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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天長去無執(천장거미집) - 김삿갓

[중산] 2009. 7. 8. 21:04
天長去無執(천장거미집) - 김삿갓
글쓴이 : 섬바우

 




    天長去無執(천장거미집) 김삿갓 天長去無執(천장거미집) 하늘은 높아 잡을 수 없고 花老蝶不來(화로겻불내) 꽃은 늙어 나비가 오지 않네. 菊樹寒沙發(국수한사발) 국화꽃이 찬 모래 밭에 피어 枝影半從池(지령반종지) 그림자가 연못에 반쯤 비치네. 江亭貧士過(강정빙사과) 가난한 선비가 정자 옆을 지나다가 大醉伏松下(대추복숭아) 술에 취하여 소나무 아래 엎드렸소. 月移山影改(월이사냥개) 달이 옮겨 가니 산 그림자 바뀌고 通市求利來(통쉬구린내) 사람은 장거리에서 돈을 벌어 오네. 요점 정리 지은이 : 김삿갓 시대 : 조선후기 갈래 : 오언율시 성격 : 희시(戱詩) 이해와 감상 "關北千里(관북천리)"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安邊 釋王寺(안변 석왕사)는 李太祖의 건국설화가 서려 있는 명소요, 吉州, 明川은 수많은 고관대작들이 유배를 갔던 역사의 고장이 아니던가. 그러나 당장 시급한 문제는 우선 오늘밤 잠자리였다. 佛影庵(불영암)에 유숙할 때는 잠자리 걱정도, 끼니 걱정도 없었다. 그러나 空虛(공허)스님과 헤어진 오늘부터는 모든 것을 그날그날의 운수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날은 저문 데 깊은 산속에 오막살이 한 채가 나온다. 사립문도 없는 단칸 斗屋(두옥)이다. 다행이 혼자 사는 노파가 반갑게 맞아 주면서 화로에 불을 피워 들여오고, 저녁 걱정을 하며 부엌으로 나간다. 방안을 둘러보니 천장에는 거미줄이 잔뜩 쳐져 있고, 화로에서는 겻불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김삿갓은 여기에서 또 戱詩(희시) 한 수를 읊는다. 천장의 거미줄과 화로의 겻불 냄새를 비슷한 한문글자에 맞춰 보니 제법 그럴듯한 시가 되었다. 그래서 혼자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노파가 소반에 국수 한 사발과 지령(간장) 반 종지를 놓아 가지고 들어와서 먹기를 권한다. 김삿갓의 장난기 어린 詩才가 다시 이어진다. 국수를 먹고 나니 노파는 산 너머 김부잣집에서 잔치음식을 가져왔다면서 소반 위에 귀한 음식을 담아 내온다. 소반에는 강정, 빙사과(油蜜菓), 대추, 복숭아 등이 놓여 있다. 음식 이름을 그대로 주워 맞추니 또 한 수의 시가 된다. 음식을 먹고 나자 노파는 개를 불러 과줄 부스러기를 던져 주었다. 개는 지금까지 뒷간에서 똥이라도 먹다 왔는지 몸에서 구린내가 풍겨 오고 있었다. 김삿갓은 이를 바라보다가 또 한 수의 희시를 생각해 냈다. 통쉬란 뒷간의 사투리이다. 아무튼 그처럼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모두 시로 바꾸어 놓고 보니 보고 느끼는 것이 그렇게도 즐거울 수가 없었다. 세상이란 본시 각박하기 짝이 없는 것이 아닌가. 이론에 치우치면 모가 생기고, 정에 약하면 흘러가 버리고, 고집이 세면 살기가 거북스러운 것이다. 심화 자료 김병연 (조선 시인) [金炳淵, 김립, 김삿갓] 1807(순조 7) 경기 양주~1863(철종 14) 전라 동복(同福).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본관은 안동. 자는 성심(性深), 별호는 난고(蘭皐), 호는 김립(金笠) 또는 김삿갓. 그의 일생은 여러 가지 기록과 증언들이 뒤섞여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6세 때에 선천부사(宣川府使)였던 할아버지 익순(益淳)이 평안도농민전쟁 때 홍경래에게 투항한 죄로 처형당하자, 그는 황해도 곡산에 있는 종의 집으로 피했다가 사면되어 부친에게 돌아갔다. 아버지 안근(安根)이 화병으로 죽자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廢族)의 자식으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 강원도 영월로 옮겨 숨어 살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그는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 이라는 할아버지 익순을 조롱하는 과시(科詩)로 향시(鄕詩)에서 장원하게 되었다. 그뒤 어머니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의 자식이라는 세상의 멸시를 참지 못해 처자식을 버려두고 집을 떠났다. 자신은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면서 삿갓을 쓰고 방랑했으며, 그의 아들이 안동·평강·익산에서 3번이나 그를 만나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매번 도망했다고 한다. 57세 때 전라도 동복현의 어느 땅 (지금의 전남 화순군 동복면)에 쓰러져 있는 것을 어느 선비가 자기 집으로 데려가 거기에서 반년 가까이 살았고, 그뒤 지리산을 두루 살펴본 뒤 3년 만에 쇠약한 몸으로 그 선비 집에 되돌아와 죽었다고 한다. 그의 시는 몰락양반의 정서를 대변한 것으로 당시 무너져가는 신분질서를 반영하고 있다. 풍자와 해학을 담은 한시의 희작(戱作)과, 한시의 형식에 우리말의 음과 뜻을 교묘히 구사한 언문풍월이 특징이다. 구전되어오던 그의 시를 모은 〈김립시집〉이 있다. 1978년 후손들이 광주 무등산 기슭에 그의 시비(詩碑)를 세웠고, 강원도 영월에도 전국시가비동호회에서 시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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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대 밭의 맑은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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