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에 참가하기 : 대화의 기본 개념은 아마도 사람들이 둥글게 앉는 것이리라. 이런 자리 배치는 누구도 특별대우를 하지 않으며, 참가자가 누구와도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원칙적으로 대화를 이끄는 지도자와 의제 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도자가 있고 의제가 있는 모임에 익숙하다. 때문에 대화에서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불안에 맞서고, 이를 극복하는 일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한두 시간 대화라는 것을 하다보면 그런 불안은 사라지고, 오히려 더욱 자유스럽게 이야기를 나눈다는 사실이다.
대화에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의미를 공유하는 일이다. 사회란 사람들과 조직들의 연결망 같은 것이다. 사회 덕분에 우리는 함께 살 수가 있다. 하지만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우리가 같은 문화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의미를 공유해야 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의의, 목적, 가치 등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붕괴된다. 현재 우리 사회는 일관성이 없으며 의미의 공유도 원활치가 않다. 과거에는 잘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우리가 가진 각기 다른 가정들이 암묵적으로 의미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문화 : 사회는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살기 위해서 만든 인간관계의 결합물이다. 사회는 규칙, 법률, 제도를 비롯한 다양한 것들로 결합되어 있다. 인간들은 그런 것들을 가지자고 생각하고, 동의했고, 실행에 옮겼다. 또 그 배경에는 문화가 존재한다. 문화란 바로 공유한다는 의미이다. 정부 건설을 예로 들어보자. 사람들이 정부를 건설하려 하는 경우, 그들은 어떤 유형의 정부를 원하는지, 어떤 정부가 좋은 정부인지, 무엇이 옳은지 등등에 대한 공통의 의미에 동의해야 한다. 때문에 문화가 다르면 정부가 하는 역할도 달라진다. 사회의 일부가 이런 의미에 동의하지 않으면 정치투쟁이 벌어지고, 정치투쟁이 심해지면 내전으로까지 발전한다.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고 존속하려면 의미의 공유와 일관성으로 이끄는 ‘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 전체가 붕괴될 것이다. 공유하는 의미야말로 사회를 진정 하나로 묶어주는 시멘트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 우리 사회는 아주 질이 낮은 시멘트로 접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질 시멘트로 건물을 지으면 금세 금이 가고, 결국에는 무너진다. 지금 우리에게는 역할을 제대로 해줄 질 좋은 시멘트와 접착제가 절실하다. 구성원이 공유하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대화를 넘어서 : 우리가 의미를 소통하고 공유하지 못한다면 사랑은 없어질 것이다. ‘아인슈타인과 보어’ 사이에 사랑은 그들의 소통이 불가능해지면서 서서히 증발해버렸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소통한다면 동료애, 참여, 우정, 사랑을 키우고 또 키우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이다. 여기서 제기해야 할 진짜 질문은 이렇다. 이런 과정의 필요성이 느껴지는가? 핵심 질문은 그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무언가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대화에서 우리가 이처럼 일관성 있는 높은 에너지를 발산할 경우, 단순히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집단 이상의 뭔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 내부에서 새로운 변화가 가능해지고, 우주와의 관계에서도 변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이런 에너지는 흔히 ‘영적 교감(communion)’이라고 불려왔다 ‘참여’의 일종이다. 초기 기독교들이 그리스어로 ‘Koinonia’라고 부르던 것인데 어원이 바로 ‘참여하다’이다. 전체를 나누어 가지고 동시에 거기에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집단 전체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우주 전체에... < “창조적 대화론”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데이비드 봄 지음, 역자 강혜정님, 에이지21>
자귀풀 : 식용이나 사료용으로 쓰이며 종자와 풀 전체를 차 대용으로 마신다 ,쌍떡잎식물 장미목 콩과의 한해살이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