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세상을 떠나기 훨씬 전부터, 작가의 혼령과 서재의 혼령이 뒤섞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1986년 제네바에서 죽음을 맞았지만, 그전까지 오랫동안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책들과 함께 살았다. 그러나 50대 초반에 시력을 잃으면서 책을 읽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의 작은 아파트는 산 마르틴 광장 모퉁이 부근에 위치한 평범한 건물 6층에 있었다. 보르헤스가 우주를 책이라 칭하고 낙원이 ‘도서관의 형태’를 띨 것이라 말했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그리며, 손님들은 책들로 가득한 공간, 책들로 넘치는 서가, 발 디딜 틈 없이 현관부터 막고 있을 인쇄물 더미, 요컨대 잉크와 종이의 정글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책이 반듯하게 정돈된 아담한 아파트를 보았을 것이다.
보르헤스가 50대 중반일 때 당시 새파란 젊은 작가이던 마리오 바르가스요사가 찾아와서는 보르헤스에게 책으로 넘치는 화려한 집에서 살지 않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그런 지적에 보르헤스는 화를 내며 그 철없는 페루 작가에게 “‘리마’에서는 작가들이 그렇게 살지 모르지만, 여기 부에노스아이레스 작가들은 요란스럽게 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네.”라고 따끔하게 말했다. 그러나 작은 책장들은 보르헤스에게 자랑거리였다. 언젠가 그는 내게 “자네에게 비밀 하나를 말해주지. 나는 맹인이 아닌 척하며 눈이 보이는 사람처럼 책을 탐내네. 새로 출간된 백과사전도 당연히 탐나지. 백과사전의 지도에 그려진 강을 따라 내려가, 이런저런 항목에서 재밌는 것을 찾아내는 상상도 해본다네.”라고 말했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국립 도서관에 갔지만 너무 수줍어 사서에게 책을 부탁하지 못하고, 개가식 서고에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중 하나를 집어 들고 아무 항목이나 펼쳐 눈이 빠져라 읽던 때를 즐겨 이야기했다. De부터 DR까지 다룬 백과사전을 집어, 고대 켈트 족의 신앙이던 드루이드교, 시리아와 레바논의 이슬람교 광신자인 드루즈파, 영국 시인 존 드라이든에 대해 알게 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그는 알파벳 순서대로 정리된 백과사전의 행운을 믿는 습관을 결코 버리지 않아 가르찬티 백과사전, 브록하우스 백과사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에스파사 칼페 백과사전을 방문객에게 소리 내어 읽도록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특별히 흥미로운 정보를 듣게 되면, 책 읽어주는 사람에게 그 부분을 쪽수와 함께 책의 뒷면에 기록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서재는 그 주인, 즉 그곳을 독점적으로 사용하던 독서가에게 ‘에우테미아(euthymia)’를 준다. 세네카는 에우테미아가가 ‘영혼의 행복’을 뜻하는 그리스어라고 설명하며, ‘트란킬리타스(tranquillitas, 평온)란 단어로 번역했다. 모든 서재는 궁극적으로 에우테미아를 갈망한다. 에우테미아는 방해받지 않는 기억이며, 글을 읽는 시간의 편안함이다. 요컨대 공동체원과 함께 하는 날에도 갖는 혼자만의 시간으로, 우리가 책을 읽는 사적인 공간에서 추구하는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말한다. “사탄도 찾아내지 못하고, 사탄의 감시원들도 찾아내지 못하는 순간이 매일 있다. 그러나 부지런한 사람들은 그 순간을 찾아내 배가하리라. 그 순간을 찾아내고 적절히 사용한다면 하루의 그 순간은 매일 새로워지리라.”<“밤의 도서관”에서 극히 일부요약 발췌,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주헌박사 번역, 세종서적>
<석류꽃 몽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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