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깨끗한 먼지야”
D. H. 로렌스는 영국 중부 노팅엄셔의 이스트우드에서 광부인 아버지와 교사를 지낸 어머니 사이에서 넷째로 태어났다. 로렌스의 아버지 아서는 무식하지만 활기차고 건강한 광부였던 반면, 청교도적 성향을 지닌 어머니 리디아는 자식들을 노동계급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결혼 직후, 퇴근 후 탄갱의 흙먼지를 씻지도 않은 채 저녁식탁에 앉는 남편을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아무렇지 않은 듯 “이건 깨끗한 먼지야”라고 응수했다. 공동체의 전통이 살아숨쉬는 탄광촌에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던 생활이 리디아에게는 벗어나야 할 질곡이었고, 남편의 무절제한 생활과 술주정은 도덕적 타락으로만 비쳐졌다.
부모 사이의 이러한 계급적, 정신적 갈등은 로렌스의 초기 대표작 《아들과 연인 Sons and Lovers》에서 충실하게 묘사된다. 남편에게 궁극적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된 여인이 그러하듯, 리디아에게 아들 로렌스는 ‘연인’과도 같은 대리적 존재였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병약한 아들에 대한 리디아의 애정은 절대적이었고 로렌스는 어머니가 원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성장했다.
말년에 쓴 한 에세이에서 로렌스는 자신이 아버지의 세계를 온당하게 바라보지 못했음을 술회하고 있다. 아버지에게는 노동하는 남자들이 갖는 특유한 동류의식이 있었고 그것은 곧 기계적 조직사회의 폭압성에 꺾이지 않는 힘의 원천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광부가 된 어린시절 친구들의 모습에서 아버지 시대의 천진하고도 활기찬 패기가 사라지고 말았음을 가슴아프게 바라본다. 이러한 변화는 점차 전면화되는 산업체제 앞에 개인의 생명력이나 전통적 세계의 자생력이 무력화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증후였던 것이다.
불어 교수의 부인 프리다와의 만남
로렌스는 대학 진학을 전후한 시기부터 습작에 열성을 기울인다. 그의 시작품들이 《잉글리쉬 리뷰》 같은 당시 영향력 있는 잡지에 실리면서 그는 유망한 청년작가로 주목받는다. 첫 장편 《흰 공작 The White Peacock》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로렌스는 우수한 성적으로 노팅엄 대학을 졸업한 후 크로이든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이 무렵 그는 대학시절 불어교수였던 위클리의 초대를 받아 집을 방문했는데, 거기서 그의 부인 프리다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독일 귀족 집안의 딸로 자유분방한 여성인 프리다는 정식으로 이혼한 후 로렌스와 결혼한다. 이 결합은 로렌스의 문학세계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녀는 작품소재의 풍부한 원천이 되었으며, 그녀와의 육체적, 정신적인 합일과 갈등의 과정은 남녀관계가 현대사회의 방향과 어떻게 맞물리는지 탐구하는 주효한 장을 제공했다.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을 찾아 떠나다
이 무렵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전대미문의 대재난이자 전면전의 양상을 띤 이 세계전이 당대인들에게 미친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특히 로렌스에게는 서구 역사와 사상이 근본적으로 한계에 다다랐음을 입증하는 의미로 다가왔다. 입으로는 사랑과 평등을 외치면서 개인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고 대량살상을 자행하는 이율배반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전쟁의 근본 동기가 상업주의적 이해관계에 있다면 이 체제를 넘어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서구근대의 역사가 그것이 부정한 탈서구적 가치와 만날 진정한 극복의 싹은 어떤 것인가, 이런 의문들은 그로 하여금 영국을 떠나게 했고 이후 그는 이탈리아, 호주, 미국, 멕시코 등 세계 각지를 떠돌며 그 해답을 탐색했다.
로렌스는 1930년 오랜 지병인 폐결핵으로 프랑스 방스의 요양원에서 세상을 뜬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그가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발견했던 미국 뉴멕시코 주 타오스로 옮겨져 안장된다. 로렌스는 십여 편의 장편 이외에도 수많은 중단편, 에세이, 시, 희곡, 편지 및 그림을 남겼다. 그가 죽은 후 아내인 프리다는 다음과 같이 그의 생애를 요약했다.
“그는 자기가 보고 느끼고 인식한 것을 글로써 동포에게 전달했다. 그것은 빛나는 삶이자, 더욱 충일한 생명에의 희망이었고… 영웅적이고 측량할 길 없는 재능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 채털리 부인(코니)의 남편 클리포드 경은 전쟁에서 부상을 입어 절름발이에 성불구자가 되어 돌아온다. 그는 육체적 관계보다 정신적 통제와 질서가 우월한 것임을 신봉하며 그러한 생활로 아내를 유도한다. 코니는 일종의 ‘반처녀’로서 클리포드와 그 주변의 지성적 남성들에게 무의식적인 반감을 보이고 체념 상태에 빠진다.
실의에 빠진 코니에게 새로 온 산지기 멜러즈는 전혀 다른 종류의 남자로 다가온다. 그가 웃통을 벗고 목욕하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코니는 그의 부드러운 몸에서 살아있는 존재가 주는 감동을 느낀다. 코니와 멜러즈는 이후 숲속에서 만나 성적인 결합에 이른다. 둘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코니는 정신주의적 삶의 허위를 깨닫게 되고 그것이 산업체제의 냉혹함과 불가분의 것임을 인식하게 된다. 마침내 임신한 코니는 클리포드와 결별할 결심을 하는데….(요약)
▣ 어떤사람들? 무슨 이야기?
콘스탄스 채털리(코니) 여주인공. 자유로운 교육을 받았고 남편과의 정신주의적 생활에 지친 여성. 멜러즈를 만나 새로운 변화를
경험한다.
클리포드 채털리 전쟁에서 부상을 입어 하반신 불구가 된 준남작. 소설가에서 탄광경영주로 변신한다.
멜러즈 산지기. 교양을 갖추었으나 노동계급으로 살기로 마음먹은 사나이.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 시대다
여주인공 코니는 ‘예술가들과 교양 있는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자란 아름다운 여성이다. 결혼 전 코니는 유럽을 여행하며 비인습적이고 독립적인 생활을 누리고 남자들과의 자유로운 연애도 즐기지만 그녀에게 성이란 순간적인 자극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니는 클리포드를 만나 결혼한다. 그는 신분상으로는 그녀보다 상층에 속하나 지방 귀족의 편협함을 벗어난 인물은 못된다.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교육받고 독일에서 탄광경영을 배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참전을 결심하고 한 달간 휴가를 받아 결혼하지만, 이들에게 성생활은 그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전쟁 도중 그는 하반신이 마비되는 부상을 입어 귀향하고, 그 뒤 아버지가 죽자 1920년 가을 라그비 저택의 주인이 된다.
준남작부인으로서의 생활은 코니에게는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다가온다. 불구자인 클리포드는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치명상을 입은 듯 세상사를 멀리 하고 아내에게 의존한다. 그는 소설 집필에 전념하고 코니는 그를 돕는 데서 일말의 위안을 받는다. 그의 소설은 날카로운 관찰력을 지녔으나 현실감은 없는 것이었다. 관념과 말과 책을 통한 정신적 생활이 그들 부부에게 주어진 삶이 되었다.
이들에게 클리포드의 케임브리지 시절 친구들이 방문하고 코니는 안주인 역할을 한다. 이 생활에서도 그녀는 내적 공허와 단절을 벗어나지 못한다. 남편의 묵인하에 다른 남자들과 일시적인 성관계도 가져보지만 이 역시 ‘절망의 전조’일 뿐 그녀는 점점 더 약해지고 외로움을 느낀다. 성공한 극작가 마이클리스는 코니에게 육체적 욕구를 불러일으키지만 그것을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그에게는 여성에게 제시할 새로운 삶의 비전도 없었고, 이는 코니에게 진정한 성적 충족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산지기 멜러즈
코니가 27세 되던 1924년. 서리가 내린 어느날, 클리포드와 코니는 숲으로 산책을 나선다. 산책이라고는 하지만, 클리포드는 휠체어를 운전하고 코니는 옆에서 걷는 것이 전부다. 클리포드는 ‘영국의 전통’을 이어야 한다면서 아내에게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져 상속자를 낳을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어린아이, 그녀의 자식이 그에게는 한낱 ‘그것’으로 표현되는 데서 코니는 충격을 받는다.
산책길에서 코니 부부는 산지기 멜러즈를 만난다. 멜러즈는 문법학교 교육을 받았고 전쟁 중에는 장교로 복무한 사나이다. 하지만 그는 중산층으로의 상승을 거부하고 노동계급의 신원을 고수한다. 불화 끝에 아내와 별거하게 된 그는 세상과 고립된 생활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수준 높은 대화를 구사할 수 있을 만큼 지적인 인물이며 클리포드를 비롯한 상층부의 생리를 꿰뚫고 있지만 자신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그가 세련된 표준어를 쓰는 동시에 강한 더비셔 사투리를 고집하는 데서도 알 수 있었다.
숲을 방문한 어느 따뜻한 날, 코니는 우연히 목욕하는 멜러즈의 모습을 본다.
“그 광경은 그녀의 눈에 묘하게 아로새겨져서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그녀는 몸 한가운데를 꿰뚫린 듯한 기분이었다. 누추한 바지가 흘러내려 순수하고 가냘픈 흰 엉덩이의 뼈가 튀어나온 곳까지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고독감이, 완전히 고독한 인간이라는 느낌이 그녀를 압도해버렸다. 정신적으로 완전히 고독하게 살고 있는 인간의 완전하고 하얀 외로운 육체 그것은 미의 재료도, 미의 실체도 아닌 하나의 영롱한 광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윤곽 속에 표현된 생명의 하얀 불꽃, 하나의 육체였다.”
숲에서 돌아온 코니는 처음으로 자신이 육체적으로 얼마나 버림받고 시들어 있는지 슬픈 마음으로 돌아보게 된다.
이 무렵 볼튼이라는 새 가정부가 와서 클리포드를 돌보게 되었다. 그녀는 사고로 죽은 광부의 아내로, 클리포드를 마치 아기 다루듯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 명성을 쫓는 예술가로서의 성공과 물질적 번영인 돈을 버는 성공이 있다면, 이제 클리포드는 탄광경영을 통해 돈을 통한 성공을 좇을 욕구를 느낀다.
클리포드가 탄광 개혁에 몰두하게 되자, 코니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숲을 찾은 코니는 새끼꿩의 어린 모습에 묘한 감동을 느낀다. 새끼꿩의 감촉을 손으로 느끼자 그녀는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이를 본 멜러즈는 코니에 대한 연민과 육체적 욕망을 동시에 느끼게 되고, 이들은 처음으로 성적 접촉을 갖는다. 코니는 마이클리스와의 관계와는 달리, 자신의 만족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모든 것을 멜러즈에게 맡긴다. 현대여성으로서 시달려온 그녀의 두뇌는 아직 휴식을 얻지 못했고, 이제 무거운 짐을 누군가가 맡아주어야만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이후 한동안 코니는 숲을 찾지 않는다. 그녀는 이웃 마을의 플린트 부인의 갓난아기를 보며 모성을 느낀다. 돌아오는 길에 멜러즈를 만난 코니는 최초로 둘이 함께 절정에 다다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코니 속에 새로 생겨난 것은 욕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모하는 찬탄의 마음이었다. 돈과 명성을 좇는 남자들과는 다른 멜러즈에게서 코니는 이전에 느끼지 못한 감정을 품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코니는 부드럽고 따뜻한 생명의 불꽃이 클리포드의 냉혹한 불굴의 의지보다 더 강함을 깨닫는다.
여자로 태어나다
“그녀는 이상하고도 무섭게, 자기 몸 속으로 사정없이 힘차게 들어오는 것을 느끼면서 떨었다. 그것은 부드럽게 열린 몸 안으로 마치 칼을 내밀듯이 쑥 들어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갑자기 엄습하는 두려움의 고통을 느끼며 그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하게도 평화스럽게 천천히, 어둠 속에 평화를 밀어넣듯이, 그리고 태초에 세계를 만든 것과 같은 묵직하고도 최초의 부드러움을 지니며 다가왔다. 그러자 가슴속의 두려움도 가라앉고 마음은 차차 평화 속에 잠겨갔다. 아무것에도 매달리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것을 놓아버린 채 완전히 자신이 되어 그 물결 속에 휩쓸리고 말았다. … 갑자기 부드럽게 몸부림치는 경련을 일으키며 원형질의 핵심에 감촉을 느끼자, 격정의 절정에 이른 것을 알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정신이 나가자 그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하나의 여성으로서 탄생했다.”
이제 코니는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 온전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기능적 만족으로서의 섹스도 아니며 몸을 정신의 도구로 치부하는 것도 아닌, 전 존재의 변화를 수반하는 과정이었다. 코니의 언니 힐다는 동생이 산지기와 관계를 갖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며, 남자에게 자신을 온통 내맡기는 것을 어리석다고 비난한다.
한편 멜러즈 역시 여성들과 평탄하지 않은 과거가 있었다. 멜러즈의 아내 버사 쿠즈는 성관계를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는 도구로 삼은 여자였다. 그녀는 또한 인습적 금기를 무시하는 멜러즈를 변태적 인물인 양 마을사람들에게 소문을 내기도 했다. 코니와의 애정관계가 진전되면서 멜러즈는 여성의 진정한 따뜻함을 발견하게 되고 이것이야말로 냉혹한 산업체제를 이겨낼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을 갖기에 이른다.
코니와 멜러즈의 비밀스런 만남이 이어지자, 채털리 부인에게 연인이 생겼다는 소문이 퍼져나간다. 볼튼 부인은 그 장본인이 산지기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멜러즈의 아내는 질투심에 불타 다시 산장을 찾아온다. 코니는 자신이 임신했음을 알게 되고, 이제 새로운 삶을 향해 결단할 시점에 도달한다. 소문을 잠재우고 원만히 이혼하기 위해 코니는 베니스로 떠난다.
사악한 시대가 크로커스 꽃을 시들게 할 수 없듯이
베니스에서 코니는 클리포드에게 이혼하자는 편지를 보낸다. 이 소식을 접하자 클리포드는 어린아이처럼 볼튼 부인에게 매달려 마구 울어댄다.
클리포드가 냉철한 사업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육체를 기계의 부속품인 양 치부하고, 모든 인간적 관계를 생산체제의 기능으로 뒤바꾼 데서 가능했다. 그런 만큼 코니가 멜러즈와 관계를 가졌고 이제 이혼까지 요구하는 상황은 그를 지탱해온 메커니즘을 무너뜨리는 충격이었다. 일개 하층민이자 고용인에 불과한 산지기와 결합하기 위해 작위도 명예도 모두 버린다는 것은 그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상속자를 낳기 위해 아내의 외도쯤은 허용한다는 클리포드의 입장에서 볼 때 한갓 육체적 관계가 신분과 체면을 모두 저버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코니는 클리포드와의 생활을 통해 현대인을 추하게 만든 근본원인을 발견한다. ‘오늘날의 영국은 새로운 종류의 인간, 즉 돈과 사회적, 정치적 면에서는 지나치게 의식적이고 자연발생적인 반면 직관적인 면에서는 죽어버린, 그저 죽어버린 그런 인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인간형은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반쯤은 시체들’이라고.
코니와 멜러즈는 각기 이혼수속에 들어간다. 멜러즈는 작은 농장을 경영할 계획을 꾸리며 코니와의 결합을 기다린다. 코니는 채털리 부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다음 해 봄에 멜러즈의 아이를 낳을 예정이다. 스코틀랜드에 머물고 있는 코니에게 멜러즈는 편지를 쓴다. 자신들이 맺은 사랑이야말로 이 시대에 남은 유일한 가치 있는 일임을, 또 여태까지 존재했던 여러 사악한 시대도 크로커스 꽃을 시들게 할 수는 없었고 또한 여성에 대한 사랑을 시들게 할 수 없었음을, 그러므로 둘 사이의 이 따뜻한 불꽃 역시 그 누구도 끌 수 없다고. 코니와 멜러즈는 둘 사이의 이 조그마한 불꽃이야말로 진짜이므로, 클리포드나 버사나 탄광회사나 정부나 돈에 사로잡힌 대중에 상관없이 그들은 이 불꽃을 지켜나가기로 다짐한다. 남녀간에 따뜻한 유대가 살아난다면, 돈을 벌고 소비하는 것으로 진정한 삶을 대치한 이 산업체제의 파멸성을 견뎌낼 수 있으리라 희망하면서 편지는 끝난다.
▣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
진정한 성과 외설의 차이
이 작품은 로렌스에게 ‘성문학의 대가’라는 명성을 가져다준 소설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입견이 로렌스의 전체 작품세계와 심지어 이 소설에 대해서도 온당한 접근을 방해하는 면도 없지 않다. 작가의 마지막 장편인 이 소설은 제3판본까지 개작할 만큼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그리고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스캔들을 일으키며 해적판이 끊임없이 나돌기도 했다. 1960년 이 소설의 무삭제 완본에 대한 검찰의 고발이 패소하기까지, 작중 남녀주인공의 수차례의 성교장면은 윤리적 잣대로 비난받아왔다. 한편 근래에 만들어진 동명의 영화나 우리나라의 번역본에서는 당시 영국사회의 산업체제의 문제 및 현대인의 왜곡된 성의식을 비판한 대목들은 삭제된 채 성행위만이 부각되기도 했다. 이런 두 상반되는 편향은 각기 이 소설을 보는 각 시대정신의 차이를 드러내는 한편, 사회적, 성적 문제에 대한 온전한 관점이 이 작품의 이해에 필수적임을 일러준다.
로렌스는 진정한 성과 외설의 차이를 이렇게 지적한다. 진정한 성이란 육신을 지닌 인간의 인간다움의 표현이요, 그들이 거짓 감정을 품었다면 그것을 폭로하는 일종의 진리 기준이 된다. 그리고 외설이란, 독자에게 단순히 성적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과 성을 더럽고 값싼 것으로 만들어 그것을 모욕하는 일이다. 로렌스는 성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현대 백인문명만큼 야만적이고 미개한 역사는 없었다고 개탄한다. 로렌스의 이런 통찰은 광고나 영상물 등에서 벗은 몸의 상품화가 일상화되고 사이버섹스가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 우리 현실을 예견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단순한 성문학이 아니라 온전한 성을 회복하려는 로렌스의 지난한 노력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참된 ‘관계’의 회복과 산업체제 극복을 위한 소설
로렌스는 남자도 여자도 성을 충분히, 완전히, 정직하게, 그리고 깨끗하게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이 소설을 썼다. 실제로 코니와 멜러즈의 사랑이 진전되는 모습에서 이러한 과제가 단순히 육체적 만족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로렌스는 탄탄한 사실주의적 필치와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통해 당대 영국의 삶을 전달한다.
숲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장면들에서 매번 달라지는 인물들의 심리적, 육체적 변화는 잊지 못할 감동으로 다가온다. 코니와 멜러즈가 ‘따뜻한 공감을 기반으로 한 관능의 충족’을 발견한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성을 대상화하거나 감각의 절대성에 탐닉하는 대개의 성담론과는 분명히 다름을 보여준다. 소설이 주는 감동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는 현대인의 왜곡된 성의식이 다양하게 그려진다. 클리포드의 친구들이 보이는 태도가 ‘정신화된 성(sex in the head)’의 전형적 모습이라면, 버사 쿠즈와 힐다의 성은 남성에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수단이다. 예기치 못한 변모를 겪으며 참된 삶에 이르는 코니와 멜러즈의 사랑과는 엄청나게 다른 것이다.
성과 산업체제의 관련에 대해서 클리포드의 형상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애초에 그는 육체적 삶이란 부수적이고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자신을 어린애처럼 다루는 가정부와의 도착적 관계에서 그는 코니에게서는 경험하지 못한 만족을 얻는다. 한 남자이기를 포기한 상태에서 탄광경영에 탁월한 사업가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은 온전한 성과 기계적 체제가 상호 양립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남녀 성에 대해 솔직하고도 깊이 있는 탐구의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역사적, 예술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더불어 주인공들이 사랑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계급적 편견과 산업체제의 기계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육체와 영혼의 조화, 따뜻한 공감의 회복을 갈파하는 이 소설은 날로 냉혹해지는 현대인이 되돌아보아야 할 영문학의 고전이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Lady Chatterley's Lover)”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D. H. 로렌스 지음>
▣ 저 자 D. H. 로렌스(1885-1930)
육체와 영혼의 조화, 따뜻한 공감의 회복을 갈망했던 천재
▣ 로렌스의 생애와 작품
1885 영국 노팅엄셔 이스트우드에서 광부인 아서 로렌스와 교사 출신의 리디아 사이에서 넷째로 태어나다.
1891-98 보베일 공립초등학교를 다녔으며, 주 장학금을 받아 노팅검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1901-02 헤이우드 의료기구 공장의 사무원으로 일하다가 폐렴에 걸려 그만둔다.
1902-06 이스트우드에서 교사생활을 거쳐, 국비장학생 시험에 합격하여 1906년 노팅검 대학에 입학한다.
1908-11 1911년 《흰 공작》출간. 단편 〈국화 향기〉발표.
1910년에는 후에 《아들들과 연인들》로 제목을 바꾼 《폴 모렐》집필에 착수한다.
1912 3월에 대학 은사의 아내인 프리다를 만나 6주 후 프리다의 모국인 독일로 함께 도피한다. 두 사람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가 정착한다.
1915 《무지개》출간. 출판되자마자 판매금지를 당한다.
징집대상자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했으나 영국을 떠나려는 허가를 받지 못한다.
1916 콘월 지방에 거주하며 《연애하는 여인들》을 쓰기 시작. 여행기 《이탈리아의 황혼》 출간
1919 종전으로 출국이 가능해져 이탈리아로 떠나 카프리에 정착한다.
1920 《연애하는 여인들》 초판이 미국에서 비공식 출판돼 나온다.
1920-21 장편 《잃어버린 여자》, 미완성 장편 《미스터 눈》, 여행기 《바다와 사르디니아》 및 두 권의 정신분석 관계 책을 쓴다. 《아론의 지팡이》 완성. 단편집 《잉글랜드, 나의 잉글랜드》와 중편집 《무당벌레》에 들어갈 작품들을 개작한다.
1922 스리랑카와 남태평양을 거쳐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 여기서 여름을 보내며 장편 《캥거루》를 집필한다. 9월에 미국으로 가 뉴멕시코에 정착한다.
1923 《미국고전문학 연구》, 《캥거루》 간행. 시집 《새, 짐승, 꽃》 완성. 《날개 돋친 뱀》을 쓰기 시작한다.
1924 〈말을 타고 가버린 여인〉, 〈쓴트 모르〉, 〈공주〉 등의 중단편을 쓴다.
1925 2월에 말라리아에 걸려 거의 죽을 뻔하다. 멕시코시티의 한 의사가 폐병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선고를 내린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투병생활이 시작됨. 수상집 《호저의 죽음에 대한 명상》 간행. 9월 유럽으로 돌아가서 이탈리아에 정착한다.
1926 《날개 돋친 뱀》 간행. 《처녀와 집시》, 《채털리 부인 1차본》을 쓴다. 그림에 심취한다.
1927 《채털리 부인의 연인》의 두 번째 판본인 《존 토마스와 레이디 제인》을 쓴다.
1928 《채털리 부인의 연인》 최종본이 피렌체에서 비공식으로 출판되어 큰 소동이 일어난다.
1929 로렌스의 그림들이 런던의 워런 화랑에서 전시되었다가 경찰에 의해 그날로 전시회가 폐쇄된다. 《쐐기풀》과 《마지막 시들》의 시를 씀. 수상록 《묵시록》의 집필을 시작한다.
1930 의사의 권고로 2월 프랑스 방스의 요양원에 입원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올더스 헉슬리 부부와 프리다가 근처의 한 집으로 옮겼으나 사망한다.
1944 《채털리 부인 1차본》 외설 선고. 11월에 판결 번복된다.
1960 8월에 펭귄출판사에서 무삭제본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영국에서 간행한다. 10월에서 11월에 거쳐 펭귄판에 대한 재판이 행해져 검사측이 패소당한다.
많은 문인과 지식인들이 이 소설의 예술성을 옹호한다.
▣ 참고문헌
〈A Propos of "Lady Chatterley's Lover"〉 로렌스 자신의 작품 해명이자 성과 현대문명에 대한 통찰이 담긴 글. 30면이 넘는 분량으로 Michael Squires가 편한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사판의 부록으로 실려 있고, 로렌스의 산문집 《Phoenix II》에도 수록되어 있다.
손향숙, 〈Lady Chatterley's Lover 연구: ‘관계’의 회복을 통한 참된 ‘삶’의 성취〉서울대학교 대학원, 1993
Michael Squires and Dennis Jackson ed., D.H.Lawrence's‘Lady’: A New Look at ‘Lady Chatterley's Lover’, Athens:GeorgiaUP,1985
▣ 글쓴이 강미숙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대학원에서 로렌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인제대 강사로 출강하고 있으며 영미문학연구회 회원으로 활동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로렌스의 여성관과 ‘새로운 민주주의’의 모색〉, 〈성당 안의 웃음소리〉, 〈작가의 자화상과 담론기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