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의 기원!
한국 요리는 옛날부터 매웠는가?
한국 요리는 맵다는 움직일 수 없는 고정관념이 있다. 실제로 한국인 1인당 연간 고추 소비량은 약 1.8∼2.0kg이라는 통계가 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보아도 당연히 최고 수준이다. 그렇다면 한국 요리는 옛날부터 매운 맛을 자랑했던 것일까?
하지만 이것은 오해다. 한국 요리가 매운 이유는 고추를 듬뿍 사용하기 때문이지만 고추의 원산지는 중남미로 신대륙에 도착한 콜럼버스가 유럽으로 갖고 가 이식할 때까지 한반도는 물론이고 중국 대륙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향신료다. 한국 음식이 지닌 매운맛의 대명사인 김치는 ‘국물이 많은 절인 야채’라는 의미의 침채(沈菜)가 그 어원인데 여기에 고춧가루를 넣어 담그게 된 것은 18세기 이후다. 그때까지는 마늘, 산초, 생강, 차조기 등 자생 재료에 소금으로 간을 맞춰 발효시키는 절인 야채에 지나지 않았다. 후추도 있었지만 동남아시아의 모든 지역과 남만 무역으로 연결된 일본을 경유해 수입되는 향신료로 서민들은 도저히 접해볼 수 없는 귀중한 음식 재료였다.
한반도에 고추가 들어온 경로는 일본의 규수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리고 조선 중기인 1613년 실학자인 지봉 이수광이펴낸『지봉유설』이라는 백과사전이야말로 한반도에서의 고추의 존재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문헌이다. 이 책에서 식물을 다룬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남만초(南蠻椒 : 고추)에는 강한 독이 있다. 왜국(倭國 : 일본)에서 처음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흔히 왜겨자(일본 고추)라고도 불리는데 최근에는 이것을 재배하는 농가를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막에서는 소주와 함께 팔았는데 이것을 먹고 목숨을 잃은 자가 적지 않다.
당시는 일본인이 조선인을 독살할 목적으로 무서운 독초를 가지고 돌아왔다는 소문도 나돌았을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고추는 독초라는 생각 때문에 요리에 사용한다는 발상 전환은 그후 약 1세기가 지난 뒤에야 이루어졌다.
고추가 그럭저럭 빛을 보게 된 것은 18세기 초로 여겨진다. 1715년에 수도법(논에 물을 대어 벼를 심는 방법)을 체계화한 농학서 『산림경제』에서 처음으로 고추의 재배 방법이 소개됐다. 이윽고 고추는 김치나 젓갈의 변질 방지와 냄새 제거의 목적으로 서서히 들어가게 되었고,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고추장도 개발되었다. 이런 경위를 거치면서 고추를 사용한 매운맛이 서민들의 가정에 정착된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인 19세기 초다. 한국 요리는 맵다는 고정관념도 사실은 2백년 남짓한 음식 문화에 지나지 않는다.
'차'는 어떻게 '티'가 되었는가?
차의 원산지는 미얀마 북부에서 중국의 운남성에 이르는 지역 일대다. 차를 마시는 습관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3세기경으로 처음에는 종기나 방광의 통증을 가라앉혀주고 졸음을 쫓아주는 한약의 일종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다가 술을 금지하는 불교의 전파와 함께 3세기 중반부터 순수한 기호품으로서 마시게 되었고, 그로부터 약 1세기 정도 지나 본격적인 차 재배가 시작되었다. 7세기 초반, 당 초기에는 일반 대중들에게도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환금작물로서 전매제도가 도입됐다.
차는 원나라 시대인 14세기가 되자 실크로드를 경유해 러시아에서 인도, 페르시아, 터키로까지 전파된다. 육로로 운반된 차는 모두 고형 녹차로 그들은 이것을 잘게 부수어 끓여서 우유나 양젖, 버터 등과 섞어 마셨다. 육로보다 3백여 년 정도 늦게 복건 지방의 아모이(厦門)가 차를 선적하는 항구로 등장하자 바닷길을 통해 동남아시아와 유럽 각지로도 전파되었는데 바닷길을 제일 먼저 독점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하지만 1669년에 영국 동인도회사가 중국으로부터 직접 차를 수입하는데 성공하면서 영국은 바닷길을 한 손에 거머쥐게 되었다. 이는 현재 영국이 세계 굴지의 차 소비국가가 된 계기이기도 하다.
육식 금기의 탄생 배경
인류는 불을 발명하면서 육식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친 식생활 습관을 살펴보면 식물성 음식에 대한 금기는 거의 볼 수 없지만 육식에 대해서는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편견과 금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인종이나 문화에 의한 미각의 차이나 조리 방법의 차이라기보다 동물의 생명을 빼앗아 그 고기를 먹는다는 데에 대한 감정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나중에는 그것들이 종교적인 금기로 체계화된 경우도 적지 않은데 대표적인 예로 힌두교의 소나 이슬람교의 돼지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완전한 채식주의를 주장하는 경우는 없었다. 단 인도의 자이나교나 예수 재림 교리를 중시하는 세븐스 데이 애드벤티스트(sevens day adventist) 등의 소규모 종교에서는 원칙적으로 육식을 금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에서 돼지고기가 금기로 여겨지게 된 이유는 아무리 고기가 맛있어도 고온 건조한 중동 지역에서 돼지를 사육하는 것은 사회 전체로 볼 때 이익을 안겨주는 가축에 해당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중동에서 돼지는 금기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다.
어떤 지역에서 특정 육류가 편견의 대상이 되거나 금기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이처럼 사육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결과 식용으로서 당연하다는 듯 선호를 받는 육류와 그렇지 않은 육류의 우열이 매겨진다. 예를 들면 인도의 힌두교도들은(금식의 대상인 소는 제쳐두고) 육류는 일반적으로 염소, 양, 닭, 돼지, 말의 순서로 선호한다.
유럽에서는 돼지나 양의 경우와는 달리 소의 경우에는 농사를 지을 때에 많은 도움을 주는 동물이기 때문에 18세기 말까지는 육식을 위해 죽이면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 쇠고기가 일반 가정의 식탁에 오르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으로 곡류의 대량생산 체제가 확립되고 사료도 목초에서 곡물로 바뀌면서 2년 주기로 쇠고기를 얻을 수 있게 된 때이다. 또 20세기 초에 냉동기술이 보급될 때까지 유럽인들은 부드러운 비프 스테이크는 맛볼 수 없었다.
금기에 도전하는 세계의 엽기적인 요리
가식 영역 중에서 일반적인 엽기 요리인 동시에 자연식은 곤충 요리가 아닐까? 전 세계에서 먹을 수 있는 곤충은 약 5백여 종에 이른다고 하는데 지금도 곤충을 상식(常篒)하고 있는 지역은 중국, 동남아시아, 아프리카다. 중국 내륙 지역의 농민은 누에의 번데기나 귀뚜라미를 즐겨 먹고, 베트남에서 라오스와 태국에 이르는 산악 지대에서는 물방개, 개미, 나비, 매미 등을 즐겨 먹는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매미를 즐겨 먹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는 매미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매미는 마지막 탈피를 하기 직전의 번데기일 때가 가장 맛이 좋다. 그리고 성충인 경우에는 교미가 끝난 이후에 하얀 알이 가득 들어 있는 암컷이 맛있다.”
인류는 무엇 때문에 특이하고 엽기적인 음식 재료에 손을 대는 것일까? 특히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까지 먹는 것에 대해서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원래 육식동물인 개는 고기의 공급원으로서는 효율성이 떨어지고, 유럽에서는 일찍부터 쇠고기나 돼지고기가 충분히 공급돼 굳이 개를 도살해서 섭취해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개고기를 즐기는 중국이나 한국의 경우에는 돼지 이외의 육류는 항상 부족한 상태에 놓여 있었고, 낙농업을 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야채 중심의 식생활을 하게 됐고, 쉽게 볼 수 있는 개가 귀중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제공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음식, 그 상식을 뒤엎는 역사”에서 일부요약 발췌, 쓰지하라 야스오 지음/이정환 옮김, 창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