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는 서른여섯이 되어서도 어머니 로레 발자크에 대한 분노를 완전히 삭이지 못했다. 발자크의 어머니는 생후 얼마 되지도 않은 아들을 시골에 사는 보모에게 보내 버린 뒤 자식을 까맣게 잊었다. 이후 발자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나를 동정할 정도였다”고 고백할 만큼 부모님의 냉대는 여전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발자크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에서 수많은 영감을 얻었고, 거기에서 위대한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골짜기의 백합』도 그 중 하나다. 『골짜기의 백합』에는 허영심에 가득 찬 아이를 제 마음대로 휘두르고 아이의 진심을 나 몰라라 하는 여인이 한 명 등장하는데, 발자크가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삼아 탄생시킨 인물이었다. 지쳐 버린 천재, 엉망이 된 집안, 이는 발자크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 장면들은 소설 속 허구라기보다는 발자크 자신이 처한 현실에 더 가까웠다. 프랑스의 대문호 발자크조차도 불행한 유년기와 못난 부모의 그늘에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위로가 될 리는 없겠지만, 그런 면에서 발자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인물들 중에서는 무섭다 못해 끔찍한 부모를 둔 이들이 적지 않다.
저자는 이 책에서 천재의 부모를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첫째, 자녀를 매질로 다스린 폭군형 부모, 둘째, 자녀를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연습벌레로 키운 교관형 부모, 셋째, 자기 욕구를 해결할 대리인으로서 자식을 이용한 이기적인 부모, 넷째, 자녀를 지나치게 사랑해 집착에 사로잡혔던 부모들이다. 저자의 사실감 넘치는 묘사를 통해 들춰진 세계사 속 부모들의 악행은 흥미진진하다 못해 끔찍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우리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자화상도 발견할 수 있다.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교육열로 어린 자녀들을 일찍부터 교육 시장에 내몰고 있는 부모들, 스스로 못 이룬 꿈을 자녀를 통해 재획득하려고 드는 이기주의자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책의 원제에도 드러나 있듯이 예나 지금이나 괴물 부모들의 변명은 똑같다.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요약)
Chapter1 회초리를 사랑한 폭군형 부모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_ 호두 한 알 때문에 피가 나도록 회초리를 맞다
마르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작은 도시 아이슬레벤에서 일곱 형제의 맏이로 태어났다. 원래 농부였던 아버지는 광산업계에서 더 크게 출세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광부가 된 뒤 단 몇 년 만에 작업책임자로 지위가 상승했다. 그 후 여러 광산 노조의 간부직을 맡고 시 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530년 루터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무렵 남긴 재산은 대규모 농장 두 개를 사고도 남을 만한 액수였다. 마르틴 루터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 루터의 아버지는 성공을 거듭했고, 집안 형편도 점점 나아졌다. 루터가 시립학교에 다닐 무렵(1490년경), 루터 가족의 부유함은 지역 유지에 속할 정도였다.
루터의 어머니 마르가레테는 엄격한 성격에 경건한 신앙심을 지닌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런 강인한 인품이 어린 루터에게 때로 상처를 주기도 했다. 루터는 어머니가 너무도 엄해서 “주눅이 들 정도”였고, “한번은 겨우 호두 한 알 때문에 피가 나도록 회초리를 맞은 적”도 있었다. 루터의 아버지 역시 매를 아끼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한번은 아버지에게 너무 심하게 맞아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버지를 향해 다시 마음을 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훗날 루터는 자신이 수도원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로 어린 시절의 엄한 가정교육을 꼽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부모에 대한 한없는 이해심을 드러내며 이렇게 말했다. “다 내가 잘되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었다. …… 자녀에게는 매를 들어 벌을 주어야만 한다. 단, 그와 동시에 자녀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루터는 시대적 흐름에 얽매여 있었고, 그 때문에 훈육 도구로서 회초리가 지니는 역효과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못했다. 아버지 한스 루터는 광산업에 종사하랴 정치적 활동을 펼치랴 너무도 바빠서 자녀 교육에까지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렇다고 자식에게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한스 루터는 아들을 장차 법률가로 키울 꿈을 품고 있었고, 이를 위해 최고의 교육을 제공했다.
마르틴 루터는 1501년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했고, 4년 뒤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앞만 바라보며 달리는 집중력과 야심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듯했다. 그는 “20대에 아름답지 못한 자, 30대에 강인하지 못한 자, 40대에 현명하지 못한 자, 50대에 부유하지 못한 자는 그 이후에 아무런 희망도 지니지 못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 후 루터는 법학도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는 이제 막 석사가 된 아들에게 반말 대신 존댓말로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아들을 법률가로 만들겠다는 한스 루터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505년 7월, 루터는 방학에 친구와 함께 고향을 다녀오다가 폭풍우를 만났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벼락이 쳤는데 간발의 차로 목숨을 건졌다. 겁에 질린 루터는 그 자리에서 바닥에 엎드려 수호 성녀 성 안나에게 기도했다. 자신을 살려 준다면 수도자의 길을 걷겠노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진위는 확실치 않다.
그 당시 루터는 법학도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졌다. 그는 “법학은 더럽고 탐욕적이다. 최종 목적이 결국 돈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들의 계획을 들은 한스 루터는 당연히 노발대발했고, 이제껏 썼던 존댓말을 즉시 반말로 바꾸었다. 그뿐 아니라 부자간의 연을 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단절된 부자간의 연은 아들이 사제로 임명되었을 때에야 다시 이어졌다. 아들의 서품식에 참석한 아버지 얼굴에는 자부심과 미소가 감돌았다. 한스 루터는 성대한 연회까지 개최했다. 그렇다고 아들에 대한 비난이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었다. 한스 루터는 그 뒤에도 틈만 나면 아들이 너무 고집이 세다며 나무라곤 했다.
한편 마르틴 루터는 수도회에서 악몽 같은 나날을 보냈다. 육체적 금욕 때문이라기보다는 자기 회의나 양심의 가책이 더 컸다. 루터는 수도원 곳곳에서 분노의 하나님, 벌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이 진정 참된 주님일까 하는 의심이 싹텄다.
하지만 루터는 이내 그 모든 의심이 너무나도 이단적이라며 자신을 책망했다.
덴마크의 정신분석학자 파울 라이터는 마르틴 루터가 수도원 울타리 안에서 일종의 정신병을 얻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천둥번개 사건’으로 미루어 볼 때 루터에게는 이미 비현실적 성향이 있었는데, 아버지로 인한 강박 관념까지 더해졌다는 것이다. “루터는 기본적으로 아버지를 늘 자신을 위협하는 그늘로 인식했다”고 라이터는 주장했다. 나아가 스물다섯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수도사인 루터에게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은 고통이 닫힌 사회인 수도회가 주는 압박감보다 더 큰 짐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어차피 교황은 수도원과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수도원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루터에게 가톨릭 교의란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무언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루터를 압박한 것은 아버지 한스 루터였다는 것이다.
라이터의 주장이 옳다면 루터의 종교 개혁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 루터는 가톨릭에서 말하는 진노의 하나님에게 등 돌린 것이 아니라 ‘아들을 벌하시는 진노의 아버지’, 즉 한스 루터에게 등을 돌렸다고 봐야 한다. 독실한 개신교도라면 자신의 정신적 지주이자 삶의 중심인 마르틴 루터를 이런 식으로 폄하하는 데 발끈할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종교개혁을 했다고 해서 루터의 업적이 폄하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사상적 혁명이 ‘정신병자’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는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일반인보다 더 강력한 이상과 용기를 지녔다. 그렇기에 옛것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어차피 위대한 일이 어떤 동기에서 일어나는지는 중요치 않다.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마르틴 루터가 한 일 역시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거대한 업적이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그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했다. 그것은 가톨릭교회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개혁해야 한다는 과감한 요구인 동시에 일종의 도전이었다. 루터의 소원이던 교단 개혁은 이루어졌지만 거기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1521년, 루터는 교단으로부터 추방당했고, 그로부터 얼마 후 제국 추방형까지 선고받았다. 그 시점부터 루터는 제국법의 보호에서 제외되었다. 아무런 죄목 없이도 누구든 그를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작센의 선제후이자 루터의 후원자였던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를 아이제나흐 인근의 바르트부르크로 불러들여 주었다. 그곳의 은신처에 기거하면서 루터는 단 11주 만에 신약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Chapter2 유년기를 강탈한 교관형 부모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_ 잠자는 아들들을 깨워 무대에 세운 아버지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은 부드럽고 따스한 어머니와 욕심 많고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마이클을 추종하는 팬뿐 아니라 수많은 언론 매체도 그 말이 사실이라 굳게 믿는다. 그런데 마이클 잭슨의 어머니 캐서린을 ‘좋은 엄마’, 아버지 조셉을 ‘나쁜 아빠’로 구분하는 방식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캐서린이 어미 사자가 정글의 위험으로부터 새끼를 보호하듯이 자기 자식들을 감싸고 지킨 것은 사실이다. 2005년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도 그녀는 “제가 놓친 게 딱 한 가지 있어요. 바깥세상에 걸맞게 아이들을 대비시키지 못한 일이지요. 나는 아이들을 보호하고 위험을 차단하기에만 급급했어요. 그런데 세상은 너무도 사악하고 잔인한 곳이었어요”라고 말했다.
모성애가 잔뜩 느껴지는 이 고백에는 앞뒤가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인터뷰가 이뤄진 시점은 마이클을 비롯한 여덟 명의 자녀가 아버지 조셉에게 어떤 일을 당했는지 이미 세상에 알려진 뒤였다. 그 보금자리야말로 캐서린이 말한 “사악하고 잔인한 세상”이라는 사실이 모두 드러났던 것이다. 캐서린은 남편의 폭력을 한 번도 말린 적이 없었다. 1990년대 초반, 마이클 잭슨은 “아버지가 우리 머리에 총을 겨누고 러시안룰렛 놀이를 했더라도 어머니는 입 다물고 있었을 거예요”라고 했다. 캐서린은 결국 남편과 헤어졌지만, 아이들이 다 자란 다음의 일이었다. 아이들의 마음에는 이미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마이클 잭슨은 1959년 8월 29일 시카고 인근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홉 남매 중 일곱째였다. 어머니 캐서린은 미국 남부의 작은 도시 출신이었다. 그곳은 ‘명령하는 남자, 복종하는 여자’라는 식의 전통이 남아 있는 보수적인 사회였다. 아버지 조셉의 본업은 철강 공장의 크레인 기사였다. 한때 조셉은 리듬 앤드 블루스 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지만, 곡을 취입해 주겠다는 음반 회사는 하나도 없었다. 조셉은 1950년대 말 로큰롤의 물결이 전 세계를 휩쓰는 동안 자신이 구경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화려한 삶을 사는데 자신은 왜 크레인 기사밖에 되지 못했을까 생각하면 답답하게 짝이 없었다. 결국 조셉은 아이들을 가수로 키우기로 결심했다.
1964년 조셉은 다섯 아들, 즉 재키, 티토, 저메인, 말론, 마이클로 구성된 ‘잭슨파이브’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아들들을 대스타로 키우려는 조셉의 훈련은 엄하다 못해 잔인할 정도였다. 조셉의 인생철학은 ‘승자가 되거나 패자가 되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이었다. 마이클의 형제자매들은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아버지의 인생철학을 되풀이 해 들어야 했다. 일장연설의 마지막은 늘 “피나는 노력을 하는 사람만이 승자가 될 수 있어”라는 문장이었다. 조셉은 아이들을 승자로 만들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오디션과 콘서트에 끌고 다녔다. 그리고 조셉이 아들들과 공유하는 것은 음악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조셉 잭슨은 아이들을 길들이려고 폭력과 더불어 공포감 조성이라는 수단도 활용했다. 한번은 조셉이 아이들에게 밤에 도둑이 들지 모르니 잘 때는 창문을 꼭 닫으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몇 번이나 말을 듣지 않자 어느 날 밤 귀신 마스크를 쓰고 들어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질렀다. 그날 이후 아이들은 절대 창문을 열어 둔 채 잠들지 않았다. 조셉의 방법이 효과를 본 것이다. 대신 마이클은 그날 이후 계속 악몽에 시달렸고, 그때의 끔찍한 경험을 바탕으로 뒷날 괴기스러운 분위기의 〈스릴러Thriller〉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그 뮤직비디오에서 마이클은 늑대 인간으로 등장한다.
형제들 중 마이클은 음악적 재능이 가장 뛰어났고, 덕분에 가족들 사이에서 늘 특권을 누렸다. 그렇다고 마냥 좋은 일은 아니었다. 샘이 난 형들이 마이클의 얼굴에 난 여드름과 납작한 코를 놀려 댔다. 아버지 조셉은 형들을 야단치지 않았다.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마이클에게 욕을 퍼부었다. 마이클의 자만심을 꺾으려고 일부러 더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무대에서 마이클이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 주는 것은 대환영이지만, 지나친 자만심에 빠져서 ‘잭슨파이브 프로젝트’를 망치는 꼴은 두고 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조셉의 전략은 성공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마이클의 자존감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마이클은 자신이 못생겼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괴로워했다. 자신의 모습이 보기 싫어서 세수를 할 때조차도 불을 켜지 않았다. 마이클은 나중에 성형 수술로 코의 크기를 줄여 버렸다.
잭슨 형제들은 놀이터에 가는 대신 오디션을 보았고, 잠을 자야 할 시간에는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애정 어린 손길 대신에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고, 이해심 대신 공포감을 선물 받았다. 제대로 된 성교육 없이 뒷골목 나이트클럽의 추잡한 ‘퍼포먼스’를 통해 성에 눈 떴다. 마이클 잭슨이 훗날 자신에는 유년기가 없었다고 말한 것도, 1980년 후반에 구입한 대저택에 ‘네버랜드 랜치’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원래 네버랜드는 나이 들지 않는 소년 피터 팬이 사는 환상의 세계이다. 마이클은 그곳을 각종 놀이기구와 동물원이 있는 테마파크로 조성한 뒤 자신의 아이들은 물론이고 빈곤층 아이들까지 초대했다. 어린 시절 자신이 누리지 못한 것들을 그렇게라도 상쇄하려 한 것이다.
1993년부터 2003년 사이 검찰은 아동 성추행 혐의로 수차례에 걸쳐 마이클을 기소했다. 첫 번째 사건은 잭슨이 고소인과 2,200만 달러에 합의를 보면서 중단되었다. 두 번째 사건은 재판까지 갔지만 결국 무죄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아동 성추행 스캔들은 팝의 제왕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련이었다. 다행히 잭슨 가족은 모두 마이클을 믿으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특히 캐서린 잭슨은 재판이 진행된 다섯 달 내내 법정의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아들을 마음으로 응원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마이클이 컴백을 준비할 때에도 캐서린은 아들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 주었다. 당시 마이클의 런던 공연을 기획 중이던 매니저 랜디 필립스는 “캐서린은 공연 때문에 마이클이 너무 무리할까 봐 늘 걱정했어요. 과로는 절대 금물이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고 했지요. …… 쉰 살 먹은 아들을 그렇게 걱정하는 어머니는 처음 봤어요”라고 말했다.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마이클은 자신을 위하다 못해 어린아이 취급하는 캐서린의 태도에 오히려 즐거워했다고 한다.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뒤늦게나마 어린 시절의 부족했던 사랑을 보상 받는 것에 대한 기쁨이 컸던 것이다.
Chapter3 자식을 이용한 이기적인 부모
드류 배리모어 Drew Barrymore_ 천부적인 연기 재능과 같이 물려받은 저주의 유산
할리우드 유명 여배우 드류 배리모어의 집안은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파란만장한 가족사를 지녔다. 드류의 전기를 집필한 독일 작가 게오르크 제슬렌은 베리모어 가족이 “연기에 대한 천부적 재능과 더불어 자신과 타인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는 재능까지 타고났다”고 정리했다. 베리모어 집안의 비극적 역사는 존 드류가 출생한 182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52년 존 드류는 각종 코미디에 출연하면서 배우로서 경력을 쌓았다. 존 드류는 주량이 엄청났고, 서른넷의 나이에 요절한 것도 술 때문이었다. 그의 딸 조지아나는 1876년 연극배우인 모리스 배리모어와 결혼했다. 모리스는 틈만 나면 한눈을 팔았고 짬만 나면 술잔을 기울였다. 조지아나가 서른일곱에 세상을 떠난 것도 어쩌면 남편 때문일지도 모른다.
조지아나와 모리스는 세 명의 자녀를 낳았다. 라이오넬과 에델, 존이었다. 그 아이들은 배리모어 가문의 연기 경력에 본격적으로 불을 지폈다. 미국 영화사와 연극사에 배리모어라는 이름을 새긴 것도 그들이었다. 라이오넬과 에델, 존은 모두 1930년대와 1940년대를 풍미하는 배우가 되었고, 중독증을 지니고 있었다. 라이오넬은 모르핀 중독이었고 에델은 알코올 의존증이었다. 존은 신들린 듯한 연기의 비결이 무엇이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탁월한 재능과 상당량의 술”이라고 답했다.
막내인 존 배리모어는 술 마시는 것처럼 쉽게 여자를 갈아치웠는데, 그중 하나가 돌로레스였다. 돌로레스는 딸과 아들을 하나씩 낳았다. 딸은 돌로레스 에델, 아들은 존 드류였다. 존 드류 배리모어는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연기를 하고 약물에 손을 대고 여자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결혼도 네 번이나 했다. 그리고 세 번째 아내인 일디코 자이드 마코와의 사이에서 드류 베리모어가 태어났다. 두 사람은 드류가 태어난 1975년 2월 22일 당시 이미 남남이 된 상태였다. 드류의 아버지 존은 계속 약물을 끊지 못했고 나중에는 정신병원 신세까지 졌다.
사실 드류 배리모어는 어머니 뱃속에서 하마터면 죽음을 맞을 뻔했다. 임신한 아내가 헤어지자고 하자 존은 아이가 들어 있는 아내의 배를 마구 두들겼다. 뱃속 아기가 죽지 않은 것은 오로지 경찰관 다섯 명이 존을 아내로부터 떼어 놓은 덕분이었다. 그 사건 이후 자이드는 집을 나가 웨스트할리우드에 자그마한 아파트를 구하고 일을 시작했다. 자이드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면서도 그녀에게는 딸을 대스타로 만들겠다는 꿈이 있었다. 드류의 몸속에 몇 대째 이어 온 할리우드 명문가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배리모어라는 이름을 달고 태어난 이상 할리우드에서의 성공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적어도 자이드의 생각은 그랬다. 그뿐 아니라 자이드는 자신도 배우로서의 재능을 충분히 지녔다고 믿었다.
그 꿈을 이루려고 자이드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식당 일이 끝나면 할리우드 진출 비법을 캐내려고 이리 저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러다 보니 딸의 얼굴을 볼 시간도 거의 없었고 그맘때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칠 겨를도 없었다. 자이드는 걸핏하면 드류를 이웃집이나 베이비시터에게 맡겼다. 훗날 드류는 어린 시절 자신은 고아나 다름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대박의 꿈’에 집착하느라 가족의 삶을 완전히 망쳐 버린 어머니를 향한 비난도 빠뜨리지 않았다.
자이드는 밤마다 할리우드 주변의 술집을 전전하며 영화계 소식을 주워들었는데 그런 귀동냥 자리에 드류를 데려갈 때도 있었다. 드류는 손님들 사이에서 금세 스타가 되었다. 제대로 말하기도 전에 애교를 부리는 법부터 배웠고 어른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금세 파악했다. 동심을 지닌 순수한 아이가 되기 전에 아이다움을 잃은 ‘애 어른’이 되었다.
드류는 돌이 되기도 전에 광고에 출연했다. 강아지 사료 CF였다. 낯선 환경에 당황한 강아지가 드류의 코를 물었지만 드류는 울지 않고 씩씩하게 카메라를 향해 웃었다. ‘프로 기질’이 그때부터 드러났다. 드류는 두 돌을 갓 넘겼을 때 두 번째로 카메라 앞에 섰다. 《갑자기 다가온 사랑》이라는 제목의 TV 영화였다. 이후 드류는 다양한 배역에 캐스팅되었다. 어른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을 훤히 꿰뚫고 있던 드류에게 오디션 통과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몸속에 배우의 피가 흐르기도 했지만, 갓난아기 때부터 할리우드 술집을 돌며 쌓은 능력과 경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연기 경력이 쌓일수록 드류는 유년기를 잃어 갔다. 친구들이 놀이터에 나가 놀 때 드류는 카메라 앞에서 표정을 바꾸고 포즈를 취해야 했다.
1981년, 드류는 영화《E.T.》에 주인공 엘리엇의 여동생 거티 역으로 출연하면서 온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너무나 간단했다. 금발의 어린 소녀 드류는 영화계 실력자들 앞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 줬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놀라운 것은 어머니인 자이드가 그런 딸에 대해 뿌듯함보다 질투심을 느꼈다는 것이다. 다시 자이드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어요! 나는 천 번도 넘게 배역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실제로 따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런데 딸아이는 몇 차례 몸짓만으로 대작에 출연할 기회를 얻어 냈잖아요!”라고 했다. 경쟁자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었다. 실제로 모녀간에는 라이벌에게서나 느껴질 법한 긴장감이 흘렀다. 하지만 나이도 많고 재능도 뒤처지는 자이드는 그 싸움에서 늘 패자 신세가 되었고 딸의 그림자도 밟지 못한다는 열등의식에 시달렸다. 1995년에는 한 편의 희비극이 벌어졌다. 드류가 《플레이보이》에 누드를 싣자 그로부터 8개월 뒤 50을 앞둔 자이드도 같은 잡지에 자신의 벗은 몸을 선보였던 것이다.
《E.T.》를 계기로 드류는 촉망받던 유망주에서 주목받는 대배우로 발돋움했다. 월드 스타가 된 만큼 캐스팅 제의가 끊이지 않았고 각종 영화에 출연하며 돈방석에 올라앉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드류는 아홉 살 때 처음으로 담배에 손을 댔고 열한 살 때부터는 주기적으로 술을 마셨다. 술은 드류에게 있어 일종의 피난처였다. 그러다가 드류에게 슬럼프가 왔다. 틴에이저가 되자 더 이상 아역을 맡을 수 없었고 비중 없는 조연으로 출연하는 제안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드류는 이제 완전히 술과 약물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열두 살 때 대마초를 피운 소녀는 순식간에 코카인도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가 되어 버렸다.
딸이 구렁텅이에 빠지는 동안 어머니는 대체 뭘 했냐는 비난은 적합하지 않다. 자이드는 ‘늘’ 드류의 곁에 있었다. 촬영할 때든 인터뷰할 때든, 파티에 갈 때든 시상식에 갈 때든 어머니는 늘 동행했다. 그런데 그게 더 큰 화근으로 작용했다. 어딜 가든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어머니로부터 벗어나려고 딸은 점점 더 약물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배우라는 직업의 특성상 대본과 감독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답답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어머니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으니 드류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신적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그때 친구가 되어 준 것이 바로 술과 마약이었다. 술과 마약에서 일시적이나마 해방감을 만끽하던 드류는 어머니를 속이는 기술까지 개발했다. 골든글로브 수상에 빛나는 드류는 너무나 완벽하게 어머니를 따돌렸다.
1988년 6월 28일, 딸의 행실이 드디어 발각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드류는 집까지는 어떻게 왔지만 어머니 앞에서 착한 딸인 척 연기하기에는 술과 약에 너무 취해 있었다. 어머니는 그날로 드류를 약물 치료 클리닉에 입원시켰다. 재활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다시 약물에 손을 대기도 하고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드류는 결국 자신의 가족사를 철저히 분석한 뒤 진심 어린 충고를 해 준 심리 치료사 덕분에 약물을 끊었다. 3개월 뒤 드류는 그곳에서 나와 독립했고 부모와의 관계를 법적으로 단절했다. 1990년 2월, 열다섯 번째 생일을 맞은 드류는 자신이 이제 성인이라고 선포했고 이를 통해 한 번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유년기에 마침표를 찍었다.
1993년, 대중의 머릿속에서 자신의 이름이 거의 잊혀 갈 무렵 드류는 심리스릴러 영화 《도플갱어》에서 어머니를 살해하는 악녀 역할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영화에서 드류가 어머니를 칼로 찌르는 장면은 특별히 간이 작은 관객이 아니라 하더라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참고로 어머니 역할을 맡은 배우는 일디코 자이드였다!
Chapter4 자녀를 너무 사랑한 집착형 부모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_ 평생을 어머니의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한 천재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작센 주의 작은 마을 뢰켄에서 태어났다.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 카를 루드비히 니체는 한 때 궁정 교사로 일하면서 고급스러운 의상과 과도하게 포장된 말투, 귀족들의 예의범절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아들에게도 그런 덕목들을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니체가 네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들로서는 가장 필요한 시기에 아버지를 잃은 것이었다. 훗날 니체는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나중의 삶을 위한 도움과 지침을 상실했다”고 고백했다.
가장을 잃은 니체 가족은 나움부르크로 둥지를 옮겼다. 어린 프리드리히 주변에는 여자들밖에 없었다. 집안에 남자라고는 자기 자신뿐이었다. 어머니와 할머니, 고모 두 명, 하녀까지 모두가 여자였다. 동생이 둘 있었는데 그중 남동생은 갓난아기 때 죽고 여동생만 살아남았다. 프란치스카가 열여덟에 첫 아이를 낳은 어린 엄마라는 사실도 아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다. 프란치스카는 한집에 같이 사는 나머지 여인들에게 비록 나이는 어려도 엄마 노릇을 완벽히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반대로 나머지 여인들은 프란치스카의 자질을 불신하며 프리드리히를 감싸고돌았다. 훗날 니체는 그 여인들의 관심이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싫었고 자기 주변에 성인 남자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고 고백했다.
여인들은 니체를 천재로 길러 냈다. 프란치스카는 어린 아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고, 여섯 살이 되어 소년학교에 입학한 니체는 이미 다 아는 내용들 앞에서 하품만 연발했다. 친구들이 이제 겨우 알파벳과 씨름할 때 니체는 이미 시를 쓰고 유명 작품들을 피아노로 연주했다. 친구들은 그런 프리드리히를 ‘꼬마 목사’라 놀리며 따돌렸다. 그러면서 프리드리히는 쉽게 상처를 받고 또 주는 성격으로 변해 버렸고, 그 성격 때문에 평생을 고독하게 보내야 했다.
주변 사람들은 프란치스카에게 지나친 걱정과 관심이 오히려 아이를 망칠 수 있다며 아이를 좀 풀어 주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프란치스카를 위시한 니체의 보호자들은 그 충고에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죽은 아버지를 들먹이며 아이에게 겁을 주기까지 했다. “네가 행실을 똑바로 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하는 것이다”라는 협박이었다. 프란치스카는 어린 아들에게 다양한 규칙과 규정을 정해 주었다. 거기에는 옷 입는 방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소한 부분까지 모두 정해 놓은 일종의 행동 강령이었다.
‘이렇게 하면 좋겠다’는 식의 걱정 어린 권유가 아니라 명령에 가까운 말투였다. 사실 프란치스카가 아들을 프로이센 식으로 엄격하게 키우려 했던 것은 아니다. 아들이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고 그 때문에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지적하고 해결해 주려 한 것뿐이었다. 실제로 니체는 삶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는데,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이 분명 커다란 원인을 제공했다. 프란치스카는 때로는 희생적으로, 때로는 엄격하게 니체를 기르는 것이 죽은 남편이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그 소명을 실천하기 위해 그녀는 스킨십이나 응석은 일체 허락하지 않았고, 대신 세상 모든 위험으로부터 아들을 보호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거기에 염증을 느낀 아들은 어머니의 품을 떠나 방랑자가 되었다. 본 대학에 입학한 니체는 이후 스승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갔고, 1869년에는 스물넷이라는 젊은 나이로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곳에서 니체는 자발적으로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했고 이후 죽을 때까지 공식적으로는 무시민권자로 남았다. 이후 니체는 끊임없이 거처를 옮겼다. 여름에는 주로 스위스 산악 지대에서 지냈고 겨울이면 제노바나 라팔로, 토리노, 니스 등 따뜻한 곳을 찾아 남쪽으로 떠났다.
세계를 떠도느라 어머니를 만날 시간은 많지 않았다. 두 사람은 편지로만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니체가 드러내 놓고 어머니를 거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머니를 내치는 행위가 곧 결국 자신이 그토록 미화하고 숭배하던 아버지에게 반기를 드는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대신 니체는 펜으로 여자들을 깎아내리기로 결심했다. “여자를 만든 것은 신의 두 번째 실수였다”, “여자들은 빼앗지 않는다. 그들은 훔친다”, “여자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이다. 여자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비결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임신이다”, “여자에게 가겠다고? 그렇다면 채찍을 잊지 말아라!” 등 여자에 관한 니체의 독설은 여기에 모두 나열하기에 지면이 부족할 정도이다. 그리고 모성애에 관해서는 “여자들은 아이들을 통해 지배욕을 충족시킨다. 그들에게 아이란 소유물인 동시에 너무도 당연한 일, 즉 잔소리를 퍼부어도 되는 대상이다. 그 모든 것이 모이면 모성애가 된다. 모성애는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아끼는 마음과 다를 바 없다”라고 정의했는데, 개인적 경험이 다분히 묻어 있는 정의였다.
어머니의 작품에 불과했던 니체는 성인이 된 후에도 사람 대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누군가를 직접 만날 때면 늘 얌전하고 순종적이며 아이처럼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반면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극단적인 허무주의자이자 가치파괴자였다. 니체에게 있어 시민 사회의 윤리란 재능은 없고 비겁한 자들이 최소한 착하다는 칭찬이라도 들으려고 만들어 낸 ‘노예 도덕'에 불과했고, 신이나 종교는 늪과 연못만 남기며 범람하는 호수에 지나지 않았다. 니체의 혁명적 생각과 이론 중 어머니가 소중하게 여기던 가치에서 비롯된 것은 거의 없다. 오히려 어머니로부터 벗어나려는 절망적 몸부림의 산물이었다고 하는 편이 옳다. 아버지를 향한 존경심 때문에 현실에서는 어머니를 완전히 버리지 못했지만 내면적으로는 늘 어머니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1889년 초, 니체는 실신해 쓰러졌고 바젤의 프리트마트 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예나의 정신병원을 거쳐 나움부르크의 어머니 집에 정착했다. 프란치스카는 헌신적으로 아들을 간호했다. 전기 작가인 프리드리히 뷔르츠바흐는 “그녀는 마치 아들이 다시 아기 때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이 대했다. 아들이 자기 이름을 다시 쓸 수 있게 되고 안정을 되찾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그 시절 프란치스카는 아들이 “두려움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사랑스러운 환자, 자꾸만 쓰다듬게 되는 환자이다. 실제로 나는 아이를 자주 쓰다듬어 주는데, 아이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받지 못한 사랑을 성인이 되어서야, 그것도 병든 이후에야 보상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철학자 니체는 ‘너무 늦은 것’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사람들은 집을 다 짓고 난 다음에야 집을 짓기 시작하기 전에 알아야 할 사실들을 깨닫는다. ‘너무 늦었어!’라는 영원한 말이여, 완성된 모든 것들이 지니는 비감悲感이여!”<“18인의 천재와 끔찍한 부모들”에서 극히 일부요약 발췌, 외르크 치틀라우 지음, 역자 강희진님, 미래의창>
▣ 저자 외르크 치틀라우
생물학, 철학, 스포츠의학을 전공했다. 현재 《디 벨트Die Welt》, 《뇌와 정신Gehirn und Geist》 《현대심리학Psychologie Heute》 등의 잡지에서 과학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철학, 심리학, 의학, 식품영양학 등의 분야에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그중 다수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국내에서 출간된 저서로는 『다윈, 당신 실수한 거야!』, 『진화에 정답이 어딨어?』가 있다.
▣ 역자 강희진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독과를 졸업하였다. 현재 프리랜서 번역자이자 각종 국제행사의 통역자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도시 탐정단: 암스테르담의 밤손님』, 『도시 탐정단: 런던의 협박 편지』, 『나이 들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두 주인을 섬기는 하인』, 『여자의 심리학』, 『직관의 힘』, 『작은 벤치의 기적』, 『원리와 개념을 깨우치는 마법 수학』, 『우주 홀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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