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걸어다니는 사람이야
어렸을 때는 항상 식구들이 버글거렸다. 명절이나 아버지 생일날에는 친척들이 다 몰려와서 사람에 치였다. 작은 방에 겹겹이 둘러앉아 떡 한 쪽을 나눠 먹으면서도 뭐가 그리도 즐거웠던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지금은 방도 넓고 먹을 것도 많아졌는데 사람이 없다. 아버지, 엄마 차례로 돌아가시고 형제들은 외국에, 지방에 각각 흩어져 산다. 명절이 돼도 서로 만날 수가 없다. 나에게 가족은 가족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씻고, 머리 빗고, 밥 먹고, 대소변 보고 하는 모든 일상 생활을 형제들이 한 가지씩 나눠서 해주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나는 장애 때문에 크게 불편한 줄 몰랐다. 오빠, 언니들은 당연히 나를 돌봐주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 양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늘 명령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징벌 조치를 취했다. 그것이 별 효과가 없을 때는 두 번째 단계로 아버지에게 고해 몽둥이로 다스리게 하는 방법이었다. 우리형제들은 막내가 중증의 장애를 갖게 된 후 그렇게 시녀처럼 살았지만 한 번도 저항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 집안의 제왕이었다.
그런 좋은 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중국 할머니가 씻기고 옷 입히고 밥 차려주는 일을 한다. 중국 할머니는 그런 일을 할 때마다 생색을 낸다. 보수를 받고 일을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장애인이 자기에게 의지해서 산다고 믿고 있다. 처음에는 그런 태도가 못마땅하고 바로 잡아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할머니의 그런 태도는 중국 연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의식 수준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할머니가 내 앞에서 자랑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는 걸어 다니는 사람이란 사실이다. 일요일이라 늦잠을 자고 싶은데 밥을 빨리 차려놓고 식사를 독촉하기에 배고프지 않다고 하면 이렇게 말한다. “나는 걸어 다녀서 소화가 금방 돼요. 걷지 못하니까 소화를 못 시키는 거예요.”
옷을 입히면서 늘 똑같이 반복하는 말은 “이런 옷은 걸어다니는 사람이 입어야 어울려요”라는 것이다. 할머니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내미는 카드가 바로 걸어 다니는 사람이다.
할머니는 그 말을 “나, 이대 나온 여자야”로 사용한다. 얼마나 자랑할 것이 없으면 걸어 다니는 것을 저토록 당당히 부르짖을까 싶어서 이제는 재미있게 듣고 있다. 그 말을 할 때 할머니는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월급을 받을 때보다 더 행복해 한다. 그 행복은 내가 아니면 줄 수 없는 것이기에 나는 정말 하찮은 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자부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걸어 다니는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행복을 조금 깎아내고 말았다. 지금부터라도 걸어 다니는 것에 고마움과 행복을 느끼시길…….<“그래도 행복해지기”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방귀희 외 지음, 북오션>
방귀희: 소아마비를 앓아 휠체어 생활을 하지만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방송작가다. 91년 장애인 문예지 《솟대문학》을 창간하여 지금까지 한 번의 결간 없이 발행하고 있다.
<거제도 명사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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