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올렌스카 백작 부인)이 불행한 결혼생활을 감당하지 못하고 뉴욕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위선과 허위로 가득 찬 뉴욕 상류사회는 엘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엘렌의 사촌 동생 메이의 약혼자인 변호사 뉴랜드 아처는 불행한 엘렌에 동정심을 갖는다. 외로움을 느끼던 엘렌에게 아처는 유일한 의지가 된다. 차츰 엘렌에게 빠져든 아처는 메이와의 결혼에 회의를 품고 갈등한다. 아처와 엘렌은 서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불가능한 사랑에 함께 번민한다.
아처가 결혼한 후 엘렌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지 못하고 그녀를 찾는다. 그녀는 서로의 처지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요구하고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가야한다고 밝힌다. 그러나 아처는 메이를 버리고 일본으로 도피할 계획을 세운다. 엘렌은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숨어서 해야 하는 사랑 역시 옳은 일이 아님을 아처에게 설득한다. 엘렌은 자신이 뉴욕에 남아 있는 것은 서로에게 견디기 힘든 일임을 깨닫고 유럽으로 떠난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아처는 우연한 기회에 아들과 함께 파리로 여행을 떠난다. 엘렌의 아파트를 찾아간 아처. 그러나 그는 그녀를 찾지 않고 돌아선다.(요약)
제1부
1870년대 초 1월의 어느 저녁, 뉴욕 음악 아카데미에서 <파우스트>가 공연되고 있었다. 뉴랜드 아처는 클럽박스의 벽에 몸을 기댄 채 맞은편 맨슨 밍곳 노부인의 박스석을 훑어보았다. 밍곳 부인은 엄청난 비만 때문에 오페라 극장 출입을 포기한 지 오래였지만, 대신 가족들을 보냈다. 첫줄에는 며느리 러벌 밍곳 부인과 딸 웰랜드 부인이 있었다. 그 뒤에 흰옷을 입고 물방울 꽃을 든 메이 웰랜드가 무대 위의 연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뉴랜드 아처는 그녀를 소유하고 있다는 짜릿한 감정을 느끼며 젊고 아름다운 처녀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의 머릿속은 막연하게나마 신혼여행에 대한 몽상으로 가득했다.
메이 웰랜드가 그에게 ‘호감’(뉴욕에서 처녀가 연정을 허락할 때 쓰는 고상한 표현)을 내비친 것이 겨우 그날 오후였지만, 그의 상상은 이미 약혼반지와 약혼 키스, 그녀를 데리고 고풍스러운 유럽의 매력적인 풍경에 빠지는 장면들로 이어졌다. 그때 노부인의 박스석에 새로 나타난 인물에 대한 사람들의 비난에 가까운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가녀린 몸집의 젊은 여자였다. 아처는 문제의 젊은 여자가 메이 웰랜드의 사촌언니, ‘가엾은 엘렌 올렌스카’라는 것을 알았다. 아처는 그녀가 유럽에 살다가 하루 전에 불쑥 뉴욕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혼에 실패한 그녀를 러벌 밍곳이 데리고 왔다. 아처가 밍곳 부인의 박스석에 다가가자 웰랜드 부인이 사윗감과 악수하면서 말했다. “우리 조카 올렌스카 백작 부인 알지?”
아처는 오페라가 끝난 뒤 보퍼트가의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했다. 보퍼트가의 집은 뉴욕에서는 드물게 무도회장을 갖추고 있었다. 보퍼트는 영국출신인데 미국에 온 뒤로 사업계의 주요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방탕했고 거칠고 전력이 의심스러웠다. 춤이 끝나자 아처와 메이는 약혼한 남녀로서 자연스럽게 온실로 들어갔다. 아처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살짝 키스했다. “사촌 언니 엘렌한테 우리의 약혼을 알렸나요?” 메이가 꿈속에서 말하듯이 물었다. “아니, 그럴 기회가 없었어.” “내가 당신한테 언니에게 알려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해야 해요. 언니는 우리 친척이고, 지금 좀 예민하잖아요.” “물론, 얘기해야지.” 아처는 자신이 불쌍한 엘렌 올렌스카의 평판에 드리운 그림자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메이에게 드러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부터 약혼방문이 시작되었다. 뉴욕의 엄격한 규칙에 따라 웰랜드 부인을 방문한 후 함께 맨슨 밍곳 노부인의 축복을 받으러 갔다. 다행히 올렌스카 백작부인은 집에 없었다. 두 사람의 방문은 예상했던 대로 잘 흘러갔다. 사람들이 적절한 웃음과 감사로 응대하며 기분 좋은 분위기가 이어가고 있을 때 망토 차림의 올렌스카 백작 부인이 들어왔고 그 뒤로 뜻밖에도 보퍼트가 들어왔다. 밍곳 부인은 보퍼트를 반갑게 맞았다. 아처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현관을 나서다가 엘렌에게 말했다. “우리의 약혼을 마담한테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메이에게 혼났습니다. 기회를 놓쳤거든요.” 미소가 올렌스카 백작 부인의 눈에서 입으로 옮겨 갔다. 그러자 얼굴이 더 젊어 보이면서 그가 소년시절에 알던 갈색 머리의 대담한 소녀 엘렌 밍곳의 모습이 드러났다. “물론 알아요. 그리고 정말 기뻐요.”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잘가요. 그리고 나를 한번 만나러 와요.” 그녀가 아처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말했다.
다음 날 저녁 아처 부인의 오랜 친구인 실러턴 잭슨씨가 아처가로 저녁식사를 하러왔다. 아처 부인은 수줍은 성품이라 사교계와 거리를 두고 살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고 싶어 했다. 오래전에 남편을 잃은 아처 부인은 맨해튼 서부 28번가에서 아들 하나 딸 하나와 살았다. 위층은 뉴랜드의 공간이고, 두 여자는 좁은 아래층에서 복닥거리며 살았다. 모녀는 서로를 좋아했고, 아들과 오빠를 소중히 여겼다. 아처는 그런 두 사람을 사랑했다. 연로한 잭슨 씨는 당연히 뉴욕의 소문거리가 된 엘렌 올렌스카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고, 아처 부인과 동생 제이니도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그들 셋은 이제 밍곳 일족과 친척이 될 것을 밝힌 뉴랜드가 저녁식탁에 나타나자 살짝 당황했다. 그들은 보퍼트의 이야기로 말문을 돌렸다.
“보퍼트는 천박한 남자지요. 하지만 신사들과 어울리는 특권이 있으니까요. 오늘 오후에 엘렌이 온 뉴욕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사람하고 같이 5번 대로를 산책하더군요.” “세상에…” 아처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아처는 갑자기 따지고 싶어졌다. “엘렌이 눈길을 끄는 게 뭐가 어때서요?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요? 사람들 눈을 피해야 하게요. 엘렌은 운이 나빠서 결혼을 잘못했고, 그래서 사람들 말마따나 ‘불쌍한 엘렌’이 되었어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숨어살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엘렌을 포로 취급하던 남편에게서 도망치는 걸 비서가 도와주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요? 우리 중 그런 경우를 보고도 모른 체하는 남자가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자 잭슨씨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비서가 엘렌의 탈출을 도와주기만 했다고 알고 있지? 그렇다면 그 남자가 1년 후에도 엘렌을 도와주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어떤가? 두 사람이 로잔에서 함께 사는 걸 본 사람이 있어.” “함께 살면 안 되나요?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 도대체 누구한테 엘렌의 인생을 끝낼 권리가 있다는 거죠? 남편이 창녀들이랑 사는 걸 더 좋아하는데도 엘렌 나이의 젊은 여자를 산 채로 매장시키려고 하는 이런 위선이 저는 지겹습니다.”
그날 저녁, 잭슨 씨가 돌아간 후 아처는 결혼은 안전한 장막이 아니라 미지의 바다로 떠나는 항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이의 순수한 눈망울의 영혼 속에 그가 즐거이 깨워줄 빛나는 감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갑자기 그 솔직함과 순수함이 모두 인위적 산물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메이의 어머니와 숙모들, 할머니 등이 공모해서 교묘하게 만들어낸 창조물 같았다. 결혼을 앞둔 시기에는 그런 생각이 마음속을 떠다니게 마련이었지만, 그것이 그렇게 불편하도록 끈질기고 선명한 것은 분명 올렌스카 백작부인의 부적절한 등장 때문이었다. “망할 올렌스카!” 그녀를 옹호한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러벌 밍곳 부부는 ‘정식만찬’ 초대장을 돌렸다. 초대의 목적은 <올렌스카 백작부인을 소개하기 위해>라고 적었다. 부부는 뉴욕 사교계의 거물들만 완벽하게 선별하여 초대했다. 그러나 48시간 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선약’이라는 변명도 없이 하나같이 <초대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만 쓰여 있었다. 충격이었다. 그러나 밍곳가 사람들은 대범하게 받아들였다. 그런 일이 있은 며칠 후 아처는 어머니와 함께 친척인 헨리 벤 더 루이든 댁을 방문했다. 맨해튼 최초의 네덜란드 총독의 직계후손이자 독립전쟁 전에 프랑스와 영국의 몇몇 귀족 가문과 결혼한 명문가였다.
그들은 메릴랜드의 트러베나와 허드슨 강 연안의 대영지 스쿠이터클리프를 오가며 지냈다. 아처 부인으로부터 밍곳가의 ‘정식만찬’ 이야기를 듣고난 밴 더 루이든 부인은 “아… 안타깝군요. 이런 일은 뉴욕에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람 안타까워했다. 그는 두 친척을 배웅하면서 위엄 있고 부드러운 태도로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밴 더 루이든 부인이 사시사철 타고 다니는 마차가 밍곳 노부인의 집 앞에 섰고 큰 사각 봉투가 전달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봉투에는 밴 더 루이든 부부가 다음 주에 친척 세인트 오스트리 공작을 소개하는 저녁 모임에 올렌스카 백작 부인을 청하는 초대장이 들어 있었다.
뉴욕사람들은 대체로 올렌스카 백작 부인이 ‘미모를 잃어버렸다’는데 동의했다. 아처가 처음 본때는 그녀가 아홉 살 때였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야한다’고 말했다. 그녀가 양친을 모두 잃고 숙모 메도라 맨슨 손에 맡겨져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그 예쁜 아이, 어린 엘렌 밍곳을 사랑했다. 만찬 모임 날 저녁 아처는 올렌스카 백작 부인이 밴 더 루이든가의 응접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이런 사연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뉴욕 사회에서 가장 엄격하게 선별된 이들이 모인 위압적인 만찬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처는 그녀의 미모에 대한 사람들의 평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그녀의 모습은 어릴 때의 밝은 모습은 사라졌지만 매우 세련되고 우아했으며 당당하고 통제된 모습이었다. 그날 저녁 식탁에서 젊은 여자는 올렌스카 백작부인뿐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합류했을 때, 공작은 올렌스카 백작부인과 활기찬 담소를 나누었다. 부인이 한 신사와만 인사를 나누는 것은 뉴욕의 예법이 아니었다. 백작 부인은 여러 신사와 담소를 나눈 후 아처의 곁으로 왔다. “메이 이야기를 해주세요. 메이는 사랑스런 아이예요. 그 아이를 많이 사랑하나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사랑합니다.” 아처가 얼굴을 붉혔다. “그렇다면 사랑에 한계가 있다는 말인가요?” “한계가 있다고 해도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환한 공감의 미소를 지었다. “정말 멋져요!” 그녀의 입술이 떨리는 걸 보았다. “내일 5시 이후에 기다리고 있겠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다른 신사와 담소를 시작했다. 돌연한 그녀의 말에 아처는 당황했다.
아처는 메이에게 올렌스카 백작 부인이 초대-초대라기보다 명령-했다는 사실을 말하려 했지만 어색해질까봐 말하지 않았다. 엘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메이의 특별한 소망이란 것을 알았기에 원한다면 말하지 않고도 사촌 언니를 찾아갈 자유가 있다고 느꼈다. 마담 올렌스카 집 문 앞에서 가장 강력하게 느낀 감정은 호기심이었다. 자신을 오라고 했을 때 그녀의 어조가 못내 의아했다. 그녀가 보기만큼 단순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외출 중이었다. 아처는 벽난로 앞에서 기다렸다. 저물녘에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 그녀는 뭐라고 생각할지 궁금했다. 얼마 후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 보퍼트의 영국식 마차가 보였다. 그녀는 응접실에 아처가 있는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놀라움이란 그녀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감정 같았다.
그녀는 두 팔을 머리 뒤에 대고 등받이에 기댄 뒤 살짝 감긴 듯 한 눈으로 벽난로 불을 들여다보았다. “혹시 시간을 잊었나 했습니다. 보퍼트하고 아주 재미있었던 모양이네요.” 질투심이 솟구쳤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보퍼트 씨와 집을 보러 다녔어요. 왜 사람들은 변두리에 사는 걸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조용하고 점잖은 동네인데.” 그녀는 뉴욕이 얼마나 강력한 엔진인지, 또 어떻게 그녀를 박살내려했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러벌 밍곳가의 저녁 모임이 막판에 이르러 온갖 잡동사니 인사를 긁어모아 때워졌다는 사실을 통해서 그녀 자신이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했는지 깨달았어야 했다. “아처 씨는 나를 도와주셔야 해요. 내가 알아야 할 것들을 일러줄 사람, 너무 오랫동안 봐서 보고도 모르게 된 것들을 다시 보게 해줄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그의 혀끝에 “보퍼트와 같이 마차를 타고 다니지 말아요”라는 말이 맴돌았지만, 그녀의 분위기에 매혹되어서 하지 못하였다.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분이 없나 봐요. 정말로 외로운 건 내 곁에 있는 다정한 분들이 모두 내게 거짓 시늉을 하라는 말밖에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흐느낌 속에 그녀의 가는 어깨가 떨렸다. “엘렌! 아, 그러지 말아요.” 아처는 그녀의 어깨를 안고 위로했다. “뉴욕에서는 울지도 않나요?” 아처는 자신이 <엘렌>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 또렷이 뇌리에 새겨졌다. 그것도 두 번이나.
아처는 집을 나왔다. 뉴욕은 거대하고 긴박하게 다가왔다. 메이 웰랜드는 그 안에서 가장 사랑스런 처녀였다. 그는 그날치의 은방울꽃을 보내려고 꽃집에 들렸다. 노란 장미 다발이 눈에 띄어 메이에게 보낼까했지만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대신 장미를 올렌스카 백작 부인에게 보냈다. 그리고 돌아서는 순간 봉투 안에 넣었던 명함을 도로 꺼냈다. 2주일 정도가 지난 뒤 아처는 회사 대표의 호출을 받았다. 노신사 레터블레어 씨는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올렌스카 백작 부인의 이혼소송 건이 접수되었는데 밍곳가의 사람들이 다 변호사로 아처를 천거하였다는 것이다. 아처는 순간적으로 부아가 났다. 메이의 아름다운 얼굴과 밝은 품성 때문에 밍곳가의 압력을 참아오던 터인데 폭발한 것이다. 왜 그 역할을 해야 하는지 분개했다. “모두가 만류하는데도 백작 부인이 뜻을 굽히지 않고 법정에서 해결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네. 아무래도 다시 결혼할 의사가 있는 것처럼 보여,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아처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레터블레어씨에게 마담 올렌스카를 만나겠다고 말했다.
마담 올렌스카의 응접실에 보퍼트의 외투가 걸려있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돌아가려다가 참았다. 조용히 둘이서만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자신의 탓인줄 알았기에 참은 것이다. 응접실 소파에 반쯤 누운 채 보퍼트와 대화하던 올렌스카 백작 부인이 손을 내밀어 아처를 맞이했다. 그녀가 손등에 키스해주길 바란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말에 볼티모어와 필라델피아로 같이 떠납시다. 별실을 잡아놓았답니다. 피아노도 있고 사람들이 밤새 노래해줄 겁니다.” 보퍼트의 제의에 올렌스카 백작 부인은 거절했다. 그녀는 아처와 할 이야기가 있다며 보퍼트를 보냈다. 아처는 승리감을 느꼈다. “그 일 때문에 왔습니다. 알겠지만 나는 그 회사에서 일합니다.” “그러면 당신이 내 일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러면 훨씬 편해지겠는데요?”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는 자유를 얻고 싶어요. 과거를 모두 지워버리고 싶어요. 도와줄 거죠? 내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알죠? 내가 그 사람하고 어떻게 살았다는 것도?” “서류는 읽어봐서 압니다. 알다시피 남편이 편지에 적었듯이 이 소송에 적극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당신에게 불쾌한 이야기를 할 겁니다. 소문이 나고 당신이 피해를 입도록 말입니다. 뉴욕은 당신이 살던 유럽과 비교하면 아주 좁습니다.” “우리 가족도 그렇게 말해요. 당신 가족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이제 곧 사촌 사이가 될 테니까요. 당신도 우리가족과 같은 생각인가요?” “잔인한 이야기가 무수히 오갈지 모르는데, 그걸 감수할 좋은 보상이라도 있을까요?” “하지만 내 자유는요? 그건 아무것도 아닌가요?” 순간 편지에 적힌 말이 사실이고, 그녀는 비서와 결혼하려고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막대한 불편과 고통을 감수하면서 할 가치가 있을까요? 사람들이 이 일을 어떻게 보는지를 당신이 깨닫도록 도와주는 게 나의 일입니다.” “좋아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게요.” 그녀가 불쑥 말했다. 갑작스런 그녀의 항복에 놀라 어색하게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나는 정말로 당신을 돕고 싶습니다.” “당신은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요. 안녕히 가세요, 사촌.”
아처는 올렌스키 백작의 비난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녀의 집을 나섰다. 지난날 그녀의 ‘비서’라고 표현된 수수께끼의 인물은 아마도 그녀의 탈출을 도운 데 따른 보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는 젊었고 겁에 질렸고 절박했다. 그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녀가 그에게 고마움을 전한 방식이 법과 세상의 눈에 그녀를 흉악한 남편과 동급의 자리에 놓았다는 것이다. 또 그녀는 지금 뉴욕의 자비에 의존하고 있지만, 단순하고 친절한 뉴욕은 관용을 바랄 근거가 가장 빈약한 곳이었다. 그녀의 체념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그는 자신이 불분명한 질투와 동정에 휩싸여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즉시 양쪽에게 그녀가 이 절차의 무용성을 이해하고 이혼 생각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웰랜드 가는 오랜 가족 전통에 따라 세인트오거스틴으로 떠났다. 아처는 일 때문에 동행하지 못했다. 아처가 극장에서 올렌스카 백작 부인을 만났다. “메이가 떠나 있는 동안 뭘 하고 지낼 건가요?” 전날 메이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엘렌한테 잘해 달라’는 부탁이 적혀있었다. “언니는 당신을 좋아하고 존경해요. 언니가 외롭고 슬프다는 것을 잘 알 거예요.” 자애로운 메이. 그녀의 말을 따르고 싶었지만 약혼한 남자로서 마담 올렌스카를 지나치게 옹호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아처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노란 장미를 구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다보니 사무실에 지각을 했는데, 그의 지각이 누구에게도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을 알고 놀랐다. 정교하게 꾸며진 자신의 인생의 무용성에 갑자기 좌절감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왜 메이와 함께 세인트오거스틴에 가있지 않은지 의문이 들었다. 사무실 사환에게 편지를 들려 보내 마담 올렌스카에게 방문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날 꽃집의 유리창 안에 노란 장미 다발이 있는 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 사흘째 되는 날 우편을 통해서 그녀의 편지를 받았다. 벤 더 루이든 부부의 영지인 스쿠이터클리프에서 온 편지였다. 인사말도 없이 다짜고짜 ‘도망쳐왔어요. 당신을 극장에서 본 다음날에요.’ 마담 올렌스카가 왜 도망을 갔단 말인가. 아처는 그녀가 멀리 떠나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또렷한 실망이 몰려왔다.
아처는 스쿠이터클리프로 달려갔다. 그녀는 웃으면서 반갑게 맞았다. “아, 왔군요!” “당신이 무엇을 피해서 도망쳤는지 알고 싶어서 왔어요.”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조금 걸어요. 당신이 날 보호해줄 거잖아요. 당신이 올 줄 알았어요.” “내가 오기를 바랐다는 말이군요.” 그가 이런 바보 같은 말에 어처구니없이 큰 기쁨을 느끼며 말했다. 잠시 후 그녀가 알 듯 말 듯한 냉기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메이가 당신한테 나를 잘 보살펴 주라고 부탁했군요.” “그 부탁 때문에 온 게 아니에요.” 마담 올렌스카는 안락의자 한 곳에 앉았다. “나한테- 편지를 보낼 때 당신은 우울했어요.” “맞아요. 하지만 당신이 여기 있는데 우울 할 수는 없어요. 나는 앞일을 생각하지 않아요. 기쁠 때는 그 순간만 생각해요.” 그 말은 유혹처럼 조용히 아처에게 다가왔다.
뉴욕으로 돌아온 이삼 일이 아주 힘들게 지나갔다. 나흘째 되는 날 올렌스카 백작부인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내일 느지막이 와요. 당신한테 설명할게요. 엘렌.’ 편지에 적힌 글은 그게 전부였다. 그는 들뜬 상태에서 그녀의 편지를 여러 번 읽으며 밤을 지새웠다. 거기에 답을 하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었고, 그는 각각의 방법을 꼼꼼히 생각해 보았다. 아침이 왔을 때 그는 메이가 있는 세인트오거스틴으로 떠나는 배를 탔다. 아처는 웰랜드 부인에게 결혼 날짜를 앞당겨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부인의 마음을 움직일 어떤 논거도 생각해내지 못했으므로 세인트오거스틴을 떠나기로 한 전날, 메이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무엇 때문에 1년을 허송해야 하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아내로 삼기 원하는지 모르겠어?”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어요. 그건 혹시 당신이 그때까지 나에게 애정을 품고 있을 자신이 없어서인지도 모르죠. 혹시 다른 사람이 있나요? 만일 사실이라면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거예요.” “메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는 소리쳤다. 그녀는 기품 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들며 덧붙였다. “사실이면 말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당신이 실수한 걸 수도 있어요.” “내가 실수를 했다면, 이렇게 결혼을 서두르자고 하겠어?” “네, 당신은 그 문제를 그렇게 해결하려 할지도 몰라요. 나는 다른 여자에게 불행을 안기고 내 행복만 찾을 수는 없어요. 혹시 그 여자에게 어떤 식으로 약속한 게 있다면… 만약에 약속을 지킬 방법이 있다면… 그게 그 여자 분을 이혼시키는 것이라도… 뉴랜드, 나 때문에 그 사람을 포기하지 말아요.” 아처는 강력하게 부정했다. 그러자 메이는 기쁨으로 얼굴을 붉히고 그의 품에 안겼다.
세인트오거스틴을 떠날 때 아처는 밍곳 노부인에게 전할 전언을 잔뜩 받았기 때문에 곧 부인을 방문했다. 부인은 올렌스카 백작 부인을 설득해서 이혼을 포기시켜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내 자손 가운데 나를 닮은 건 엘렌뿐이야. 그런데 자네는 왜 엘렌이랑 결혼하지 않았지?” 아처가 웃었다. “엘렌이 여기 없었으니까요.” “그래. 안타까운 일이야. 늦었지. 그 아이의 인생은 끝났어. 아! 여기 엘렌이 있어.” 부인이 소리치자 마담 올렌스카가 휘장 뒤에서 걸어 나왔다. “당신이 어디갔는지 궁금해서 아처 부인을 찾아갔었어요. 편지의 답장이 없어서 말이죠. 몸이 아픈 건 아닌지 너무 너무 걱정했어요.” 아처는 떠나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마담 올렌스카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답장 받지 못한 편지에 대한 언급을 바라고 있다는 걸 느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죠?”아처가 물었다. “당신이 좋을 때요. 언제든 오세요. 기다릴게요.” “내일 저녁은 어때요?” “좋아요, 하지만 일찍 오세요. 외출하거든요.”
다음 날 마담 올렌스카의 집을 방문했을 때 손님이 있었다. 엘렌의 숙모인 맨슨 후작 부인과 카버 박사였다. 후작 부인은 아처를 한쪽 구석으로 이끌더니 낮고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불쌍하고 어리석고 정신 나간 올렌스키. 나더러 엘렌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고 그 아이를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어. 여기 편지도 가져왔거든.” “말도 안돼요!” 아처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엘렌은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어. 물질적으로 부족한 게 없는 백작이 그렇게 돌아오라고 해도 고집을 꺾지 않으니. 자네가 나를 좀 도와서 엘렌을 설득할 수 없겠나?” “그곳으로 돌아가라고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겁니다.” 아처가 격하게 소리쳤다. “그러면 아처 씨는 그편을 선호한다는 거지? 어쨌건 결혼은 결혼이고, 내 조카딸은 아직 그 사람의 아내니까...” 이층에서 내려온 마담 올렌스카가 날카롭게 물었다. “두 사람이 무슨 모의를 하는 거예요, 메도라 숙모?” 마담 올렌스카는 후작 부인을 현관까지 배웅하고 돌아왔다. “숙모님이 제 이야기를 했을 것 같았어요. 뭐라고 그래요?” “백작이 당신을 설득해서 도로 유럽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더군요. 숙모님은 당신이 돌아갈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나와 관련해서 사람들은 잔인한 일들을 많이 믿죠.”
마담 올렌스카에게 아처는 메이에게 결혼을 앞당기자고 했던 일을 이야기했다. “메이는 나한테 시간을 주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자기를 좋아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서두른다고 믿기 때문이죠.” “메이를 포기하고 다른 여자를 선택할 시간을요?” “내가 원한다면요.” “바보 같은 생각이에요. 그 다른 여자, 그 여자도 당신을 사랑하나요?” “아, 다른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왜 서두르는 건가요?” 그때 엘렌이 타고 갈 마차가 도착했다. “같이 안 갈래요?” 아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자기 곁에 두어야 한다고, 그녀가 그날 저녁 자기 곁을 떠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느꼈다. “솔직히 말하면 메이의 짐작은 옳았습니다. 저에게 다른 여자가 있어요.” 엘렌 올렌스카는 대답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잠시 후 그는 그녀 옆에 앉아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그에게서 몸을 떼고 저편으로 갔다. “나한테서 사랑을 구하지 말아요! 그랬던 사람이 너무 많아요.” 그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은 그녀가 아처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비난이었다. “나는 당신한테 사랑을 구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하지만 만약 상황이 허락했다면 내가 결혼했을 사람은 당신입니다.” 그가 말했다. “상황이 허락했다면 이라고요? 하지만 상황을 불가능하게 만든 건 당신이잖아요.” 그녀는 울음이 차오른 아이처럼 입술을 떨면서 소리쳤다.“이혼을 포기하게 만든 건 당신이잖아요. 가족이 추문에 휘말리지 않게 하라고요! 메이를 위해서 당신을 위해서 하라는 대로 했어요. 아! 내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게 당신 때문이란 걸 전혀 숨기지 않았는데.” 그녀는 소파에 쓰러졌다. “적어도 나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그가 말했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엘렌, 울지 말아요. 돌이킬 수 없는 일은 하나도 벌어지지 않았어요. 나는 아직 자유롭고, 당신도 자유를 얻을 거예요.” 그는 그녀를 안고 젖은 꽃 같은 그녀의 얼굴에 입술을 댔다. 그녀도 그의 키스에 응답했다. 잠시 후 그의 품에 안겨있던 몸이 뻣뻣해지더니 그를 옆으로 밀고 일어섰다. “달라지지 않아요. 그러면 안돼요. 당신은 메이하고 약혼했고 나는 결혼한 여자예요.” “우리 사이에 이런 일이 있고 난 뒤에도 내가 메이하고 결혼하는 게 상상이 됩니까?” 그의 표정이 결연하게 바뀌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건 그게 진실이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그렇게 말하는 게 가장 쉽기 때문이에요. 사실 우리는 각자가 이미 결정한 것 이외의 다른 일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그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그녀의 구두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허리를 굽혀 그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는, 너무 그윽해서 그가 꼼짝도 할 수 없는 눈길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지금껏 한 일들을 거스르지 말아요! 내가 이제 와서 다른 생각을 할 수는 없어요. 나는 당신을 포기해야만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요.” 그녀가 소리쳤다. “메이는 나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뭐라고요? 결혼을 앞당기자고 무릎 꿇고 애원하고 돌아온 지 사흘 만에요?” “메이가 거절했어요. 그러니까 나한테는 권리가 있어요. 우리가 지금 이러면 앞으로도 더 나빠져요. 모두에게 더욱.”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녀는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 했다. 그때 전보가 왔다. 메이로부터 온 전보였다. 마담 올렌스카가 미소를 짓고 노란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봉투를 개봉하고 램프 앞으로 갔다. 그녀는 다 읽은 후 아처에게 건넸다. ‘엄마 아빠가 부활절 뒤에 결혼 허락, 뉴랜드에게도 전보 보낼 예정. 말할 수 없이 기쁘고 언니를 사랑해. 늘 감사하는 메이.’ 30분 뒤 아처가 자기 집 현관문을 여니, 똑같은 봉투가 우편물과 함께 놓여있었다. 아처는 노란 종이를 구겼다. 그렇게 하면 거기 담긴 소식을 무효로 만들 수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제2부
뉴랜드 아처 부부는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뭉뚱그린 표현으로 “더없이 행복했다”고 말한 석 달 동안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결혼에 대한 아처의 생각은 전통에 순응하고, 다른 친구들이 아내를 대하듯 메이를 대하는 것이 그가 매인 데 없던 총각 시절 철없이 품었던 이론을 실천해 보는 것보다 덜 피곤했다. 자신이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아내를 해방시키려고 하는 일은 무용한 일이었다. 신혼여행 동안 두 사람의 발걸음이 약간씩 어긋났다고 해도, 익숙한 환경으로 돌아온 뒤에는 다시 조화가 회복되었다. 그녀는 그가 기대한 모든 것을 충족시켜주었다. 뉴욕에서 손꼽힐 만큼 아름답고 인기 있는 젊은 여자의 남편으로 사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뿌듯한 일이었다. 결혼 전 그를 사로잡은 순간적인 광기는 그가 폐기한 실험의 마지막 시도로 여기기로 했다. 그가 제 정신으로 올렌스카 백작 부인과 결혼을 꿈꾼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었고, 그의 기억 속에 그녀는 가장 애처롭고 통절한 유령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만나고 1년 반이 지나는 동안, 그는 올렌스카 백작 부인 이름을 자주 들었고 그 사이에 일어난 그녀 인생의 주요 사건들도 잘 알았다. 그녀가 워싱턴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처는 보스턴에 도착했다. 엘렌이 보고 싶어서 전날 메이에게 출장갈 일이 있다고 둘러댔다. 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아처는 파커하우스로 향했다. 그는 커먼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무 아래 첫 번째 벤치에 그녀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아!”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일 때문에 여기 왔습니다.” “나도 일 때문에 왔어요. 나는 상당한 액수의 돈을 돌려받지 않겠다고 했어요. 내 소유였던 돈을요.” “그래서 여기 나와서 다시 생각해보는 건가요?” “그냥 바람쐬러왔어요. 호텔은 답답해요. 나는 오후 기차로 포츠머스로 돌아가요. 당신은 변하지 않았네요?” 아처는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변해 있었다고 말하려다 참았다. 대신 증기선을 타고 바닷가로 옮기자고 제의했다. “내가 여기 온 일이란 당신을 찾는 거였어요. 당신이 보고 싶어 참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아처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배의 의자에 나란히 앉고 보니,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할 말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그들의 할 말은 이렇게 세상 바깥에 떨어져 나온 축복된 침묵 속에서 가장 잘 전달되었다. 배에서 내려 둘만의 시간을 기대하고 들어간 여관의 썰렁한 식당에는 젊은 남녀들이 시끄러운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둘은 식당을 피해 방을 하나 얻었다. 방에는 바다가 보이는 긴 베란다가 있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남녀에게 이보다 더 꾸밈없는 공간은 없었다. 아처는 맞은편에 앉은 마담 올렌스카의 얼굴에 희미하지만 즐거운 미소가 떠오른 것을 보고 그녀가 안심하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그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한테… 아주 솔직하고 싶어요. 그리고 나한테도요. 당신은 나한테 큰 영향을 미쳤어요.” 아처가 말을 잘랐다. “그러면 당신이 내게 미친 영향은 어떤 것 같은가요?”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신한테요?” “그래요. 내가 당신에게 미친 영향보다 당신이 내게 미친 영향이 더 크니까요. 내가 어떤 여자랑 결혼한 것은 다른 여자가 그렇게 하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나는 견디고 있으니까.”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당신도, 지금까지 당신도 내내?” 그에 대한 대답으로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넘쳐 흘러내렸다. 그에게 허무감이 밀어닥쳤다. 두 사람은 지금 세상에서 안전하게 격리된 채 서로의 곁에 있었다. 그렇지만 서로 지구 반대편에 있다 해도 무방할 별개의 운명에 묶여 있었다. 그녀는 더없이 또렷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약속할게요, 엘렌. 당신이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않는다고요. 우리가 이렇게 똑바로 볼 수 있는 한은요.” “당신에게 너무 가혹한 인생이에요.” “하지만 당신 인생의 일부가 된다면 상관없어요.” “그리고 내 인생이 당신 인생의 일부가 되고?” 그녀는 슬픔에 휩싸였다. “그게 전부인가요, 우리 두 사람에게?” 아처가 말했다. “그러면 그게 전부 아닌가요?”
마담 올렌스카를 만나고 돌아온 아처는 또다시 워싱턴에 갈 계획을 세우고 워싱턴에서 소송이 시작되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소송은 미루어졌다. 어찌 되었든 아처는 다음 날 떠나기로 결심을 굳혔다. 메이가 알 리도 없었고 더 이상 마담 올렌스카와의 만남을 미룰 수 없었다. 그녀가 그리웠고 해야 할 말도 너무 많았다. 다음 날 출근을 했을 레터블레어 씨가 심난한 얼굴로 있었다. 보퍼트가 파산한 것이었다. 그의 파산은 월 가 역사에 손꼽힐 만큼 불명예스러운 사건으로 남게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 때 사무원이 아처에게 메이로부터 온 편지를 전했다. 할머니가 보퍼트 사건을 전해 듣고 뇌졸중을 일으켰으니 속히 집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크게 걱정할 상태는 아니었고, 엘렌에게 전보를 치라고 덧붙이고 있었다. 할머니의 상태를 알리기 위해 심부름꾼이 모두 나가고 없었기에 아처가 대신해 전신 사무소로 달려갔다.
마담 올렌스카에게 전보를 친 지 24시간 만에 다음날 저녁 워싱턴에서 도착한다는 답신이 왔다. 아처는 자신이 마중 가겠다고 나섰다. 그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마침내 마담 올렌스카가 도착했다. 둘은 함께 메이의 마차에 올랐다. “내가 나올 줄 몰랐지요?” “네 몰랐어요.” “원래는 당신을 만나러 워싱턴에 갈 생각이었어요.” “아!” 그녀가 탄성을 질렀다. “나는 당신을 만날 때마다 모든 게 새로워요. 혹시 당신도 그런가요?” 그녀가 창밖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가 예쁘네요. 메이의 마차인가요?” 그녀가 창문에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러면 나를 마중하라고 당신을 보낸 것도 메이겠군요. 정말 고운 애예요.” 마차가 흔들려서 서로의 몸이 맞부딪쳤다. “우리가 함께이면서도 함께가 아닌 이런 식이 영원할 수는 없다는 걸 알겠죠? 오늘 마중 나온 것은 잘못이에요.” 그러더니 그녀는 몸을 돌려 그를 끌어안고 그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포갰다. “나는 당신 곁에 이렇게 차분히 앉아 있을 수 있어요. 내 마음에 있는 다른 환상이 실현되기를 기다리면서요.” 아처가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속삭이듯 물었다. “다른 환상이 실현되기를 바란다는 게 무슨 뜻이죠?” “결국 그렇게 된다는 거 당신도 알지 않아요?” “우리가 함께 살게 된다는 거요? 정말로 훌륭한 장소를 골라서 그런 말을 하는군요.”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내 아내의 마차라서? 그럼 내려서 걸어요.” 그녀는 다시 웃었다. “걷지 않겠어요. 할머니 댁에 빨리 가야 하고, 당신하고 나는 나란히 앉아서 환상이 아닌 현실을 보게 될 거예요.” “나에게 유일한 현실은 이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당신의 정부로 살아야한다는 건가요, 당신의 아내는 될 수 없으니?” 그녀의 물음에 그는 당황했다. “나는 당신하고 그런 범주들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로 달아나고 싶어요. 우리에게 전부가 될 수 있는 곳 말이에요.”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웃었다. “맙소사, 그 나라가 어딘가요? 가봤어요? 나는 그 나라를 찾으려했던 사람들을 많이 알아요. 그러나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노변 역에서 내리는 실수를 저질렀어요. 자신들이 떠나온 곳과 조금도 다르지 않고 더 협소하고 더 음침하고 문란한 곳들로요.” 마차는 42번가를 지났다. “그러면 당신은 우리 일을 어떻게 계획하고 있는 겁니까?” 아처가 물었다. “우리일이요? 이제 우리는 없어요! 우리는 서로에게 떨어져있어야 가까워질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를 믿는 사람들을 속이고 행복을 찾으려는 엘렌 올렌스카의 사촌 제부 뉴랜드 아처와 아처의 사촌 처형 엘렌 올렌스카가 될 뿐이에요.” 순간 그가 갑자기 마차를 세우고 뛰어내렸다.
엿새인가 이레인가가 지났지만 아처는 마담 올렌스카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엄중히 경호되는 캐서린 노부인의 침대 맡에서 그녀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던 어느 날, 메이가 맨슨 밍곳 부인이 보고 싶어 한다고 즐거운 기색으로 그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캐서린 노부인이 자기 남편을 인정해주는 걸 기뻐했다. 부인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내 꼴이 흉하지?”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하지만 엘렌만큼 아름답지는 않아. 지난번 데리고 오던 날 그 아이가 그렇게 아름다웠어? 네가 그렇다고 말해서 그 애가 너를 길에다 내려놓은 거야?” 부인은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그 애가 너하고 결혼했더라면 좋으련만, 나는 늘 그 애한테 그렇게 말했지. 그랬으면 내가 이 모든 걱정을 덜었을 거라고. 하지만 누가 할미의 걱정을 덜어 줄 생각을 하겠어?” 아처는 병 때문에 부인의 정신이 흐려진 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제 결정됐어. 엘렌은 내 곁에 있을 거야. 식구들이 뭐라고 하건!” 부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아처의 혈관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고통을 느껴야하는지 기쁨을 느껴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 시간 전 밍곳 부인 집의 초인종을 울릴 때까지만 해도 아처는 자기 앞에 놓인 길은 아주 선명하다고 생각했다. 마담 올렌스카와 단둘이 그녀가 원한다면 더 멀리 어디까지라도 갈 생각이었다. 그의 공상은 일본으로 기울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어딜 가건 그가 따라간다는 걸 알 것이다. 메이에게는 편지를 남겨 이별을 통보하고 일체의 다른 가능성을 차단할 생각이었다.
다음 날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마담 올렌스카를 만났다. “나는 이런 식으로 당신을 몰래 만나는 일은 원하지 않는다고 지난 번 말했습니다. 이건 나쁜 일이에요.” 그녀의 속눈썹으로 눈물이 흘러 베일 망에 맺혔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는 위험이요. 우리 제발 다른 사람들처럼 되지 말아요!” 그녀가 하소연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하고 똑같은 욕망과 똑같은 열망에 시달리고 있어요.” “그러면 내가 일단 당신한테 갔다가 집으로 돌아갈까요?” “그게 무슨 뜻이지요?” “남편한테 가는 거요.” “내가 그러라고 대답할 거 같은가요? 내가 당신하고 같이 떠나자고 했잖아요!” 그녀는 고통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살면서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의 삶을 망치자고요? 내가 새 삶을 살도록 도와준 사람들을요? 어쨌건 우리는 우리만의 삶이 있어요. 불가능한 걸 시도하는 건 소용없어요.” 그는 그녀의 창백해진 얼굴에 깊은 내면의 빛이 차오르는 것을 보았다. 경외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사랑이 이렇게 눈에 보이는 일을 이전까지 겪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늦겠어요, 이만 안녕히...아뇨, 더 이상 따라오지 말아요.”
다음날 아처는 메이에게 모든 것을 밝히고자 했다. “당신한테 할 말이 있어...나 자신에 대해서...마담 올렌스카와 나는…” 메이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오늘 밤 우리가 왜 언니 이야기를 해야 하죠? 모든 게 다 끝났는데. 언니는 이제 곧 유럽으로 돌아갈 거예요. 할머니가 다 이해하고 승인해줬고, 남편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살 수 있도록 준비도 해주고.” 아처는 온 몸에서 기운 빠져 혼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귀 속이 왱왱 울려서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메이가 엘렌으로부터 온 편지를 보여주었다. “메이, 이제 유럽에 돌아가면 나는 혼자 살거나 아니면 가엾은 메도라 숙모하고 살아야 할 거야. 다음 주에 배를 탈 거야. 내가 떠나면 할머니한테 잘해 드려. 엘렌. 추신: 만약 누가 내 마음을 바꾸어 놓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완전히 헛수고라고 전해줘”
뉴랜드 아처는 동부 39번가의 서재에 있는 탁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대부분 그 방에서 일어났다. 26년 전에 거기서 아내는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수줍게 밝혔었다. 메이가 막내를 간호하다 폐렴이 옮아서 갑자기 죽었을 때 그 방에서 그는 진실로 애통해했다. 그들이 함께한 오랜 세월은 결혼이 설령 지루한 의무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의무의 위엄을 지키기만 한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처는 아들과 함께 파리를 여행했다. 아들은 파리에 올 때면 마담 올렌스카를 만나고는 했다. 아들은 짓궂게 그녀가 누구인가를 물었지만 친척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에게 돌아가지 않았고 몇 해 전 남편이 죽었을 때도 사는 법을 바꾸지 않았다. 이제 그녀와 아처를 갈라놓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들과 함께 마담 올렌스카를 방문하기로 약속한 날, 아처는 아들만 올려 보내고 그녀의 아파트에 올라가지 않았다. 현실의 마지막 그림자가 힘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계속 거기에서 머물게 했다. 어둠이 깔리자 아처는 혼자서 천천히 호텔로 돌아갔다.<“순수의 시대”에서 극히 일부요약 발췌, 이디스 워튼 지음, 북코스모스출판사>
▣ 저자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 1862~1937)
1921년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 이디스 워튼의 대표작. 이 작품은 출간 직후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리며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세 차례에 걸쳐 영화화되었다. 세 남녀의 삼각관계를 통해 욕망과 도덕, 이성과 감정, 전통과 변화 사이의 대립과 융합을 그려냈다.
1862년 1월 24일 미국 뉴욕 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이디스 뉴볼드 존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1866년 남북전쟁 이후 온 가족이 유럽으로 이주하여 1872년까지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독일 등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가정교사 밑에서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공부했으며 아버지의 서재에서 문학과 철학, 과학과 예술에 관한 책을 광범위하게 읽었다. 이 시기는 워튼의 예술적 안목과 세밀한 관찰력을 갖추는 바탕이 된다. 1876년 첫 중편소설 “제멋대로”를 습작한 것을 시작으로 1878년에는 시집 “시편들”, 1880년에는 당대 미국 최고 권위의 문예지 《애틀랜틱 먼슬리》에 다섯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1885년 작은 오빠의 친구인 에드워드 로빈스 워튼과 결혼하였으나, 여행을 좋아한다는 점 외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는 에드워드와의 열정 없고 불행한 결혼생활은 결국 1913년 28년 만에 이혼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워튼은 건축가 오그던 코드먼과 함께 쓴 “주택장식”을 출간하였으며, 이것이 정식으로 출간된 그녀의 첫 저서이다. 그 후 첫 번째 소설집 『크나큰 선호』, 장편소설 『환락의 집』을 통해 서서히 작가로서 명성을 쌓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많은 작가들이 세계에 대한 환멸 속에 쾌락을 추구하는 이른바 <재즈시대>에 빠져 들었을 무렵, 이디스 워튼은 오히려 차분하게 공동체의 가치와 그 안에 속한 개인의 성장을 성찰하는 『순수의 시대』를 발표한다. 워튼은 이 작품으로 이듬해에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을 받는다. 1924년, 1934년, 1993년 세 번에 걸쳐 영화화되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이선 프롬』, 『여름』, 『옛 뉴욕』 등이 있고, 40년 동안 장편소설 22권, 단편소설집 11권, 여행기와 전기를 포함한 논픽션 9권 등 수많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1937년 8월 11일, 75세의 워튼은 심장마비로 사망해 베르사유의 고나르 묘지(cimetiere des gonards)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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