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적 정체성
어느 한 집단의 사회 구조와 동원 방식이 속성상 자신과 비슷한 다른 사회적 범주의 말살을 요구할 때 그 집단의 정체성은 약탈적 정체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약탈적 정체성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공동체를 말살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경우 다수의 정체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다수가 위협받는다고 여기며 이를 위해 행동에 나설 것을 주장한다.
이때 주로 문제되는 것은 오로지 자신들만이 국가 정체성에 부합한다고 주장하거나 자신들을 철저히 국가 정체성과 일치시키고자 하는 문화적 다수자의 목소리다. 이런 주장은 때로는 종교의 이름으로 또 때로는 언어적, 인종적 혹은 그 외 다수성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달리 말하면, 다수와 소수의 역할이 역전될 위험에 처할 때 약탈적 정체성이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약탈적 정체성은 국민이라는 소속감의 밑바탕에 단일 종족의 원칙이 성공적으로 작용할 때 비롯된다. 이 경우 한 국가 안에서 상대적으로 소수인 집단은 국가의 전체성을 오염시키는 용인할 수 없는 자들이 된다. 소수 집단은 다수가 완결된 전체를 이루거나 혹은 절대적 순수함을 추구하는 데 사소한 장애물로 여겨진다. 이런 의미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집단의 수가 적을수록 또 소수가 힘이 약할수록 다수는 자신들이 단지 다수일 뿐 분명하게 온전한 종족은 되지 못한다는 것에 더욱 분노하며 그 책임을 소수에게 돌린다는 것이다.
20세기에 종족의 순수성을 이루지 못한 데 대한 분노가 가장 잘 드러난 예는 바로 나치가 동원한 ‘독일성’이다. 독일성은 특히 유대인을 겨냥했고, 그 외에 다른 소수자도 대상으로 삼았다. 나치 프로파간다에서 유대인은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위협으로 묘사되었다. 특히 암세포 같은 존재라고 비난했다. 특정 인종 집단을 하등 인간의 지위로 끌어내리면 집단 학살이 쉬워진다. 타인을 하등 인간으로 만들면 살인자는 희생자들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고, 희생자들이 하등 인간, 벌레, 곤충, 찌꺼기, 쓰레기로서 인종적으로 우수한 민족의 육체에 기생하는 암세포에 불과하다는 이데올로기적 사고를 뒷받침할 수 있다.
나치즘은 하나의 극단적 사례로서 최근 들어 특히 인도, 파키스탄, 영국, 독일에서 볼 수 있는 자유주의적 다수결주의(혹은 다수 쇼비니즘)와는 공통점이 별로 없어 보인다. 후자의 경우는 나치즘과 달리 사회적 차이들에 대해 좀더 개방적이다. 예를 들어 인도의 힌두트바(힌두 우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말레이시아의 ‘토착인’ 이데올로기, 혹은 시민권에 대한 유럽의 다양한 이데올로기 등은 자유주의적 다수결주의로 간주할 수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포섭을 노리는 다수결주의다. 생각건대 모든 다수결주의는 예외 없이 민족을 이루는 종족의 단일성과 안전성을 신봉하기 때문에 그 내부에 이미 집단 학살의 싹을 품고 있다.
먼 곳에서 만나는 증오의 시선
21세기로 진입하면서 새로운 세계가 부상했다. 국제적 차원의 힘의 균형, 군사 협약, 경제 동맹, 공동 협력 기구 등과 같은 척추 중심 체제로 운영되는 척추적 세계는 여전히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세포적 세계가 나란히 존재할 것이다. 이 세계는 법률이나 계획을 통해서가 아니라 연합과 기회를 통해 세포들을 증식시킨다. 이는 동시에 전 지구화, 즉 새로운 IT 산업과 급속도로 재편되는 금융 시장 빠른 속도의 뉴스, 자본의 이동, 피난민의 움직임 등이 총체적으로 작용해 초래한 결과이기도 하다. 부상하는 세포적 세계는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하나는 오늘날 우리가 테러리즘이라고 표현하는 세포적 세계의 어두운 측면이다. 그러나 세포 형태를 통해 조직된 새로운 원거리 정치는 깡패 자본가나 정치적 테러리스트들의 독점물이 아니다. 글로벌 사회의 가장 흥미로운 진보 운동, 예컨대 국가 및 시장 공간으로부터 독립된 제3의 순환 공간을 모색하는 운동들도 조직 운용에서 역시 이 모델을 따르고 있다. 이 운동을 우리는 ‘풀뿌리 전 지구화 운동’이라고 일컫는다.
풀뿌리 전 지구화
세포적 전 지구화는 사실 유토피아적인 측면이 많다. 이것의 행복한 얼굴을 우리는 때때로 국제 시민 사회라고 일컫는다. 행동가들로 구성된 이 네트워크는 인권, 빈곤, 토착민의 권리, 재산, 지역 돕기, 생태 정의, 젠더 평등을 비롯해 그 밖의 근본적인 인도주의적 목표를 구현하고자 노력하며, 국가 간의 경계를 초월해 비국가 네트워크와 이익 집단을 결성한다. 그린피스, 국경 없는 의사회, 나라마다 살리기 운동에서 다보스 감시 기구에 이르기까지 이런 운동들의 행동반경은 매우 넓게 퍼져 있고, 관련 단체의 수도 꾸준히 증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운동들의 목표는 형식과 내용 면에서 민주주의적이다. 이들이 글로벌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갈수록 보편주의적인 문제나 권리 혹은 규범처럼 일반적인 언어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들은 한 가지씩 차례차례 문제를 해결하고, 한 사람씩 혹은 한 단체씩 연합을 형성하고, 차근차근 승리를 거두고 있다. 우리는 이런 운동들에서 시선을 떼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국민 국가의 앞길에 드리워진 위기는 어쩌면 테러의 어두운 세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다른 방식을 가진 새로운 초국가적 조직 형태의 유토피아적 세포성에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종족 학살과 이념 학살이라는 전 세계적 흐름에 맞설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지녔다.
적어도 우리는 이 유토피아적인 세포적 형태가 장차 우리 투쟁의 무대가 되기를 희망하자.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문명인과 문명성 모두에 작별을 고해야 할 것이다.
<“소수에 대한 두려움”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아르준 아파두라이 지음, 에코리브르, 역자 장희권 박사님>
▣ 저자 아르준 아파두라이
문화인류학자.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났다. 미국 브랜다이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시카고 대학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뉴욕의 뉴스쿨 대학교 사회과학부 존 듀이 석좌교수를 지냈으며, ‘글로벌 이니셔티브Grobal Initiatives’의 상임고문을 역임했다. 현재 뉴욕 대학교 미디어, 문화, 커뮤니케이션 고더드 석좌교수Goddard Professor of Media, Culture, and Communication이며, 뭄바이 소재 비영리기관인 PUKAR(Partners for Urban Knowledge Action and Research)의 창립자이자 의장이다. 포드 재단, 록펠러 재단, 맥아더 재단 등 다양한 기구와 유네스코, 세계은행, 국립과학재단의 자문관을 맡고 있기도 하다. 지은 책으로는 『고삐 풀린 현대성』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