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과 같기도, 다르기도 한 사상
그의 사상에는 플라톤 철학이 많이 포함돼 있고, 그 역시 플라톤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친화성을 자주 역설했지만, 그 가운데 하느님이 만물을 무(無)에서 창조하셨다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독특한 교의다. 플라톤의 창조는 근원이 되는 물질을 가상하고 신이 이에 대해 형상(形相)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은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신은 조물주라기 보다는 위대한 기술자요, 건축가라 할 수 있다. 질료는 영원한 것이며, 창조된 것이 아니고, 단지 형상만이 신에 의해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가 무에서 창조된 것이며, 물질까지도 신이 창조한 것이라고 했다. ‘세계가 왜 좀더 일찍 창조되지 않았는가’혹은 ‘신은 세계창조 이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나’ 라는 질문에 대해 그는 시간도 세계가 창조될 때 함께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보다 일찍’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고 대답한다. 신에게는 이전이나 이후가 있을 수 없고, 영원한 현재만이 있을 따름이다. 신에게는 모든 시간이 동시적으로 있고, 신은 영원히 시간의 흐름 밖에 있다.
한편 그는 정욕 때문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으면서 그 고통을 철학적으로 해명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악은 무질서한 사랑에서 나온다고 결론지었다. 인간은 무한하고 불변하는 기쁨을 위해 창조됐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은 무한자인 신에 의해서만 궁극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도록 정해져 있다. 그런데 무한하고 불변하는 아름다움과 기쁨 대신에 유한하고 변화하는 대상을 사랑하면, 그 대상이 실제로 줄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기대를 하게 되고 그 결과 영혼은 심각한 상처를 입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는 먼저 신을 사랑해야만 인간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고, 의지가 불변(不變)의 선(善)에 고착될 때 축복받은 삶을 발견할 수 있다.
<“고백록 Confessiones”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 저 자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354∼430)
교부철학 자체로 일컬어지는 그리스토교 철학의 대부. 이 책을 통해 방탕했던 젊은 시절을 참회하고 그리스도교인으로 거듭났다.
교부철학 자체,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부철학 자체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토대를 구축했고, 중세철학 전반에 영향을 미쳤으며, 사람들이 흔히 그를 서양의 스승이라고 할만큼 그의 사상은 그리스도교 철학의 최고봉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54년에 당시 로마의 북아프리카 식민지 누미디아(지금의 리비아)의 타가스테에서, 이교도 아버지와 독실한 그리스도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로마제국 말기의 시대적인 분위기에 젖어 그는 사춘기를 방탕하게 보냈고, 15세부터 법률가의 꿈을 안고서 타락한 항구도시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행실을 가르치려 했으나 그는 이 종교의 신앙과 도덕을 다 내던져 버리고 18세 때에 이미 한 여자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고 10년 동안 동거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불타는 지식욕과 뛰어난 재능으로 공부에도 전념했으며 수사학에서 뛰어난 학생이 되기도 했다. 수사학을 배우러 로마에 머물던 19세에는 여러 철학자들의 글을 담은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서 철학과 지혜에 대한 동경에 빠져들게 됐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그는 마니교에 빠져 28세가 될 때까지 거기에 얽매였다. 마니교는 페르시아에서 생겨 로마에 들어온,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로 일컬어졌지만, 사실은 일종의 이교(異敎)다. 마니교도들의 교리에 따르면, 우주 안에는 두 개의 근본 원리(빛과 어두움, 신과 물질)가 대립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일종의 세계영혼이요 구원자이지만 인격은 아니라고 한다. 또한 인간은 빛으로 구성된 영혼과 어둠으로 구성된 육체 사이에서 숙명적으로 갈등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의 이원론이, 선한 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 속에도 악이 존재한다는 모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주는 것으로 간주해서 마니교에 끌리게 됐지만, 그들의 교리가 포함한 논리적 모순과 교주의 무식함을 깨닫고 차츰 거기서 떠나게 된다.
마니교에서 그리스도교로 전향
수사학 공부를 끝내자 그는 타가스테와 카르타고에서 웅변교사로서 정착하다가, 그후 로마를 거쳐 밀라노에서 웅변교사로 생활했다. 밀라노에 와서 플라톤학파의 저서들을 접하게 됐을 때, 그는 물질적 세계 외에 정신과 관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특히 마니교의 교리와는 달리 신이 비물질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가 암브로시우스(밀라노의 주교)의 말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정신성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됐을 때, 그는 마음 속에서 근본적인 전향을 하게 된다. 세상 욕심과 신에 대한 헌신 사이에서 오랫동안 갈등을 겪다가 마침내 회심하고서 그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밀라노 근처의 시골별장으로 물러나, 새로운 사상을 깊이 생각해본 후 암브로시우스에게 영세를 받아 완전히 그리스도교인이 된다.
그후 1년 뒤 그는 타가스테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일종의 수도원을 창설하고 저작활동에, 특히 마니교와 정신적으로 대결하는 데 모든 시간을 보낸다. 그는 37세에 사제(司祭)로 서품되고, 41세에는 힙포의 주교가 되어 34년 동안 주교로서 봉사하면서 틈나는 대로 글을 써서 113종의 책과 논문, 200여통의 편지, 500회의 설교를 남겼다. 반달족이 그가 주교로 있는 도시를 점령했을 때도 그는 손에 붓을 들고 있었다. 그가 죽은 뒤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반달족이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 뒤에도, 그의 저작은 계속해서 살아남았으며, 항상 서양의 철학과 종교적인 정신의 으뜸가는 원천이 되고 있다.
<어린 대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