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하신 3인의 전원생활을 간추려보았습니다. 동기, 주변여건, 가족과의 관계, 나이 등 여러 가지 인자들을 감안하여 결정하여야 겠지요. 막연히 동경하는 분들께는 조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1. 무주 산골에 사는 농부 김광화님!(52세) - 나는 자연이다
아침엔 하루치의 노동을 하고 낮에는 책을 읽는다. 밤이면 두릿두릿 돋아나는 별들과 교신하면서 영속하는 가치들을 생각한다. 이런 삶, 그 무엇보다 이상적이지 않을까. 하지만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다시 도시로 돌아온다. 믿을 만한 경험자들의 통신에 따르면 열 중 일곱은 실패한다. 이게 왜 이렇게 되나. 우선 산중의 외떨어진 삶에서 유래하는 고독을 견디지 못한다. 게다가 마땅한 생산이 없으면 오늘이 궁색하고 내일이 불안하다. 하찮은 번뇌와 천박한 욕망을 도시에 벗어 두고 왔으나 내가 지금 끌어안고 있는 전공이 바로 가난이라는 과목임을 알게 되는 순간 마음은 떨리기 시작한다. 영혼은 일쑤 구슬피 우는 소리를 낸다. 인생이 영화와 다른 게 바로 이런 대목에서다. 산골살이의 시련은 장난이 아니다.
그의 관심은 돈을 만들기 위한 생산이나 욕심을 채워 주는 소비에 있지 않다. 자급자족을 지향할 뿐이다.
김광화에겐 2천 평 정도의 논밭이 있다. 여기에다 다양한 작물들을 재배하는데 전적으로 유기농법을 구사한다. 이 산골에 들어온 지만 10년. 이젠 농사에 어지간히 이골이 났다. 그의 농법은 참말 진부하다. 지독하게 진부하기에 차라리 전위적으로 느껴진다. 그는 농기계를 거의 쓰지 않는다. 비닐을 써서 수월한 농사를 지으려는 요령을 피우지도 않는다. 심지어 가을철 벼 베기 때에도 낫으로 일일이 벼를 벤다. 수동식 탈곡기로 나락을 턴다. 이게 참 미련한 짓 같고 팍팍한 중노동이겠으나 김광화는 그게 좋다. 적성에 맞다.
기계를 쓰지 않고 굳이 손으로 모든 일을 해내는 것은 석유 문명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서입니다. 게다가 제겐 돈 버는 재주가 아주 결여돼 있죠. 그럼 무엇을 잘해야 하는가. 돈 안 쓰는 일을 잘해야 되겠더군요. 자연에서 얻는 것들은 돈이 들어가질 않으니 가급적 자연에서 얻어야만 합니다. 농사도 최대한 돈 안 들이고 전 과정을 마칠 때 기쁨이 커집니다.
집안의 농사를 김광화 혼자 감당하는 건 아니다. 아내 장영란(50세)씨는 물론 두 아이들도 함께 생산에 나선다. 그의 얘기에 따르면 매일 두 시간 정도의 가족 노동이면 무난하다고 한다. 농법의 실험도 다양하게 시도해 왔다. 특히 벼농사의 경우 별의별 족보 있는 농법들을 다 시도해 봤다. 이젠 누구나 인정하는 유능한 농부다. 그럼 이렇게 해서 일가의 자급자족이 가능한가?
네 식구가 차질 없이 먹고 살아갑니다. 만족할 만한 수준이죠. 그런데 자급자족을 말할 때, 100퍼센트 자급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자족은 얼마든지 가능하죠. 자급은 못한다 하더라도 자족은 하며 지냅니다.
농사로 부족한 건 산에서 얻는다
김광화는 스스로 돈 버는 재주가 없다고 말하지만 어떻게 보자면 돈 버는 일을 극구 자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삶이 가진 비루한 속성을 아예 학습하지 않겠다는 투다. 그에겐 어디 먼 곳을 돌아다니고 싶은 욕구가 없다. 문밖에 나가는 일을 그리 즐거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갖고 싶은 것도 없고 싶은 것도 별로 없다. 조용하고 태연하다. 농사로 부족한 것은 산에서 구한다. 산. 그가 보기에 산은 풍요한 먹을거리의 창고이자 얼마든지 재화를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의 보고다.
돈을 벌려고 할 경우 자연 속에 그 소재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무한에 가까운 자원이 널려 있거든요. 예를 들자면 봄철의 고사리 채집 같은 것입니다. 우리 네 식구는 고사리를 꺾어 찬을 만들어 먹고 남은 것은 말려서 팝니다만, 작년엔 아이들이 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렇다고 산을 샅샅이 누벼 더 많은 고사리를 꺾으려 하진 않습니다. 그건 자연의 선물이니 자제하며 감사한 마음을 품어야 하기 때문이죠. 쓰고 싶은 만큼의 돈, 꼭 필요한 만큼만 취하면 그만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하고 묻자 “몸과 마음, 영성과 깨달음 같은 가치에 생활의 중심을 두고 있다”는 답이 돌아온다. 한마디로 그는 수행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재학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강제 징집을 당하기도 했던 그는 1996년 어렵사리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마치 ‘이민 가는 심정으로’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지리산 자락 산청에서 “간디공동체”에 참여해 “간디학교”를 설립했고, 1998년에 이곳 무주의 산골로 이주했다. 아내 장영란 역시 서울 토박이였으나 김광화와 결혼하면서 노동 운동을 같이했고 “간디공동체”를 함께 꾸려 왔다.
건강이란 질병의 반대 개념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몸이 몸다워지면, 몸으로 마음과 영성이 드러나면, 바로 그게 건강이라 할 수 있죠. 도시 생활에서는 저의 몸과 마음이 많이 망가졌었습니다. 무절제한 생활 탓이죠. 거의 비관적일 정도로 피폐했는데, 비로소 몸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죠. 산에 살면서는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지냅니다.
김광화 일가가 살아가는 거처는 조촐하고 소박하다. 꾸밈과 치레가 없다. 마당에 수북이 자란 풀들을 그대로 방치한 데에서 풀 한 포기조차 자연의 형제로 여기는 특유의 이데아를 엿볼 수 있다. 땡볕이 뜨거워 살갗이 빵처럼 구워지는 성하盛夏. 창문 열어젖힌 방에 들어앉아 인터뷰를 하는 중에 등골로 땀이 줄줄 흐르지만 선풍기 같은 기계를 내오지 않으니 기계문명에 대한 불신이나 저항의 강도를 짐작할 만하다. 삶에는 의외로 많은 묘수가 있다. 저마다 제가 좋아 찾아들 수 있는 골목길이 있다. 김광화는 ‘자급자족’이라는 어쩌면 위험하고도 짜릿한 생존의 초강수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아웃사이더다. 즐겁고도 기묘한 국외자.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우리네 개인의 삶이 아무리 내밀하거나 독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엔 우주가 들어있다. 김광화는 자신의 우주를 구현하는 일련의 뚜렷한 관점과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로써 그는 아마도 무진장 야무진 남자다. 비록 알아주는 사람이 많지 않을지라도 아랑곳없다. 그는 발언하고 발설한다. 산중 삶의 야생적 지평을 세상에다 대고 나름의 홍보를 한다. 몇 해 전에 아내와 공동 저자로 참여해 발간한 책 『아이들은 자연이다』는 그가 세상에 가담하고 참견하는 한 가지 방식의 성과물.
인간은 자연의 일부
아이들은 자연이라는 생각. 여기에는 자연주의자로서의 꿈과 사상, 희망과 비전이 들어 있다. 아이들은 그냥 자연이므로 그는 아이들을 자연으로 길렀다. 길렀다지만 사실은 “그냥 냅뒀다”라는 표현이 적실할 게다. 마치 숲속의 쥐똥나무 한 그루가 스스로 햇볕과 물을 취해 제 몸을 양육하듯이 아이 둘이 스스로 커 나가도록 협찬했다. 그의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다 일찌감치 그만두거나 아예 학교 문턱도 밟지 않았다. 왜? 심플한 이유가 있다. 학교에 가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학교 가기 싫어한다고 학교를 때려치운다? 이 사람, 제 자식을 정말 사랑하는 아비 맞아? 남들은 땡감 씹은 듯 떫은 기분을 느끼며 이렇게 의아해할 수 있을 게다. 그러나 아이들은 쑥쑥 봄날의 죽순처럼 시원하게 잘 자라고 있다는 게 김광화의 논평이다. 이른바 ‘홈스쿨링’으로 부모들이 교사 노릇을 하는 것이지만, 진정 위대한 교사는 자연이라는 것.
모든 생명은 잘 살려고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죠. 배움은 아이들에게 본성입니다. 호기심과 배우려는 열정이 많습니다. 다행이 산골에는 자연이라는 학교가 있어요. 아이들은 이 자연에서 무한히 많은 것을 배우며 튼실하게 자랍니다. 사회성을 우려하는 분들이 있지만 그 사회성이라는 게 자기 중심으로부터 뻗어 나가는 관계의 확장을 의미한다면, 자연 속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은 이미 충분한 힘을 비축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이제 자신의 몸을 스스로 돌보고, 스스로 공부하며, 스스로 필요한 걸 만들고, 가족과 이웃을 돌볼 줄 아는 전인적 인격체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중략)
산은 그 자체로 평화롭습니다. 인간들이 해를 가하지 않는 한 완전무결합니다. 우리는 무슨 자격으로 산을 망치는 걸까요. 산은 사람에게 삶이 곧 수행임을 깨우쳐 줍니다. 수행이라는 말이 거창하다면 치유라고나 할까? 뭔가를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하는 패턴에서 벗어나 내면의 가능성을 확장시키고, 그렇게 해서 마음을 치유해 나갈 수 있는 곳이 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산수 간의 절경이란 대체로 인간의 발길이 끊어지는 경계에서 펼쳐지는 풍치이다. 사람의 일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그 누구도 즐겨가지 않는 길을 용감하게 걸어가는 이의 삶에서는 어떤 절정의 기미가 엿보인다. 일견 딱딱하고 유머가 결여된 사람으로 보이는 김광화의 산중 삶이 흥미로운 건 이 때문이다. 마당가 자두나무에 숭얼숭얼 매달린 자두가 탐스럽다.
2. 자유 - 자연에서 노닌다
평창 흥정계곡에 사는 이대우님! - 누가 뭐래도 내 맘대로 몰두한다
처음엔 여기가 깡촌이었어요. 반딧불이도 살았고요. 열목어도 많았어요. 지금은 다 사라졌죠. 이 시대에 어딘들 오지가 남아 있기나 하겠습니까? 저기 허브농원이 번창하면서 겨울철에도 사람들이 줄기차게 찾아오는데, 모든 게 10년 전과는 상전벽해처럼 달라졌어요. 그래도 재미있게 삽니다. 친구들은 어디 유배 간 것 정도로 여기지만, 그래도 조금은 남들보다 재미있게 살고 있죠.
유배라? 그럴 만도 했겠다. 멀쩡하게 서울살이를 잘하던 그가 갑자기 산으로 들어갔으니. 젊을 적의 그는 언론사 기자였다. 몇몇 괜찮은 회사에 근무하기도 했다. 이름난 컴퓨터 회사에서 중역으로 9년간 일하기도 했는데, 어느 날 그냥 “때려치웠다.” 그리고 여기 흥정계곡으로 들어와 버렸다. 왜 그랬나.
월급쟁이가 적성에 안 맞았습니다. 툭하면 때려치웠거든요. 시골에 가서 살자, 하는 건 오래된 꿈이었어요. 뭐가 좋아서 그랬냐? 서울에서 할 게 없더라고요. 개나 끌고 다니며 산골에서 그냥 누가 뭐래도 내 멋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골짜기가 요란해지면서 산골 생활이라는 게 좀 우스워졌지만 그래도 많이 만족합니다. 서울에서는 뭐든 멋대로 하기가 힘들었어요. 제재가 많거든요. 산골에선 구속이 없습니다. 편합니다.
내 멋대로 살고 싶었다. 이게 요점이다. 도시의 모든 인연을 싹둑 끊고 산으로 들어가 혼자가 되는 일. 누가 보더라도 이건 모험이거나 도전이다. 유배객으로 보는 시선은 그래도 훈훈하다. 숫제 낙오자나 도망자로 볼 가망성이 많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대우는 도시를 일종의 감옥으로 본 것 같다. 호젓한 삶, 간섭도 속박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 이걸 도시에서 구한다는 건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같은 도로(徒勞)에 불과하다는 관점이었으리라. 그런 그에게 서울은 시급히 탈피해야 할 수렁이었다. 관계와 욕망의 지배를 받지 않는 해방구는 어디인가. 궁리가 많았을 게다. 산림은거를 통해 자유를 구하는 일은 그에게 상당히 화급한 문제였던 것 같다. 12년 전, 쉰다섯이라는 꽤나 늦은 나이에 서둘러 산에 든 것을 보면 그걸 알 수가 있다.
산중 생활은 늦어도 40대에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체력이나 순발력을 요구하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부부가 함께 합의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제아무리 남편이 산에 살고 싶다 하더라도 부인이 반대하면 소용없지 않겠어요? 제 아내는 다행스럽게도 흔쾌히 동의하고 나섰습니다. 덕분에 별 무리 없이 산으로 들어올 수 있었죠.
<미친 듯한 몰두>
도시를 청산하고 산골로 이주함은 어쩌면 다시 태어나는 새 삶을 의미한다. 결심도 많고 계산도 섬세하고 희망도 큰 법이다. 자연위사라, 흔히들 자연을 선생님으로 믿고 섬기며 겸손하게 살 작정을 야무지게 하게 마련이다. 정색을 하고 들어앉아 도를 닦는 나날을 지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대우에게 뭔가 아주 특별하거나 근사한 포부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내 멋대로 살고 싶다! 그저 그뿐이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게 인생이라는 게임. 내 멋대로 산다는 게 쉬운가? 그럴싸한 물리적 공간이 주어졌다고 내 멋대로 사는 내공마저 덩달아 부여되는 건 아니다. 이대우씨도 처음엔 그저 독서로 소일한 것 같다. 모던한 목조 주택 통유리창으로 들이치는 아침 햇살을 어깨에 받으며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고, 낮에는 바하의 음악을 듣고, 밤이 오면 총총히 빛나는 별들과 교신하며 삶의 무한한 광휘 같은 걸 떠올렸으리라. 평생의 동맹자인 아내 서경옥(66세)씨는 곁에서 자수를 놓거나 남편의 얘기를 조용히 귀 기울였을 게다. 이 정도만도 이게 어딘가. 이른바 ‘전원 생활’의 우아한 격조가 넘친다.
그렇지만 이대우의 욕망 구조는 살짝 다르다. 전원 생활이라니, 그건 사치스러운 표현이라는 생각이다. 산골 생활은 아무리 폼을 잡아 봐야 여하튼 뭔가 야생의 에너지가 요구되는 탓이다. 우리네 삶의 뿌리가 시골에 있은 즉, 시골살이를 여분의 낭만쯤으로 오해하지 말자는 사유도 읽힌다. 삶 자체가 여흥이나 판타지 같은 것일 수 없다는 인식도 엿보인다. 하지만 그는 궁색한 경제에 직면해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행운아이거나 실력자다. 원래 그에겐 서울에 평수 너른 아파트가 있었다. 이걸 처분해 좀 작은 아파트를 장만했고 나머지 자금을 산골살이에 투입했다.
그저 그럭저럭 큰 불편 없이 생활합니다. 산골에서 뭔가 생계를 꾸려 나갈 일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한마디로 건달처럼 생활하는 수밖에 없어요. 덜 쓰면서 간소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실상 크게 돈 들게 없는 게 산골이에요. 도시보다 대략 3분이 1 정도의 생활비가 들어갈 뿐이죠. 우리 부부는 한 달에 칠팔십 만 원 정도를 씁니다.
(중략)
산에 들어오면서 꼭 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게 목공일이었어요. 그중에서도 새집을 만들고 싶었죠. 제가 어려서부터 약간의 손재주와 예술적 창의력은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 대가 없이 몰두할 수 있는 새집 만들기가 참 즐겁고 솜씨도 늘더라고요. 지금가지 칠팔백 개를 만들었습니다.
왜 하필 새집을 집중적으로 만드시나요?
사실 새들에게 인공적인 새집이 불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스스로들 집을 지으니까요. 제가 만든 새집에 둥지를 트는 새들은 아마 천 마리 중에 한 마리 정도일 거에요. 미미한 수치죠. 하지만 새집을 제대로 만들어 걸어 주면 분위기가 아주 좋아집니다. 그 무엇보다 만드는 재미가 크죠. 만드는 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 맘대로 디자인하고 톱질하고 망치질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셈이죠.
(중략)
남들은 산골 생활의 겉만 보고 참 좋겠다, 부럽다, 라고 합니다. 이게 뭘 모르는 소리죠. 그런 이들에게 저는 딱 한 달만 산에 살아 보라 말합니다. 뭐 하나 쉬운 게 없는데 특히 겨울철 추위가 혹독합니다. 또 뭔가 몰두할 수 있는 소일거리를 찾는다는 게 쉽질 않아요. 이래서야 내 멋대로 살기 어렵죠. 제가 새집을 만드는 건 몰두하기 위해서입니다. 몰입이 있어야 재미도 있고 행복도 있으니까요. 몰두가 없는 산중 삶은 실패한다는 게 제 결론입니다. 참을 수 없이 고독해지니까요.
이대우의 새집 만들기는 거대한 업무는 아니다. 영혼을 쥐어짜는 무슨 예술이나 구도도 아니다. 그러나 산중 삶의 영일을 보장하는 수단이다. 소박한 일락이다. 혼자 노니는 감미로움이다. 그에게도 한때 중시했던 사회적 외연이나 품위, 가치라는 게 있었다. 하지만 모두 걷어차고 산에 들었다. 주류에서 벗어나 마이너리티로 사는 일의 즐거움. 그는 그런 걸 체득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 그에게 약간의 비논리, 약간의 무대포, 약간의 고집 같은 게 보이는 건 어쩌면 정당하다. 여하튼, 그는 삶의 한 드문 보기이다. 이 시대에 만연한 시장 논리에 구속되지 않는 이미지가 강하다. 아무나 산에 사는 게 아니다.
3. 창작 - 자연이 곧 예술이다
화천 감성마을에 사는 소설가 이외수님! - 술 끊고 담배 끊고, 이제 순리를 본다
꽃다지 파랗게 돋는다. 냉이가 올라와 대지에 문양을 새긴다. 갓난아이 젖니 같은 생명들, 들뜬 숨을 내쉰다. 이렇게 봄이 온다. 하지만 이곳 산중에 봄은 멀었다. 1년에 6개월은 마냥 겨울이다.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의 외진 산골짝. 소설가 이외수(63세)가 여기에 산다. 팻말 하나를 붙이고 산다. “감성 마을”이다.
산길은 진흙탕이다.
차바퀴가 힙합 댄스를 한다. 진흙탕을 뭉개며 후들거리다 찰나에 개울로 처박힐 듯 허우적거린다. 이윽고 길의 끝에서 이외수의 산방이 나타난다. 집 안으로 들어간다. 곁에서 볼 때는 투박하고 덩치 큰 콘크리트 덩어리였는데, 안에 들어앉으니 포근하고 정감이 넘친다. 창문은 드물거나 아주 작아서 밖이 내다보이지 않는다. 방한을 고려한 건축 같다.
산골에 들어온 지 만 3년
산중에 사는 맛 중에 별미는 꿀단지 속의 파리처럼 홀로 정적을 탐닉하며 한가하게 노니는 맛. 수시로 찾아오는 발길들로 김이 새지는 않을까? 귀찮지 않을까?
귀찮다면 굳이 왜 이렇게 살겠습니까? 재밌습니다. 문학과 관련 없는 일이라면 재미없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서 참 좋습니다. 나이 들어 마땅히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중략)
자연 속에 살면 어떤 점이 그렇게 행복하죠?
일단은 나무건 바위건 돈 달라고를 안 합니다. 도시에서와는 다른 겁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밤마다 해와 달은 웃고 뜹니다. 자연을 바라보면 뭐 하나 찌푸리고 있는 게 없어요. 초연합니다. 저절로 자연에게 배우고 동화되면서 사람마저 초연해지게 되죠.
자연 생태와,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의 차이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자연은 전혀 싸우거나 다투지는 않고 주로 조화하거나 양보하며 생태를 유지하는 걸까요?
자연은 주장이라는 게 없습니다. 순리대로 조화하고 변화할 뿐이죠. 서로 먹이를 잡아먹는 일에서조차도 아무런 억지가 없습니다. 어느 경우건 사람처럼 무리하거나 억지 쓰지를 않습니다.
가령 우리가 살면서 뭔가 성공을 했다 할 때, 그 성공에 의해 불행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진정한 성공일까요? 경제를 살리면서 다른 것들을 죽인다면 그게 성공일까요? 우리가 가진 맹(盲)의 하나가 조화의 소중함을 모른다는 겁니다. 인간은 정情(물질적 요소)·기氣(에너지)·신神(영적 요소), 이 셋이 조화를 이룰 때 삶의 질도 높아집니다. 경제를 절대적으로 높게 보는 것은 셋 가운데 물질적 요소만 중시하는 극단적 양상입니다. 경제만 살린다면 도덕은 무시돼도 좋다, 부자만 된다면 정신병자라도 상관없다, 하늘의 가르침 따위 무시할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동물들이 가진 질서만도 못한 혼란에 빠질 게 자명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돈에 짓눌리지 않고 늠름하게 잘 살 수 있는 가치는 어디서 찾아야 하나요?
물질적 빈곤이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는 건 일견 그럴싸하지만 정신적 빈곤이 사실은 더 문젭니다. 요즘 세뇌하듯 떠들어대는 웰빙이라는 게 있는데, 이것은 물질과 정신의 균형을 찾자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침에 TV를 켜기만 하면 그 빌어먹을 웰빙을 떠들면서 먹는 타령만 하거든요. 제가 보기엔 다 환자들입니다. 정신 빈곤을 물질로 때우려는 환자들. 정신 빈곤은 정신의 풍요로 치유해야 되는 것 아니겠어요?
정신의 풍요를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뭔가요?
사랑입니다. 돈만 사랑할 게 아니라 세상 만물을 사랑할 수 있는 여유를, 만물은 아니더라도 길섶에 피는 풀잎 정도는 눈여겨볼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감성 회복이, 자연을 닮는 일이, 그 무엇에 앞서 중요하다는 것이죠.
술 끊고, 담배 끊고
자연은 신이 갈아입는 옷이라 말한 이가 카알라일이었던가. 이외수는 자연을 진실로 관(寬)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가만 보니 그가 담배를 안 피운다. 끊었나? 그랬다. 금연 석 달째란다. 금단현상에 시달려 괴롭단다. 원래는 하루 네 갑 내지 여덟 갑을 피웠던 헤비 스모커. 그러고서도 오래 살아 있으니 이게 신의 은총이겠지만, 이젠 천식이 심해 끊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금연을 하고 보니 비로소 담배가 백해무익임을 실감하셨나요? 아니면 끊고 나서 보니 담배가 매혹의 벗이었던가요?
술은 어떤가요?
술은 담배보다 더 나쁩니다. 제가 건강이 악화되면서 술도 끊었지만 원래는 무박 3일로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셨어요. 동네 반경 20리 이내에 있는 술이 동이 나고서야 술자리가 끝났거든요. 기분 좋아 마신 경우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외로워서 마신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런데 기분 나쁘게 마시면 술이 독약이 됩니다.
(중략)
그의 얼굴에 꽃빛이 스친다
이 선생님은 도(道) 공부도 많이 하신 걸로 압니다.
진정한 작가라면 구원의 문제도 모색해야 할 텐데, 저는 우리의 풍류도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그쪽으로 수행을 해왔습니다.
수행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요?
수행이란 결국 만물과 합일할 수 있는 순리를 배우는 공부죠. 현재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사실은 내가 아니라는 의심에서 출발해서, 자연의 질서로부터 본성을 깨달아 가는 일,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조화와 자비로움으로 나아가는 공붑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마음인데, 생각과 마음의 차이를 알면 훌쩍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생각과 마음의 차이? 그게 뭔지 쉽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자, 봅시다. 흥부가 부러진 제비의 다리를 치료해 주는 것은 마음입니다. 반면에 내 아우놈이 제비 다리 고쳐 주고 부자 됐다는데 나도 제비 다리 부러뜨려야겠다, 하는 건 생각입니다. 흥부는 제비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느끼죠. 이게 합일입니다. 그렇게 대상과 내가 합일할 때를 마음이라 하고, 대상과 내가 분열되면 생각입니다. 마음으로 살면 우주의 근본으로 사는 것과 같죠. 굳이 수행이라는 걸 하지 않더라도, 사물을 아름답게 본다면, 아, 예쁘다, 하는 망아(忘我)로 들어간다면, 그는 이미 소중한 존재로서 자연과 합일한 것이죠.
“감성 마을”, 이곳은 결국 마음으로 사는 일의 아름다움을 기별하는 자리인가. 이외수가 감성을 내세운 건 감성의 반대인 이성이 생각의 발생처인 반면, 감성은 마음의 발생처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서 도가 얻어진다는 게 옛 선사들의 통첩 아니던가. 이외수는 생각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자가 더 빠르고 더 꿋꿋해질 수밖에 없는 증빙 하나를 제시하는데, 그건 바로 그 자신이다.
저의 유일한 재산이자 무기는 생각이 아니라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괴상한 학연 공화국, 지연 공화국을 살면서 저는 오직 마음으로 살아 그 누구보다 훨씬 깊고 넓은 인맥을 가지게 되었고, 삶은 훨씬 윤택하게 만들었어요. 위기 대처 능력이라든가, 고난의 극복이라든가, 그런 힘 역시 마음으로 사는 데에서 나옵니다.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도록 만든 힘, 제 인생 자체를 스스로 배반하지 않게 만든 힘, 이것들이 모두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사는 데서 가능한 일이었죠.
<산이 좋아 山에 사네>, 박원식 지음 , 일부를 간추려 보았습니다. 책속에 많은 정보를 접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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