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사회: 반증가능성 원칙을 사회에도 적용시켜 합리적으로 소통하자
‘열린사회’는 본래 베르그손이 제시했던 개념이다. 열린사회라는 이름만 가지고도 그것이 관습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타인과 타인의 문화에 대해 열려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열린사회가 크게 주목받게 된 것은 포퍼에 의해서다. 포퍼는 본래 과학철학자였지만 사회에 관해서도 주목할 만한 이야기들을 많이 했다. 그는 과학철학적 입장을 사회철학에 적용해 자연과 사회를 일관된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포퍼의 열린사회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반증가능성 원리’를 알아야 한다. 반증가능성 원리란 이런 것이다. 어떤 주장이 있다고 하자. 그 주장이 과학적 주장이라고 받아들여지기 위해선 그 주장에 대한 반증 가능성이 명백히 제시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반증가능성이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반증이 제시되어 버린다면 그 주장은 당연히 폐기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주장이 활짝 열어 놓은 반증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 반증이 실제로 확인되지 않는 상태로 지속된다면, 그 주장은 명백한 반증이 제기되기 전까지는 참인 주장으로 간주된다.
반면 반증가능성을 열어놓지 않고 우격다짐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죄다 사이비 과학적 진술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 형이상학, 아름다움, 윤리에 관한 진술들이 그런 것들이다. 이런 진술들은 반증가능성을 열어놓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이 무조건 옳다는 독단에 빠져 있다. 간단히 말해서 자신의 주장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해야 진정한 과학적 진술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반증가능성 원리는 과학적 진술과 사이비 과학적 진술을 가르는 결정적 근거가 되는데 포퍼는 이런 원리를 사회에 대한 주장들에도 적용한다. 그래서 사회에 관한 진술들 가운데 이런 반증가능성 원리를 수용하지 못하는 주장들을 죄다 무시해 버리자고 주장한다.
포퍼가 중점적으로 비판했던 대상은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시즘이다. 먼저 정신분석학에 대한 포퍼의 비판을 보자. 프로이트의 뒤를 이어 정신분석학을 발전시킨 아들러는 무엇이든 정신분석학적 틀로 완전히 다 설명해 버리고자 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어떤 남자가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치자. 아들러는 이에 대해 “저 행위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반면에 물속으로 뛰어들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열등감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뛰어들지 못한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물에 뛰어든 행위와 뛰어들지 못한 행위는 정반대 행위이다. 이 정반대 행위에 대해서 정신분석학은 일관된 방식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준으로 설명한다. 한마디로 말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뭐든지 전부 설명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주장들은 특히 열광적인 지지자들을 얻기가 쉽다. 장담했던 휴거가 불발이 되더라도 지지자들은 실망하지 않는다. “휴거가 이뤄지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 설파하는 사이비 교주의 도깨비 방망이식 주장에 지지자들은 오히려 더 큰 열광을 보낸다. 사이비 교주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어떠한 반박도 용납되지 않는 것처럼 정신분석학 또한 어떠한 반증도 허용되지 않는다.
마르크시즘은 정신분석학보다는 조금 낫다. 왜냐하면 마르크시즘은 최소한 자신들의 주장 가운데 틀린 부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본래의 마르크스 주장에 따르면 사회주의 혁명은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게 바로 마르크스가 말한 과학적 탐구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던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마르크시즘은 이런 현실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것이 진정한 혁명이 아니었다는 식의 설명으로 회피하려 하지는 않는다. 흔쾌히 인정할 건 인정한다. 그러나 마르크시즘 자체를 폐기하는 데까지 나가지는 않는다. 교묘하게 새로운 가설들을 덧붙여 이론을 계속 정당화한다.
레닌이 바로 그렇게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뜻밖의 상황으로 인해 러시아혁명이 다소 일찍 발발했다고 변명한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성숙 단계를 뛰어넘어 불가피하게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볼셰비즘이 위로부터의 혁명을 의미했다는 점, 일국 사회주의가 가능하다고 보았다는 점 등은 본래의 마르크시즘과는 다른 내용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현실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반증이 명백히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론을 폐기하는 대신 이론을 수정하는 방식을 택해 교조적 믿음을 더욱 굳건히 했다. 당연히 반증가능성 원칙에 의해 마르크시즘은 비과학적인 것으로 비판된다.
포퍼는 그밖에도 플라톤과 헤겔을 비판한다. 역사적 법칙주의나 유토피아를 주장하는 일체의 형이상학적 주장들을 열린사회의 적들이라 공격한다. 모두 다 반증 가능성을 열어놓지 않은 사이비 주장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포퍼가 말하는 진정한 사회, 즉 열린사회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로운 토론과 열린 태도로 자신의 주장이 잘못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생각이 무르익은 사회, 즉 반증가능성이 넘치는 사회이다.
세상은 혁명을 통해 일순간에 좋아질 수 없다. 새로운 주장이 다양하게 제기되고 그에 대한 반론 또한 활발히 제기됨으로써 토론이 활성화된다면 더욱 나은 길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주 듣던 얘기들이다. 진실은 지극히 평범한 상식 속에 있음을 포퍼가 힘겹게 역설하고 있다.<“철학 개념어 사전”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채석용 지음, 소울메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