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사유만이 생존이 되는 시대가 왔다. 저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제 철학이 개인에게 생존이 되는 시기가 왔다”고 말한다. 사회가 불확실해질수록 ‘무너지지 않는 나’를 찾는 것이 중요한데 저자는 그 해답이 고전에 있다고 말한다. 수천 년이 지나도 그 빛이 바래지지 않는 이 고전들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깊은 사유가 담긴 이 책은 동양과 서양의 고전 40선을 선정해 ‘인간과 역사’, ‘자유와 평등’, ‘정의와 도덕’, ‘변화와 용기’ 등의 주제로 불안의 시대를 이겨내는 힘을 제안한다.
저자는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자신을 키워준 건 팔할이 고전이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대학에 들어갔지만 인생과 세계의 진리를 갈구하던 그 뜨거운 청년의 열정에 대해 대학은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않아 도서관에 처박혀서 고전 속을 헤맸다. 플라톤의 《국가》를 추켜들었고 《향연》을 즐겼으며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을 들추었다. “지금까지 철학은 세계를 해석해왔다. 이제 철학은 세계를 변혁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외침에 이끌린 듯이 공장에 들어가서 소외된 노동자의 삶을 체험했고, 또 오랜 세월 경찰의 추적을 피해가며, 수배자의 삶을 살았다. 삶은 늘 긴장 그 자체였다. 하지만 저자의 손에는 고전이 떠나지 않았다. 감옥과 공장이 저자의 대학이었고, 고전이 그의 스승이었다.
저자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고전에서 길을 찾았다. 그러면서도 잊지 않았던 모토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머리로 철학하라”였다. 사실 사람들은 권위를 숭배하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위대한 사상가들이 뱉어놓은 말을 쉽게 믿어버린다. 그러나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푸르른 것은 저 영원한 생명의 나무”라는 말처럼 현실은 끊임없이 이론의 변화를 요구한다.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길 싫어하는 사람은 훌륭한 신앙인이 될 수 있어도 세계를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주체적인 인간은 될 수 없다. 저자는 훌륭한 신앙인보다는 변변치 않더라도 주체적인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이마누엘 칸트의 말을 인용하여 늘 “사유하라”, “철학하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모든 의미 있는 삶은 힘든 삶이다. 늘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전인미답의 길, 어렵고도 힘든 길이었다. 지금도 우리가 가야 할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은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다. 이 힘든 길을 가는 모든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고전은 좋은 반려가 되어줄 것이라 저자는 확신한다. 저자는 이 한 권의 책이 동서양의 고전들에 대한 좋은 안내자가 되어주길 희망한다. 물론 이 한 권의 책으로 결코 충분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앎을 향한 호기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알고자 하는 욕망을 본성으로 갖고 있다”고 말했다. 독자들이 이러한 본성을 좇아 “그래, 나도 한번 고전과 씨름해보자”라고 용기를 갖는다면 저자는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한다...(요약)
1부 동양 편 - 나를 찾다
내 속의 나: 자아 편內篇
스스로에게 묻노니 나는 사람의 도리를 하고 있는가?_ 공자 《논어》
“이마는 요堯 임금처럼 생겼고 목은 순과 우 임금 때의 재상 고요皐陶 같으며 어깨는 자산子産을 닮았소. 그렇지만 허리 아래는 우임금보다 세 치나 짧았고, 초췌한 모습은 상갓집 개와 같았소.”
-《사기》<공자세가孔子世家>
공자는 천하를 주유했다. 천하를 바로잡고 백성을 바로 세우며 도덕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노나라에서 법무부 장관에 해당하는 대사구大司寇 벼슬을 얻었지만 그도 잠시였다. 계속되는 모함에 군주에 대한 실망까지 더해져 공자는 노나라를 떠난다. 그가 다다른 곳은 정鄭 나라였다. 그곳에서 제자들과 공자는 길이 어긋난다. 제자인 자공은 스승을 찾아 헤맸다. 한 사람이 다가와 자신이 본 사람의 모습을 말한다. 상갓집 개라고 표현된 사람, 자공은 그 사람이 자신의 스승 공자임을 깨닫는다. 단박에 달려가니 공자가 있었다. 자공이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하니 공자가 흔연히 웃으며 말한다.
“형상은 미치지 못하지만 상갓집 개와 같았다는 말은 맞을 것이다.” -《사기》<공자세가孔子世家>
주인이 상을 당했는데 어찌 개를 돌볼 여력이 있겠는가? 마르고 수척하며 볼품없는 개, 공자의 모습이 그러했다. 뜻을 알아주는 이 없이 천하를 떠돌던 공자는 그런 취급을 받고도 웃었다. 그러했던 공자로부터 동양의 중심 사상인 유학이 시작된다. 그러나 공자의 진짜 위대함은 그가 성인이라는 것보다 보통 사람이었다는 데 있다. 그는 우리처럼 즐거울 때는 웃고 슬플 때는 울었다. 뜻이 번번이 좌절되었을 때는 “뗏목을 타고 중국을 벗어나고 싶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다른 음식은 게걸스럽게 먹지 않았지만 술만은 사양하지 않고 마셔서 주량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했다.
공자가 한탄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에 대한 천시는 웃을 수 있어도 천하의 아픔에는 웃을 수 없어서였다. 최소한의 기본과 상식도 지켜지지 않는 사회에서 그는 무엇을 꿈꾸었을까? 공자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은 상식과 기본으로 살 만한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우리의 참여를 독려한다. 그의 일생이 그랬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을 스스로 걸어왔기에 공자는 당신들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더 나은 세상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 공자의 신념이었다.
군자의 길, 소인의 길: 우리는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공자가 이야기하는 군자는 그저 좋은 사람이 아니다. 인심 좋게 웃으며 베풀고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사람은 군자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도 좋은 사람이 아니다.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나쁜 사람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공자는 군자의 길을 이야기한다. 군자에게는 판단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무엇이 군자와 소인의 길을 가르는가?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자신에게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 구한다.” -《논어》<위령공徫靈公>
소인은 자신을 탓하지 않는다. 나는 잘했는데, 주변 환경이 문제다. 친구가 문제고 재수가 없으며 집안이 좋지 않아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소인에게는 자신에 대한 기준이 없다. 사실 대부분의 문제는 자신에게 있다. 소인은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탓할 뿐이다. 그래서 공자는 말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라.”
-《논어》<학이>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그렇게 되지 못함을 근심하라.” -《논어》<헌문憲問>
다른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만한 안목이 있다는 말이다. 군자는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함을 근심하고 다른 사람처럼 되지 못함을 근심한다. 군자는 자기중심적이지 않다. 때문에 주변 환경을 돌아보는 것은 자신을 어질게 바꾸기 위함이다. 그러나 소인은 반대다.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주변 환경이다. 그래서 주변 환경은 항상 원망의 대상이 된다. 이는 일종의 긍정적 사고와 부정적 사고의 발현이다. 자신을 반성하고 주위를 살펴서 자신을 나아가게 하려는 것은 긍정적 생각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주변만을 원망하는 것은 부정적 사고다. 그것은 소인이 의로움보다는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의로움에서 깨닫고 소인은 이익에서 깨닫는다.” -《논어》<이인里仁>
군자와 소인은 가치 기준이 다르다. 그것은 잘못을 판단하는 기준, 삶을 살아가는 기준이 다르다는 말이다. 군자의 기준은 의로움이며 사람의 도리다. 그러나 소인의 기준은 이익이다. 이익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소인이다.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다. 따라서 자본의 창출, 이익의 극대화가 사회의 목표가 되었다. 또한 기업의 목적은 더 많은 이익을 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익의 극대화는 사회를 병들게 한다. 한 제약회사가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얻기 위해 검증되지도 않은 약을 특효약이라고 만들었다고 생각해보자. 식품회사가 비위생적인 식품을 만들었다고 생각해보자. 기업은 이익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검증되지 않은 약은 부작용을 일으키고 비위생적인 식품은 건강을 해친다. 이익의 극대화에 의해 범죄가 자행되고 만다. 공자가 말했다.
“이익에 따라 행하면 원망이 많다.”
-《논어》<이인>
그렇다. 이익만 좇으면 남을 해치게 된다. 그래서 가야 할 길이 있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자가 부귀를 미워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공자가 말했다. “부와 귀, 그것은 사람이 원하는 바이지만 도로써 그것을 얻지 않았다면 취하지 않는다. 빈과 천, 그것은 사람이 싫어하는 바이지만 도로써 그것을 얻지 않았다면 떠나지 않는다.”
-《논어》<이인>
사람들은 부귀를 원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당하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면 갖지 않는다. 그런데 다음 말이 조금 이상하다. 빈천은 싫어하지만 도로써 얻지 않았다면 빈천에 머문다고 했다. 가난하고 천한 것도 도로써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 해답은 공자의 말에 있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가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라에 도가 없으면 부귀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논어》<태백泰伯>
도가 없는 세상에 빈천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부귀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도가 있는 세상에 부귀한 것은 당연하지만 빈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남을 속이고 짓밟아야만 부귀를 얻을 수 있는 세상에서 부귀를 얻었다면 그가 남을 속이고 짓밟았다는 의미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는 빈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또한 당연한 이치다. 공자는 다시 말한다.
“군자는 다른 이의 좋은 점을 이루게 하고 다른 이의 나쁜 점을 이루게 하지 않는다.
소인은 그 반대다.” -《논어》<안연顔淵>
소인은 시기하고 질시하여 남이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한다. 대신 남이 잘못되는 것을 좋아한다. 남의 슬픔은 나의 기쁨이요, 남의 기쁨은 나의 슬픔이다. 기본적으로 소인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려 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만 잘되면 그뿐이다. 결국 군자의 길은 상식과 도리로 귀결된다.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않는다’는 것이다. 쉽지 않다. 상식과 기본을 지키기 위해서는 나를 이겨야 한다.
삶이라는 사막을 건너는 지혜: 관계 편外篇
현실적인 삶에서 인간이 갈 최고의 길을 제시하다_ 《대학》
나무나 쇠를 가지고 90도 각도로 만든 ‘ㄱ’ 모양의 자를 곱자라고 한다. 이 곱자로 재는 것을 한자로 ‘혈구絜矩’라고 한다. 혈구를 하는 사람은 목수다. 아귀가 맞지 않으면 삐걱거리고 치수가 맞지 않으면 못을 댈 수 없다. 목수는 곱자를 이용해 각도를 맞추고 치수를 잰다. 《대학》의 ‘혈구지도絜矩之道’는 목수가 곱자로 재듯이 자신의 처지를 미루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뜻이다.
이른바 천하를 화평하게 함은 그 나라를 다스림에 달려 있다. 위에서 노인을 노인으로 대접하면 백성들 사이에서 효가 일어날 것이고 위에서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면 백성들 사이에서 공경이 일어나며 위에서 고아를 긍휼히 여기면 백성들은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혈구지도를 지녀야 한다. 위에서 싫어하는 바를 아래에 시키지 말며 아래에서 싫어하는 바로 위를 섬기게 하지 말 것이다. 앞에서 싫어하는 바를 뒷사람 앞에 놓지 말고, 뒤에서 싫어하는 바로 앞사람에게 따르게 하지 말 것이다. 오른쪽에서 싫어하는 바로 왼쪽으로 건네지 말 것이며, 왼쪽에서 싫어하는 바를 오른쪽으로 건네지 마라. 이런 것들을 일러 혈구지도라 한다. -《대학》10
혈구지도는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말라’는 《논어》의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과 상통한다. 그러나 여기 한 가지 추가되어야 할 것이 있다. 올바른 곱자, 올바른 자신이 그것이다. 곱자가 나 자신이라면 곱자로 재는 나무는 타인이다. 잘못된 곱자로는 각도도 치수도 잴 수 없다. 그것이 혈구의 도, ‘혈구지도’다. 잘못된 곱자로 재단된 나무로는 집을 지을 수 없다. 올바르지 않은 자신으로는 타인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다. 그 사람이 지도자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지도자들에게 더 높은 도덕성과 능력을 요구한다. 비뚤어진 잣대로 사람을 재단하면 편견이 된다. 편견을 가진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면 불공평이 된다. 불공평하니 공정은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조직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기울어진다. 기울어지면 쓰러진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이치다. 결국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자 해결점은 자신이다. 누군가의 위에 있고자 한다면 자신에게 돌아가 보자. 《대학》은 요구한다. 다스리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을 다스리라고 말이다.
나와 천하를 받드는 세 개의 기둥: 공자의 ‘예의 정치론’이나 맹자의 ‘왕도 정치론’은 내용상 비슷하다. 한마디로 법가의 형벌에 의한 정치, 폭력에 의한 정치에 반대하여 예의와 도덕에 의한 정치를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유가의 정치에는 공통적인 전제가 있다. 통치자는 학식과 인덕이 뛰어난 군자 또는 성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정치는 단순히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고 이끄는 것’이며, 따라서 통치자, 특히 왕은 성인이고 우수한 교사여야 한다. 《대학》은 학문의 목적과 정치의 이상 사이의 상관관계를 면밀히 논증한다. 또한 《대학》은 개인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천하로 이어지는 점층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즉 《대학》은 개인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하여 개인의 완성은 천하가 완성되기 위한 시작이자 종결이다. 《대학》은 이렇게 시작된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머무는 데 있다. 머무름을 안 후에 정함이 있고 정해진 후에야 능히 고요할 수 있으며 고요한 후에야 능히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한 뒤에야 능히 얻을 수 있다. 사물에는 본말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니 앞에 할 것과 뒤에 할 것을 알면 도와 가깝게 된다. -《대학》<경문經文> 1장
‘대학’은 ‘대인(군자)의 학문’이란 뜻과 ‘최고 교육기관의 교육 이념’이라는 뜻을 지닌다. 또한 ‘대학’은 치자治者, 즉 통치자를 위한 학문이기도 하다. 《대학》의 첫 문장은 《대학》의 목적을 그대로 드러낸다. 즉 대인이 학문을 하는 목적과 최고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하는 목적이 드러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통치자 또는 고급 관료가 일반 민중을 다스리는 목적이 밝혀져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밝은 덕을 밝히는 것’,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 ‘지극한 선에 머무는 것’이다. 주자는 이를 일러 ‘《대학》의 세 강령’이라고 불렀다.
세 강령 중 첫 번째로 명명덕明明德을 이야기한 것은 비록 《대학》이 천하를 논하나 그 시작은 개인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명명덕을 그대로 해석하면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이 된다. 여기서 ‘밝은 덕’이란 사람이 본성 속에 지니고 있는, 사리를 올바로 분별하고 인식할 수 있는 ‘덕’을 뜻한다. 또 맹자의 성선설에 따르면 ‘밝은 덕’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은 일반 민중이 지닌 덕을 잃어버리지 않고 더욱더 갈고 닦게 하는 것이다. 누구나 밝은 덕을 밝혀야 한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밝은 덕을 밝혀야 할 사람은 통치자다. 이는 일종의 모범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도 여기에 해당한다. 비리를 저지르는 윗사람의 말은 아랫사람에게 코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깨끗하지 않으면 아래도 깨끗할 수 없는 것이다.
《대학》에서 두 번째로 제시하는 강령은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 즉 ‘친민親民’이다. 친민은 명명덕이 사회적으로 확장된 단계로 민심을 밝고 새롭게 하여 침체하거나 타락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본성은 선량하지만 현재에 얽매여 진보의 마음을 잃어버리기 쉽다. 따라서 통치자는 언제나 이상을 추구하여 문화수준과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사람들이 옛 관습에 사로잡히지 않고 나날이 밝고 새롭게 생산에 힘쓰고 일에 전력하도록 가르치고 이끌어야 한다.
탕湯의 반명盤銘에 이르기를 “진실로 날로 새로워지면 나날이 날로 새로워진다”고 했다. <강고康誥>에 이르기를 “백성을 새롭게 했다”고 했으며 《시경》에 이르기를 “주나라는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그 명은 새로웠다”고 했으니 이런 까닭에 군자는 그 지극함을 쓰지 않는 바가 없다.
-《대학》<전문傳文> 2장
은나라 탕임금은 세수 대야에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구일신苟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을 새겨놓고 매일 자신을 돌아보았다. 또한 《서경》<강고>편에 보듯이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통치자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주자의 표현을 빌리면 새롭다는 것은 옛것을 바꾸는 것이니 스스로의 밝은 덕을 밝힌 후에는 마땅히 이웃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이웃이 묵은 때를 없애게 해야 하는 것이다.
세 강령의 마지막은 ‘지극한 선에 머무는 것’이다. 여기서 ‘선’이라는 것은 단순히 착하다는 뜻이 아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선이라는 단어에는 ‘올바름’, ‘잘함’이라는 뜻도 있다. 따라서 ‘지극한 선’이란 ‘지극히 선하고 올바르고 잘하는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지극한 선에 머무는 것’이란 사회 전체, 국가 전체가 향상되고, 또 향상되어 지극한 선에 이르러 거기에 편안히 머무는 것을 뜻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이상 국가와 이상 사회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통치자가 추구하는 마지막 목표이자 최고의 목표였다.
세 강령은 나와 천하가 둘이 아님을 보여준다. 내가 밝힌 나의 밝은 덕은 이웃과 백성에게 확장된다. 그래서 새로워지고 그로 인해 이상적인 개인, 이상적인 국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늘 이상과 함께하지 않는다. 현실의 위정자들은 이상 국가를 외치며 새롭게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물론 자신의 덕을 밝히기는커녕 자신의 때를 이웃에게 묻히고 있다. 그러나 이상이 없다면 나아갈 바도 없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대학》은 그 실천의 지침들을 다시 이야기한다.
<“철학하라”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황광우 지음 , 생각정원>
▣ 저자 황광우
정인이라는 필명을 가지고 있는 작가. 1958년 광주 출생으로 고교시절, 반독재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 및 제적을 당했다. 2년 뒤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에 입학, 틈틈이 고전을 읽었다. 1970년대에는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고 1980년대에는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80년 계엄포고령 위반의 이유로 두 번째 제적을 당하면서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의 길을 걸었다. 1980년 군부독재 시절, 부조리한 현실에 맞선 곳에서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0년대에는 진보정당운동에 앞장섰다. 1991년 월간 《길을 찾는 사람들》을 창간했고, 1998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2002년에는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장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전남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을 다니면서 광주 ‘다산학원’에서 제자들과 함께 고전을 공부하고 있다 . 저서로는 『철학 콘서트』,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 『노동자의 사상』, 『사회주의자의 실천』,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 『다시 생각하는 사회주의』, 『진리는 나의 빛』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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