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과 칠정: 인간의 본성이 발현되는 이념적 특면과 현실적 측면
사단이란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주는 네 가지 단서를 말하며, 칠정이란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을 말한다. 그런데 사단과 칠정은 서로 중첩되기도 하고 구분되기도 하기 때문에 크나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조선조 500년 동안 사단과 칠정은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성선설을 바탕으로 하는 유교는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선한 본성은 구체적으로 네 가지 덕목으로 구분되는데 그것이 사덕, 즉 인의예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네 가지 본질적인 덕목은 네 가지 단서를 통해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네 가지 단서란 남의 불행을 보고 측은해 하는 마음, 불의를 보면 수치스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 시비를 따지는 마음을 일컫는다. 인간이 표출하는 이런 구체적인 네 가지 마음을 통해 인간 안에 본질적으로 사덕이 갖춰져 있음을 우리는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바로 맹자가 주장한 부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주희에 의해 촉발된다. 그는 사덕이 사단으로 표출된다는 맹자의 주장에 만족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맹자의 설명 방식대로 할 경우 온 세상이 천사로 가득 찬 천국이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희는 맹자의 원론에만 만족하지 않고, 현실 속의 악을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새로운 설명방식을 도입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가 끌어들인 것이 칠정, 즉 일곱 가지 감정이다. 희로애구애오욕, 즉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망하는 감정이 칠정이다. 이들 일곱 가지 감정은 선할 때도 있고 악할 때도 있다. 주희는 인간의 선한 본성이 반드시 사단으로만 표출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인간의 본성은 칠정으로도 표출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만 표출된 정서는 악할 수도 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사단도 인간의 감정이며, 칠정도 인간의 감정이라고 규정했다.
주희가 인간의 감정을 사단과 칠정이라는 두 가지 충위로 구분하고 이에 대해 석연한 설명을 하지 않은 채 죽은 이후에 학자들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특히 조선의 학자들이 이 문제에 집중적으로 달려들었다.
이 문제는 애초에 기대승과 이황의 논쟁으로 촉발되었고, 후에 이이가 기대승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학파가 선명하게 나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기대승과 이이의 입장을 지지하는 쪽을 정치적으로는 서인이라 하며, 지리적으로 기호학파라고 한다. 이황의 입장을 지지하는 쪽을 정치적으로는 남인이라 하고, 지리적으로는 영남학파라고 한다. 대체적으로 기호학파는 주기론적 입장을 보였으며, 영남학파는 주리론적 입장을 취했다. 이이로 대표되는 주기론자들은 주희가 남긴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고자 한다. “칠정이 사단보다 포괄적인 개념이다. 사단을 칠정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자. 칠정 가운데 선한 것들만 추려서 사단이라고 하자.”
반면 이황으로 대표되는 주리론자들은 이렇게 해결하고자 한다. “아니다. 사단과 칠정은 엄격히 구분되는 것이다. 사단은 이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칠정은 기를 중심으로 설명해야 한다. 사단과 칠정은 표출되는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들의 입장이 나뉘는 것은 이와 기에 대한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란 우주전체의 자연적, 윤리적 원리를 의미하며, 기란 우주를 구성하는 자연적, 윤리적인 물질 에너지를 의미한다. 우주의 원리로서는 이는 영원토록 순선무악하다. 반면 현실로서의 기는 악하기도 하고 선하기도 하다. 여기까지는 주기론과 주리론 모두 입장이 같다.
그런데 주기론자들은 이에 능동적 움직임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며, 주리론자들은 이에 능동적인 성질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입장이 나뉜다. 이에 따라 주기론자들은 아무리 우주의 보편적 원리를 의미하는 이라 하더라도 결코 인간의 윤리적 행위에 직접적인 개입을 할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 논의를 전개하며, 반대로 주리론자들은 엄밀한 보편적 이가 직접 인간의 행위에 능동적으로 개입한다는 전제 아래 논의를 전개한다.
주기론자들의 입장은 이렇게 정리된다. “인간의 감정은 외부에 대한 자극을 통해 육체와 에너지가 발동해 생긴다. 이런 과정에 이는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못한다. 단지 기가 발동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이라는 원리를 제대로 구현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그것이 사단이 되는 것이다.”
반면 주리론자들의 입장은 이렇다. “인간의 감정 가운데 사단은 우주의 원리가 먼저 명령하고, 인간의 육체와 에너지가 그것을 제대로 잘 따를 때 생기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 가운데 칠정은 인간의 육체와 에너지가 먼저 섣불리 꿈틀댄 후 뒤늦게 이가 기에 올라타서 그것을 제어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다.” 주기론자들의 입장은 주희의 이론에 더 부합한다. 왜냐하면 주희의 개념 규정에 의하면 이는 절대로 능동적인 존재일 수 없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움직임이 있는 존재는 기일 뿐 이가 아니다. 움직이는 존재는 자칫 인격성을 가진 존재로 착각되어 종교나 신화의 대상으로 타락하게 된다.
그러나 주리론의 입장도 만만치 않다. 주희가 진정으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의 윤리적 행위이다. 이의 능동성이 비록 주희의 개념 규정에 다소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지 몰라도 더 중요한 것은 이론 자체가 아니라 윤리의 실천이다. 주희가 미처 명확하게 밝히지 못한 것을 우리가 나서서 제대로 밝히면 될 것 아닌가? 이가 능동적으로 명령해주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순순히 이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란 말인가?
이들의 논쟁은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이들의 이론은 온갖 정치적 다툼의 이론적 근거로 작용하게 된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이토록 집요하게 토론한 예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리 흔치 않다. 조선은 철학의 나라였다.
<“철학 개념어 사전”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채석용 지음, 소울메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