은 소란스럽게 망쳤고 통증이 가라앉으면 또 다른 장르로 연극을 펼쳐야 한다. 상상력을 불어 넣어 다음에는 신나는 공연을 꾸밀 예정이다.
아직 호호백발까진 5년에서 10년은 남은 듯하다. 물론 건강이 뒷받침이 돼야 한다. 남은 5년은 최절정기로 본다. '늙으면 추해지고 아둔해지고 외로움을 탄다'. 이 말은 우리 스스로를 미워하고 자인하는 것들이다.
상상력으로 스스로 생기를 불어넣어 매일 새로운 무대공연을 펼쳐야 한다. 해로운 벌에 쏘인다든가 술로 무료함을 달래서도 안 될 것이다. 들뜬 적극적 쾌락보다 마음의 큰 동요 없이 자족하면서 현재를 즐기는 소극적 쾌락을 벗 삼아야 한다.
나의 부주의한 행동으로 하루의 연극을 다 망쳐놓고도 가만히 넘어가기엔 뭔가 아쉽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좀 들었다. 그나마 그렇게 심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위로를 해보지만 그래도 뭔가 허전해서 새벽녘까지 뒤척이다가 회한의 글을 적어봤다.
말벌에 몇 방 쏘여 보니 온 몸에 전율을 느껴 삼복더위도 범접을 못하는 거 같다. 솔로몬 왕의 지혜가 필요한 때다. 덥다 덥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다! 입추가 지나고 곧 처서가 다가 온다. 모든 분들 부디 말벌 조심하시면서 건강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 💕
칠십 평생을 살아 온 우리에게는
밋밋한 일상은 지루하다.
그땐 상상력으로 도배하여
이상을 현실로 꾸며야 한다.
행복은 지속되는 노동,
부와 명예에 있지 않다.
사랑스런 표정처럼
따뜻한 말 한 마디처럼
혀에 닿는 황홀한 느낌처럼
동틀 녘과 노을을 맞는 느낌처럼
목마른 갈증에 한 모금의 물처럼
계절 속 피는 꽃과 꽃향기처럼
커피에 녹아드는 얼음처럼
손주의 웃음꽃처럼
금방 사라지는 것들 속에 있다!
결핍 속 긴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상상력 풍부한 몽상가로 변해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어 즐겨보자!
- 중산, 나만의 전원생활에서.
'중산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름다운 꽃 한번 보려면! (16) | 2024.06.28 |
---|---|
나만의 신전! (26) | 2024.03.13 |
부모님 생각! (43) | 2024.01.12 |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40) | 2024.01.05 |
백령도, 노년의 삶! (46) | 2023.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