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나무를 바라보는 모습들이 다 다르다!

[중산] 2026. 4. 8. 06:31

튤립

 

 

나의 모든 욕망들의 롱드

 

나는 그날 밤 무슨 꿈을 꾸었는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가 깨어났을 때, 나의 모든 욕망들이 목말라했다.

잠을 자는 동안 그들이 사막을 건너고 또 건너온 것 같았다.

욕망과 권태 사이에서

우리의 불안이 망설인다.

 

욕망들아! 너희는 지치지도 않는가?

오! 오! 오! 오! 지나가는 이 작은 쾌락! -

그리고 미래에 서둘러 지나가 버리고 말 쾌락!

아 어쩌나! 나의 고통을 어떻게 연장시킬지는 알고 있지만,

나의 쾌락만큼은 어떻게 길들여야 할지 나는 알지 못한다.

 

욕망과 권태 사이에서 우리의 불안은 망설인다.

전 인류가 잠들기 위해 침대에서 뒤척이는 환자 같았다 -

인간은 휴식을 찾지만 잠조차 얻지 못한다.

우리의 욕망들은 벌써 많은 세상을 지나왔지만,

한 번도 충족되지 못한다.

 

그리고 휴식의 갈증과 쾌락의 갈증 사이에서

온 자연이 괴로움에 뒤척인다.

황량한 아파트 안에서

우리는 비탄에 젖어 외쳤다.

우리는 탑 위로 올라갔고,

거기서는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암캐였던 우리는 메마른 강둑, 비탈을 따라가며

고통에 못 이겨 울부짖었다.

아우레스 산악 지대에서 암사자가 되어 포효했고,

사막에는 물이 많지 않으므로,

암낙타가 되어 염수호의 회색 해조를 뜯어 먹고 속 빈 마른 줄기의 즙을 빨아 먹었다.

 

제비가 된 우리는 양식도 없이

바다를 건너고 또 건넜다.

메뚜기 떼가 되어, 양식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해초였던 우리는 폭풍우에 뒤흔들렸고,

눈송이였던 우리는 바람에 뒹굴었다.

 

오, 거대한 휴식을 위해 나는 자비로운 구원의 죽음을 희망한다.

마침내 기진맥진해진 내 욕망이 새로운 윤회의 고리에 더 이상 참여할 수 없기를!

 

욕망아! 나는 너를 방랑의 길로 끌고 다녔다.

들판에서 너를 비탄에 빠뜨렸고,

대도시에서 너를 취기에 절게 했지만 만족시키지 못했다 -

달빛 휘황한 밤 속에 너를 담갔고,

세상 곳곳으로 너를 데리고 다니며,

파도 위에서 얼러 주고 물결 위에서 잠재우고 싶어 했다.

 

욕망아! 욕망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줄까?

너는 무엇을 원하는가?

네가 싫증내지는 않을 것인가?

 

<‘지상의 양식 ‧ 새 양식’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앙드레 지드 지음, 최애영 옮김, 열린책들출판> * 앙드레 지드 : 프랑스 문인, 1869년 파리 법과 대학 교수인 아버지 폴 지드와 루앙의 부유한 개신교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좁은문>,<배덕자>, <전원 교향곡>,<위폐 제조자들>등 의 작품이 있으며, 1947년 11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51년 파리의 자택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젊은이들에게 건네는 ‘탈주와 해방의 참고서’인 <지상의 양식>은 지상에서의 쾌락과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결단과, 그 실천을 통해 체험한 환희를 기록한 비망록이다.

 

 

 

나무를 바라 보는 모습들이 다 다르다!

 

보통의 일상에서 우리는 사물이나 자연이나 사람들을 그렇게 오래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지 않지만 작가는 그렇게 한다. 이것이 바로 문학과 회화, 소묘, 사진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존 버거의 말처럼 보통 사람은 그저 보고see, 예술가는 바라본다look.

 

버거는 그림에 관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바라보는 것이며 경험의 구조를 탐색하는 것이다. 나무 그림은 그냥 나무가 아니라 누군가가 바라본 나무이다.

 

나무 한 그루가 놓인 풍경을 보는 것은 그 즉시 인식되겠지만, 나무 한 그루를 탐색하는 것(누군가가 바라보는 나무)은 몇 초의 짧은 순간이 아니라 몇 분에서 몇 시간까지 걸릴 뿐 아니라 이전에 나무를 바라봤던 경험을 포함하고, 그 경험에서 파생되며, 그 경험을 다시 참조한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그 유명한 나무를 생각해 보자. 안드레이 공작은 초봄에 처음으로 어떤 나무를 지나치고 한 달 후 늦봄에 그 나무를 알아보지 못한다.

 

너무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분명 너무 앙상한 겨울나무에 가까웠다. 이제는 나뭇잎이 무성하게 돋아나 있었고, 그 주변의 나무들도 마찬가지로 싱그럽게 피어 있었다.

 

안드레이 공작이 이 나무의 변화를 알아본 이유는 일정 부분 자기 자신도 변했기 때문이고 나무가 지닌 건강한 초록의 생명력을 자기 내면의 변화와 연경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칠십여년 후에 장 폴 사르트르는 소설<구토>에서 주인공 로캉탱이 나무를 바라보고 소설의 중요한 에피파니를 경험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로캉탱은 나무를 바라볼 때 자신의 사색적인 습관을 나무에도 투영한다. 그는 마로니에 나무에서 “바다사자의 조밀한 피부처럼(…) 번질번질하고 울퉁불퉁하고 고집스러운 모습”을 본다.

 

땅속으로 뿌리내리고 있는 구불구불한 뿌리는 “크고 거친 발톱”으로 보인다. 로캉탱이 경험한 에피파니는 사르트르 실존주의의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

 

여기서 그의 실존주의 철학보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얻은 깨달음일 것이다. 즉 존재하는 것은 단지 그곳에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존재는 “경험될 수 있지만 결코 연역될 수 없다.

 

” 그는 이런 깨달음으로 말한다. “나는 마로니에 나무의 뿌리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전체가 그 뿌리에 대한 의식이었다. 물론 나는 그것과 분리되어 있었지만(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으므로) 그럼에도 그것에, 오직 그것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나무 그림은 나무가 아니라 ‘누군가가 바라본 나무’이며 나무에 대한 언어적 묘사도 그냥 나무가 아니라 ‘누군가가 바라보고 묘사한 나무’이기 때문이다.

 

이는 잉여의 형식적 또는 이론적 측면이다. 다른 한편으로 나무는 안드레이 공작과 로캉탱 둘 모두에게 순수한 세부 사항이다. 그것은 단지 나무일뿐이고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설명될 수 없는 존재이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세부 사항에서 분리되어 있다고 말한다(우리와 세부사항은 동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세부사항(나무, 나무껍질, 뿌리 등등)일 뿐이다. 다시 말해 안드레이와 나무는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다.

 

이 환원 불가능성이 내가 정의하고자 하는 생명-잉여의 다른 측면, 잉여의 수수께끼 같은 측면이다. 세부사항이 지극히 자기 의식적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자기지양적인 것처럼, 고도의 문학적 기술이면서 동시에 문학적 기술에 대한(삶다움, 즉 사르트르가 ‘그것’이라고 부르는 것) 마술적이기도 하다.

 

세부 사항에 대한 묘사와 분석을 동시에 진행하는 작업에 심취했던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는 <나무의 투쟁>3권에서 톨스토이와 사르트르의 묘사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 마치 나무들이 말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목소리를 낸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존재 자체로, 자기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팔을 뻗는 것 같았다. 그것이 그들이 하는 모든 말이고, 그들의 존재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농장이나 주변 숲 어디를 가든 나는 이 목소리를 들었고, 이토록 느리게 자라는 생명체가 주는 영향을 느꼈다.“

 

소설 안에서 우리는 자아의 모든 연기와 가식적인 행동, 두려움과 비밀스러운 욕망, 자부심과 슬픔을 들여다볼 수 있다. 소설에서는 외적인 관찰로 보이는 것들이 동시에 내적인 관찰인 경우가 많다.

 

안드레이 공작이 나무를 바라보거나 안나 카레니나가 브론스키와 기차에서 만난 후에 남편의 귀 크기를 자세히 보게 되는 그 유명한 장면에서도 그렇다.

 

사람들을 진지하게 관찰함으로써 그들을 잘 이해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동기가 무엇인지 더 예리하게 살펴보면서 그들의 주변과 그 이면까지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소설은 인간이 얼마나 모순적인 존재인지를 극적인 방법으로 묘사하는 가장 뛰어난 장르다. 우리는 어떻게 완전히 반대되는 두 가지를 동시에 원할 수 있을까? 도스토옙스키가 이런 모순을 얼마나 탁월하게 포착하는지 생각해보자.

 

우리가 어떻게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미워하는지, 바람 부는 날의 구름처럼 우리의 기분이 얼마나 순식간에 이런 모양에서 저런 모양으로 변하는지.

 

때로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얼마나 모르는지를 깨닫고 나면 적잖이 놀라기도 한다. 이럴 때면 어떤 사람은 마치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내려다보는 시체처럼 우위에 선 느낌을 받는다.

 

이는 소설을 읽을 때 주어지는 특권이기도 한데,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려 하는지, 허구와 환상으로 자신을 구성한 다음에 그 요소들을 어떻게 억압하거나 망각하려 하는지 들여다볼 수 있다.

 

<제임스 우드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것’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제임스 우드 지음, 노지양님 옮김, 신형철님 해제>

- 제임스 우드 : 영국의 문학 비평가이자 에세이스트, 소설가. 1965년 영국 더럼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90년 영국 언론상 ‘올해의 젊은 가자상’을 수상. 1994년 부커상 소설 부문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2009년 내셔널 매거진 어워드(서평 및 비평부문)를 수상했다. 2003년부터 하버드대학교 문학비평 실습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평론집<파괴된 영지: 문학과 신앙에 관한 에세이>,<무책임한 자아: 웃음과 소설에 관하여>, <짜릿한 것들, 그리고 그밖의 에세이>, 대표 에세이 선집<진지한 관찰:1997~2019>, 소설 <업스테이트>, <신에 맞서는 책> 등이 있다.

 

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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