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옛날 그리스 신들이 살던 세계가 큰 혼란에 빠졌다. 혼란을 부추긴 이들은 ‘기간테스(Gigantes)’였다. 이 거인족은 제우스의 할머니인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자식들이다. 기간테스는 올림포스의 번개의 신 제우스와 그 형제들에게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올림포스 신족들과 벌인 전쟁으로 인해 그들의 왕국이 큰 혼란에 빠졌다. 그래서 나중에는 기간테스, 티탄 족(Titan, 여신 가이아와 그녀의 아들이자 남편이며 제우스의 할아버지인 하늘의 신인 우라노스 사이에서 태어난 12명의 아들, 딸), 키클로페스(Kyklopes, 가이아의 아들로 외눈박이 거인족)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 밖의 거인족을 서로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훗날 수많은 전설과 신화와 동화가 거인족을 소재로 창작되었다.
18세기 말엽에 성행한 ‘천재숭배(Geniekult)’ 사상은 거인족들과 올림포스 신들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장소를 독단적으로 이용했다. “예술가가 곧 천재다.”라는 천재숭배 사상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곧바로 ’거인적인 것‘과 ’천재적인 것‘을 동일시했다. 그래서 천재들, 다시 말해 정신의 거인들이 태어났다. 정신적 거인들은 자신의 무기를 그리스 신화 속의 거인족 선조에게서 가져오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거인족 선조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위치에 있는 번개의 신 제우스에게서 가져왔다. 그때부터 천재는 제우스와 견주게 된다. 그리고 천재적인 행동은 ‘창조의 번개’로 분출되어야 한다. 기발한 착상이나 번개처럼 번뜩이는 생각이 모든 창조적인 행위의 척도가 된 것이다.
그러나 천재적인 것이 정말로 눈을 번쩍 뜨게 만드는 영감에만 들어 있는 것일까? 천재적인 것이 탁월한 영감의 전제조건이나 준비 과정에는 들어 있지 않을까? 천재적인 것이 탁월한 영감의 가능성을 알아차리는 능력에는 들어 있지 않을까? 천재적인 것이 변화의 잔잔한 전조를 예감하는 능력에 들어 있지 않을까? 천재적인 것이 너무 멀리 떨어져 들리지는 않지만, 번개가 치는 것으로 보아 지평선 저 멀리 하늘에는 천둥소리가 울릴 것이라고 아는 능력에는 들어 있지 않을까?
‘루터’는 하나님과 관련되는 일에 대해 대단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상대해야 할 대상이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루터에게 있어 사람은 바로 종교개혁의 출발점이자 목표점이었다. ‘괴테’에게는 연인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괴테의 사랑방정식이다. 괴테는 평생 동안 여성을 사랑하며 살았다. 그들의 애정관계는 거대한 강박관념의 단편들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 ‘훔볼트’ 이후 어떤 이도 자연계의 제 현상을 수집, 분류, 정리해 한 권의 저서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는 지질학자, 기후학자, 생태학자, 화산학자, 해양학자, 광물학자이다. 이런 학문 분야 대부분은 그에 의해 생겨났다.
예술가의 자유, 정치적 자유, 개성의 자유, 의지의 자유, 행동의 자유, 신앙의 자유, 한 온전한 인간이 내적이든 외적 활동이든 그 어떤 활동을 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이 바로 ‘베토벤’이 가져온 복음이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 정신의 금고를 여는 일에 전념한 선구자들이 여러 명 있다. 그러나 인간 정신의 금고를 열 수 있는 올바른 단어조합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은 ‘프로이트’이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함으로써 우리의 우주 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빅뱅에 대한 생각, 우주 대폭발, 평행세계 또는 평행우주의 존재에 대한 생각 등. 이 모든 것이 일반상대성이론에서 비롯된다. 이와 같은 천재 6명의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요약)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저자: 잉고 헤르만 - 1932년 독일 보홀트 출생. 뮌헨대학교 등에서 종교사와 교육학을 공부했으며, 뮌헨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마쳤다. 독일의 WDR 방송국에서 편집자로 일했으며, 1997년까지 독일 제2공영방송 ZDF에서 편집책임자로 활동했다. 1997년부터 프리랜서로 라디오방송작가, 칼럼니스트, 출판물 작가로 활동 중이다.
노인과 소녀 - 마리엔바트에서의 연애사건
노인과 앳된 소녀의 연애사건. 이것은 비극일까,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웃기는 이야기일까? 일흔넷 노인이 갓 열아홉 소녀에게 반한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괴테가 그토록 마음을 다한 열아홉 살 소녀의 이름은 울리케. 괴테의 마지막 연인 울리케 폰 레베초프(Ulrike von Levetzow)이다. 울리케는 라인 강에서 서쪽으로 약 4km 떨어진 프랑스 접경 도시 슈트라스부르크로부터 돌아왔다. 노인과 소녀는 벤치에 앉아 그 도시에서 받은 인상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늙은 학자에게 슈트라스부르크는 각별한 도시이다. 법학을 공부하는 젊은 대학생 시절 사랑에 빠진 연인과의 추억이 곳곳에 배어 있는 장소다. 울리케와 함께 벤치에 앉아 있는 동안 괴테는 당시의 추억과 앳된 소녀의 얼굴이 사랑했던 여인의 모습처럼 보인다. 과거가 현재로 된다.
과연 울리케는 괴테에게 무엇이 행복인지 질문을 한 적이 있을까? 괴테에게는 연인보다 사랑 자체가 더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괴테의 사랑 방식이다. 울리케는 괴테의 이런 사랑 방식을 알아차렸을까? 그녀는 괴테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한다. 그것은 자기방어였을까, 아니면 정당방위였을까? 괴테는 울리케를 향한 사랑이 생애 마지막 사랑의 열정이 될 것임을 안다. 그래서 절망적인 슬픔에 사로잡힌다. 그는 또한 사랑에서 오는 절망감과 사랑의 포기에서 오는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것은 사랑의 아픔을 글로 써서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사랑의 슬픔과 고통을 승화시킨 문학작품이 탄생한다. 그것이 바로 『마리엔바트의 비가』(1823)이다.
어떻게 사람들이 거인을 작게 만드는가? - 후세 사람들이 이해한 괴테
무릇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은 무슨 연유로 자신보다 2백여 년을 앞서 살았던 한 인물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일까? 현재의 세속적인 일상 한가운데에 서서 미래를 생각해야 할 사람들이 왜 과거에 관심을 기울일까? 무슨 연유로 이미 ‘낡은 시대’를 산 시인이 지닌 정신과 감정을 현재의 시점으로 가져오려는 것일까? 앞에서 언급했던 시인이 거인이라는 것을 눈치 챈 걸까? 바로 그가 세상에서 결코 간과 될 수도 없고 간과되어서도 안 되는 ‘위대한 업적’을 내놓은 과거의 ‘위인’이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19세기나 20세기를 산 사람들보다 괴테의 인간적인 모습을 이해하는 데 쉬울 수도 있다. 괴테는 이미 오래전에 높은 단상에서 인간이 살고 있는 평지로 끌려 내려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괴테에게서 신화적인 요소들이 이미 오래전에 배제되었다. 정신분석가들은 괴테 영혼의 주름 하나하나를 샅샅이 파헤치고, 그의 영혼을 온갖 프리즘을 통과시켜 분석해 냈다. 사회학자들은 괴테의 신분상 약점을 붙잡고 늘어졌다. 페미니스트들은 괴테를 발가벗기고 외설적인 사내로 만들어 조롱했다. 이론가들은 괴테를 보수적인 반민주주의자로 낙인찍었다. 냉소주의자들은 괴테의 약점을 들춰내어 킬킬거리며 비웃었다. 이들은 괴테에게서 신화적인 요소는 무엇이든 가차 없이 빼앗았다.
이로 인해 잘못된 결과가 생겨났다. 인간 괴테가 보여주는 다양성과 복합성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노년기 괴테의 충실한 조수였던 시인 요한 페터 에커만의 말대로, 괴테는 완벽하게 연마된 다이아몬드처럼 커팅 면마다 항상 새로운 단면과 반사광을 발산하는 인물인데도 말이다. 1984년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 창립자이자 언론인인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은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심리분석가 쿠르트 아이슬러(Kurt Eissler)가 쓴 『괴테: 정신분석학적 연구, 1775~1786』의 독일어판 서평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거인의 발가락을 쭉 다 펴면 너무 커서 키를 잴 수 없다.”
서로 상반되는 두 요소의 동시성이 괴테란 인물의 기본 틀을 형성한다. 이것은 그가 평생을 걸쳐 수행했던 여러 역할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시인이고 극작가이고 소설가이며, 번역가이고 비평가이고 편지를 쓰는 사람이다. 한편 그는 행정 관리이자 외교관이다. 게다가 극장 감독이자 박물관장으로 활동한다. 수채화 화가이자 스케치 화가이며 철학자이면서 정치가이다. 괴테 자신도 이런 사실에 대해 아주 놀라워했다. 그는 말한다. “내 작품은 괴테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집합적인 존재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한때 자살할 생각도 했던 그가 어떻게 정신병적인 불안에서 벗어나고 마음과 정신을 위축시키는 상황에서 다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어떻게 그는 자신의 패배를 승리로 바꾸고, 세계가 그에게서 기대한 것처럼 거인이 될 수 있었을까?
나는 내게서 무엇이 이루어졌을지 모른다 - 실러와의 공동작업
1788년 9월 7일, 괴테는 튀링겐 주 소도시 루돌슈타트의 렝게펠트 가문의 집에서 『도적 떼』(1781),『제네바에서 일어난 피에스코의 모반』(1784),『돈 카를로스』(1787~1788)를 쓴 스물아홉 살의 작가 요한 크리스토프 폰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를 만난다. 실러는 1789년 2월, 법률가이자 문필가로 활동하는 친구 크리스티안 고트프리트 쾨르너에게 괴테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 “내가 괴테 주변에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더 불행해질 것 같네. 그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조차도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없다네.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네. 나는 그가 이례적일 만큼 이기주의자라고 믿네.… 정말이지 그의 정신세계를 사랑하고, 그를 훌륭하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를 미워하네.…”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실러는 괴테라는 존재가 사람의 마음을 매혹하지만, 기가 질려 주춤거리게 만든다는 말을 한다.
1794년, 괴테와 실러는 예나에서 열린 ‘자연연구회’ 학술모임에 참석한다. 학회가 끝난 후 두 사람은 예술과 예술이론, 경험과 이념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때 괴테는 관념에서 출발하고, 실러는 이론적인 이념에서 출발한다. 둘 다 서로에게 명백하게 밝혀야 할 것이 있다고 느낀 것 같다. 실러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적는다. “나는 이번 여름에 마침내 괴테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주일이 채 지나기 전에 서로 만나거나 서로에게 편지를 씁니다. … 그는 예술이론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했고, 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나 나와 동일한 결과에 이르렀습니다.” 괴테 역시 훗날 이렇게 말한다. “실러의 자극이 없었다면 정말이지 내게서 무엇이 이루어졌을지 모른다.”
괴테와 실러는 거의 10년 세월에 걸쳐 함께 작업을 한다. 두 천재의 이 같은 공동 작업은 문학사에서 유례없는 일이다. 고독이 작가의 진정한 자산이라는 사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지만 말이다. 실러는 괴테에게 자신이 주도하여 창간한 잡지 『호렌(Die Horen)』(1795~1798)을 위해 협력해 줄 것을 부탁한다. 괴테는 “기꺼이 그리고 진심으로”란 말로 『호렌』의 필자이자 비평가로 일할 것을 승낙한다. 그 결과 두 천재 작가는 자신들의 생각을 매우 생산적으로 교환하고 창조적인 문학 활동을 한다. 이것은 ‘행복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들은 한 시대의 예술과 문학을 만들어 내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중요 문제점들을 간명한 글로 표현한다. 이를 통해 이들은 인간적인 면에서의 차이점, 아니 상반되는 점을 뛰어넘어 인간적으로 서로 가까워진다.
괴테는 실러로 인해 인생의 위기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는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와의 동거와 결혼 그리고 샤를로테 폰 슈타인과의 이별 때문에 바이마르 상류층 사교계에서 고립된다. 마흔아홉 살이 된 괴테는 자신보다 열 살 어린 실러와 대화함으로써 ‘회춘’을 경험한다. 1798년 1월, 괴테는 실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 “그대는 내게 두 번째 청춘을 주었고, 나를 다시 작가로 만들어 주었네.” 괴테는 실러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만나고 1천 쪽이 넘는 편지를 교환한다. 이런 교류에서 괴테가 경험한 인생의 충만함을 엿볼 수 있다. 1805년 5월 5일, 실러가 세상을 떠난다. 실러의 죽음은 괴테의 충만한 삶의 단절을 의미한다.
죽음으로 둘러싸여 - 거장의 고독
크리스티아네가 세상을 떠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자신과 함께한 인생의 반려자가 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있을 때, 괴테가 보여준 태도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설다. 그는 아내에게 아무런 도움도, 아무런 위안도 주지 않는다. 괴테는 불안감과 두려움과 급격한 흥분상태에 사로잡혀 있다. 괴테는 자신이 죽음으로 둘러싸여 있음을 모르는 체하려고 애쓴다. 괴테는 지금 고독할 뿐만 아니라 고립되어 있다. 예전에 비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서신을 교환하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 그들 중 오랜 친구인 첼터가 있다. 그와의 편지에 자신의 인생에 대해 총평을 한다. “나는 때론 내가 거만하다, 이기적이다 하는 말을 듣는다. 때로는 젊고 재능 있는 사람들에게 시기심을 보인다는 말을 듣는다. 때론 내가 육체적 쾌락에 빠져 있다는 말을 듣는다. 때로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때론 내 조국과 내가 사랑하는 독일인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1832년 3월 22일,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세상을 떠난다. 이로써 하나의 세계가 몰락한다. 병리학자들이 밝혀낸 괴테의 사인은 보통 허리디스크라고 불리는 추간판탈출증, 흉추 경직, 치주염, 부서진 치아, 충치 등. 이 모든 것이 당연할 수 있다. 그러나 당연하지 않은 것은 죽은 자 괴테가 산 사람의 예언자였다는 사실이다.
<“거인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외 지음,역자 김형민박사,현문미디어>
'독서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픔은 왜 존재합니까? (0) | 2011.10.26 |
---|---|
일상의 불안! (0) | 2011.10.26 |
파우스트(Faust) (0) | 2011.10.19 |
적과 흑(Le Rouge et le Noir) (0) | 2011.10.16 |
자기선별’(self-screening) (0) | 2011.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