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로프가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하자마자 미국에서 보낸 화물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2,000여 종에 달하는 씨앗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빌로프는 즉시 작업에 돌입했다. 2년도 되지 않아 그는 당시 3개에 불과하던 실험경작지를 12개로 늘렸다. 북극에서 중앙아시아 국가들까지, 그리고 발트 해에서 시베리아와 대서양 연안까지 아우르는 광활한 지역에 실험경작지를 만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바빌로프는 여전히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는 모스크바의 고위 간부들에게 직원들의 월급, 일당 노동자의 임금, 말 구입비 등에 필요한 돈이 바닥났다며 선처를 호소하는 편지를 계속 썼다. “이처럼 어렵고 불투명한 상황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라고 그는 적고 있다.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1887~1943)는 기근과 불평등이 만연한 시대에 모스크바에서 소작농의 손자로 태어났다. 바빌로프는 기아에 시달리는 러시아 인민들, 더 나아가 인류의 고통을 덜고자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종자를 모으고 연구한 과학자였다. 실험실보다는 현장의 농부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았던 그는 독일어, 이탈리아어, 라틴어는 물론 암하라어, 페르시아어까지 15개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진정한 세계주의자였다. 하지만 얼치기 학자이자 정권의 나팔수 리센코와의 논쟁을 거치며 스탈린의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러시아 농업에 대한 사보타주와 간첩 등의 오명을 쓰고 감옥에서 영양실조로 죽는 비극적 운명을 맞는다. 그러나 그의 헌신적인 연구와 업적에 힘입어 이후에 많은 이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의 뜻에 따라 세계 곳곳에서 유전적 다양성을 지키려는 활동이 진행 중이다. 결국 지난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바빌로프의 명예는 복원된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직후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은 러시아를 세계 식량 생산의 선두주자로 끌어올리겠다는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당찬 꿈에 담겨 있는 경제적 파급효과를 간파하고 그의 식물 탐사 원정을 적극 후원하고 나섰다. 1920년대 바빌로프는 밀, 옥수수, 호밀, 감자의 야생 품종을 찾아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사람들은 바빌로프에게 매료되었다. 진귀한 유전자를 찾아 전 세계를 바삐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이 열정적인 러시아인은 거친 무명바지와 흙투성이 장화로 대변되는 평범한 식물채집자의 이미지와는 구별되는 멋스러우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각인시켰던 것이다.
유전자 혁명의 태동기에 바빌로프는 지구라는 식물 유전자의 거대한 보고寶庫를 바라보는 과학자들의 시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생명공학 농법이 주류를 이루는 오늘날에는 더 우수한 품종의 옥수수나 밀을 원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진귀한 유전자를 찾아 식물계 전체의 유전적 다양성을 조사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 수순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멘델의 유전법칙의 실제적인 유용성을 놓고 과학자 사이에서 여전히 갑론을박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유전자’와 ‘유전학’이라는 용어가 어휘 사전에 편입될까 말까 하는 시점으로 거슬러 가보면, 바빌로프의 새로운 구상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큼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것이었다.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괴력을 지닌 중세의 전설적인 슬라브족 영웅 보가튀르(Bogatyr), 혹은 러시아의 헤라클레스였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적인 인물로, 당대 어떤 식물학자와도 비견할 수 없을 정도의 많고 다양한 종의 식량 식물을 그 기원지에서 직접 목격한 식물채집자이자, 두려움을 모르는 탐험가였다. 다섯 대륙을 누비며 채집한 그의 종자 컬렉션은 과학계에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아마 여러분도 그가 살아온 치열한 삶의 숨 가쁜 속도에 휘말려 들어가고 말 것이다. “인생은 짧습니다. 서둘러야 한다니까요.” 바빌로프가 즐겨 쓴 말이다. ..(요약)
아프가니스탄, 1924년
바빌로프는 미국 여행을 통해 세계 전역을 대상으로 한 식물 원정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 그는 이제 자연이 제공하는 가장 풍성한 실험실인 유전자 다양성 중심지를 찾아 아프가니스탄, 북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원정길에 나선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민란이 잦고 외국인에게 적대적인 위험 지역이었다. 1924년 6월 19일, 바빌로프는 최초의 러시아 과학원정대를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했다. 식물학자로서 아프가니스탄을 탐사한 러시아인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힌두쿠시 산맥 건너편 영국령 인도와의 접경지대에서 유럽에는 알려지지 않은 독특한 품종의 밀과 호밀을 발견했다. 과일과 채소의 표본을 채집하고 면화의 씨앗을 모았다. 특히 멜론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 하지만 진짜 보물은 빵밀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빵밀의 다양성 지역이었다. 그는 7,000여 개에 달하는 종자 샘플을 수집하여 러시아로 돌아오게 된다.
그가 아프가니스탄에 나가 있는 동안, 농업위원회는 바빌로프의 뉴욕 사무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관리책임자인 보로딘을 해고해버렸다. 바빌로프는 정치적인 상황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는 보로딘에게 곧 복직될 테니 염려 말라는 편지를 띄웠다. (씨앗을 추가로 구입하려면 그의 힘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결국에는 그들도 당신의 존재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겁니다. 하지만 이곳의 어수선한 정국 때문에 당장은 확답을 드릴 수가 없군요. 물론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말미에 개인적인 부탁을 덧붙였다. “맡겨둔 돈(백금 주괴)으로 만년필 서너 자루만 사 보내주면 고맙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한 자루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다 닳아버렸답니다.” 그는 다음 원정을 위해서 새로운 만년필이 필요했던 것이다.
맨발의 과학자
그는 여전히 전 세계에서 수집한 자신의 종자 컬렉션이 러시아 기근이라는 재앙을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떤 찬사나 포상도 없었다. 그해도 작황이 좋지 못했다. 레닌그라드연구소 및 여타 실험경작지들의 일부 회의적인 연구자들은 바빌로프의 원대한 계획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1927년 여름에 이르기까지 바빌로프는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1898~1976)라는 인물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리센코는 아제르바이젠의 한 식물 육종 실험경작지의 말단 직원으로 가축 사료와 영양소가 풍부한 봄작물용 천연 퇴비인 녹비綠肥를 사용하여, 파종한 녹색완두가 무사히 넘기는지를 확인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러다 1927년 8월 7일, 느닷없이 당의 공식 일간지 《프라우다(Pravda)》가 리센코를 극찬하는 특집기사를 내보냈다.
당시 29세의 리센코는 최초의 시도에서 엄청난 행운을 잡았다. 그가 심은 완두가 겨울을 넘기고 훌륭한 가축 사료와 퇴비로, 그리고 《프라우다》 측으로서는 훌륭한 정치적 선전도구로 무성하게 자랐던 것이다. 《프라우다》는 대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한 젊은 ‘맨발의 과학자’가 ‘초파리의 다리털’을 연구하는 나라를 동경하며 오직 실험에만 매진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실용적인 작업을 통해 “사물의 본질에 다가섰다.”며 그를 한껏 추켜세웠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특정한 인물을 부각시킴으로써 학문적인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는, 리센코와 같이 젊고 헌신적이고 실천적인 영농기술자들을 주축으로 10년 후가 아니라 지금 당장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사회주의 농업의 전형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
국가보안파일 006854
1930년 초엽, 심각한 식량난에 위기감을 느낀 스탈린은 자신의 비밀경찰에게 희생양을 물색하라고 명령했다. 현재의 국가보안위원회(KGB)에 해당하는 연방국가정치보안부는 소련 농업의 ‘파괴’와 ‘사보타주’ 활동에 관여한 죄를 뒤집어씌울 가상의 반혁명조직을 만들어냈다. 특히 외국 여행이 잦은 바빌로프 같은 공직자가 요주의 대상이었다. 1930년 3월 11일부터 연방국가정치보안부는 바빌로프 관리파일 No.006854를 작성해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날 기록된 파일에 의하면, 연방국가정치보안부가 관할하는 우크라이나 교도소에서 익명의 제보자가 첩보원들에게 바빌로프의 레닌그라드연구소 내부에 반혁명 조직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때부터 첩보원들은 바빌로프를 소련 농업을 파괴한 죄로 기소하기 위한 증거 자료 수집에 나섰다. 그 결과 136개의 파일이 쌓였으며, 그것은 장차 바빌로프를 체포하고 심문하는 근거가 된다.
마지막 원정
1930년대 초엽에는 당 중앙위원회가 과학을 총괄했다. 그것은 곧 과학과 관련된 지원금 지출이 모두 스탈린의 충복들에 의해 국가보안차원의 검토를 거친 후에야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1932년 초 바빌로프가 아메리카 원정 비용을 요청했을 때 중앙위원회가 그의 청원서를 곧장 연방국가정치보안부의 경제이사회로 보내 전문적인 평가를 받게 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그럼에도 바빌로프는 끈질긴 설득 끝에 마침내 원정 비용을 타내는 데 성공했다. 1932년 늦여름, 중남미 여행길에 올랐다. 이번 여행을 끝으로 다시는 소련 땅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제 45세로 어느덧 중년으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열정과 호기심 그리고 번뜩이는 예지로 충만했다. 하지만 식물을 채집하고 그의 과학적 꿈을 추구해나갈 기회는 스탈린의 암울한 신세계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바빌로프는 남아메리카의 매혹적인 자연을 탐험하고 미국에 체류하는 동료 학자들의 안락한 생활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하지만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임무에만 충실했다. 그에게 조국을 버린다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학회에 비치된 수백 개의 현미경이나 코넬대학, 시카고대학, 캘리포니아대학의 아름다운 캠퍼스 따위가 도브잔스키를 비롯한 많은 러시아 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바빌로프는 결코 아메리카 드림에 현혹되지 않았다. 브라질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직업 근성, 혹은 포드자동차의 ‘지칠 줄 모르는 노동’과 아마존 강 유역에서 고무를 추출하는 미국인들의 ‘전형적인 기업가적 열정’을 목격하면서 바빌로프는 현재 상태의 소련으로서는 그러한 사업들을 감당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리센코의 공격
스탈린은 식물육종가들과 집단농장 노동자들로 가득 메운 크렘린 대강당에서 리센코를 극찬함으로써 소련 생물학의 역사에 파괴적인 새 시대를 열었다. 당당한 걸음걸이로 등장한 리센코는 연단에 서자마자 식물 육종에서 거둔 자신의 최근 성과물을 차례차례 열거했다. 그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성과물은 하나같이 이전에 발표된 수준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연구가 온통 ‘실용 과학’으로 포장되면서 ‘빨리빨리’라는 스탈린의 요구에 강한 호소력을 주었다. 농업 관련 고위층은 스탈린의 의중을 헤아려 리센코주의를 다시 지지하기 시작했다. 농업위원 야코블레프는 리센코를 “식물의 춘화처리를 통해 농업 과학에 새로운 장을 연 실용적인 연구자”로서 “국내외를 망라하여 농업계 전체가 주목하는 과학자”라고 추켜세웠다. 그뿐만 아니라 장차 ‘리센코 사단’이 “볼셰비키 정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바빌로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언쟁에 휘말리기를 싫어한 탓도 있었지만, 설령 그럴 의향이 있었더라도 그로서는 나서지 않는 편이 현명했다. 소련 농업이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최악의 상황에서 리센코의 주장에 대한 비판은 비애국적인 행위로 비치게 마련이었으며, 자칫 반국가적인 ‘파괴 공작’으로 내몰릴 수도 있었다. 리센코는 그런 분위기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그는 연설에서 ‘부르주아 과학자들’, ‘파괴자들’, ‘계급의 적들’ 같은 용어를 수없이 반복했다. 크렘린의 연설에서 노동자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스탈린의 감탄사를 이끌어낸 것은 작물 생산과 관련한 새로운 성과가 아니라 부르주아 과학에 대한 리센코의 신랄한 비판이었다. 그는 부르주아 과학자들이 지금껏 “현상들을 관찰하고 설명하는 것”에 머무른 반면, 사회주의 과학은 “동물계와 식물계를 변화시켜 사회주의국가 건설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역설했다.
최후의 결전
1936년이 저물어갈 무렵, 바빌로프와 리센코가 각각 이끈 소련 생물학의 두 진영은 모스크바의 레닌아카데미에서 본격적인 과학 논쟁에 돌입했다. 리센코와 그의 추종자들이 의도적으로 유전학을 무시하고 나서는 상황임에도, 바빌로프는 여전히 과학자들 사이에 흔히 일어나는 토론에 불과할 뿐이라며 애써 두 진영의 차이를 극소화 시키려고만 했다. 이번 학술토론회는 바빌로프와 리센코로 대표되는 두 가지 육종 이론의 실용성을 평가하기 위한 것으로, 심사위원들은 장래 소련 농업을 위해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하나를 선택할 터였다. 불과 2주일 반 동안 상반되는 두 가지 전문 이론을 검토하여 그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발상부터가 터무니가 없었다. 하지만 1936년 당시 소련 정부는 그런 식으로 농업 정책을 결정했다.
리센코의 어조는 단호하고 전투적이었다. 그는 두 진영 간에 본질적인 견해차가 엄연히 존재한다고 선언한 다음 다윈, 근친교배종, ‘적절한 훈육’을 통한 식물 유전형질의 변화라는 세 가지 이슈를 거론했다. 다윈에 관한 상반된 견해는 “융화가 도저히 불가능”했다. 돌연변이를 진화의 동력으로 내세움으로써 리센코는 진화 과정에서 자연선택의 “창조적 역할”을 부정했다. “사랑의 결합”이라는 자신의 개념을 다시 언급하며, 한 품종 내부에서 이루어진 강제 교배가 생산량의 증가를 가져왔노라고 역설했다. 한 종류의 식물을 대상으로 한 단 한 번의 실험으로 특정 이론을 검증할 수 있다니! 과학의 원칙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만 갖춰도 쉽게 알아챌 수 있는 황당한 논리를 초일류 과학자들 앞에서 그처럼 태연하게 밀고 나갈 수 있는 배짱을 가졌으니,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리센코는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토론회가 끝나자 각종 언론은 리센코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바빌로프는 왜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까? 무엇 때문에 과학적 논증을 사용하여 리센코의 반反과학적 사변들을 뒤엎지 않았을까? 바빌로프는 토론회가 끝날 무렵 리센코의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에 잠시 발끈했을 뿐, 유전학 이론의 우월성을 입증해야 하는 한 진영의 리더로서 그에 걸맞는 행동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빌로프는 자신의 국제적인 지지 기반에 자칫 흠집을 줄 수도 있는 싸움은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상대편에는 없는 히든카드를 믿었다. 다시 말해 외국의 친구들과 동료 학자들이 나서 주면 소모적인 유전학 논쟁도 금세 마무리될 것으로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체포
스탈린은 바빌로프를 체포할 시기를 놓고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최소화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특히 외국 언론이 마음에 걸렸다. 드디어 1940년 여름에 기회가 찾아왔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맞는 첫 번째 여름으로, 독일군과 연합군이 맞붙어 유럽을 유린하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나치∙소련 동맹을 방패삼아 소련은 전쟁에서 한 걸음 비켜서 있었다. 바빌로프는 우크라이나 서쪽으로 마지막 원정을 떠났다. 집이나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오가는 기차에서 체포할 경우 목격자를 피하기는 어려웠다. 그의 실종 소식은 즉시, 혹은 늦어도 24시간 이내에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될 터였다. 그때 마침 그가 우크라이나 원정에 올랐기에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일행이 숙소의 앞마당으로 막 들어서는 순간 내무위원회에 소속된 4명의 공안요원이 바빌로프를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모스크바에서 찾는다는 말과 함께 그를 세단 속으로 밀어 넣었다.
바빌로프는 11개월 동안 거의 400차례에 걸쳐 총 1,700시간을 심문 받았다. 바빌로프의 심문 책임자인 33세의 알렉산드르 흐바트 중위는 공산주의청년동맹 콤소몰(Komsomol)의 간부를 지낸 인물이었다. 그가 감호소에 도착한 이틀 뒤인 8월 12일, 흐바트는 처음으로 혐의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소련 형법 제58조 ‘국가범죄’ 항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었다. “반역죄(소련의 군사력, 소련의 국가통치권 혹은 소련 영토의 불가침권에 해가 될 수 있는 행위), 파괴 공작(경제 훼손), 사보타주(자본주의 단체의 이익을 위한 방해 행위, 반혁명적인 목적으로 폭발물을 이용한 파괴 행위, 철도 창고들의 방화 행위…… .” 국가 범죄가 적용될 경우 바빌로프는 총살형이었다.
다시 사라토프로
1941년 10월 말에 바빌로프는 정치범이자 사형수로 흐바트의 모진 심문을 거치며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사라토프로 다시 돌아왔다. 동료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피골이 상접했으며, 불결한 환경에서 얻은 이질과 갖가지 장애에 시달렸다. 적들은 그의 몸은 망가뜨렸지만, 그의 정신만은 파괴할 수 없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엉뚱한 죄를 뒤집어쓰고 범법자가 되어버린 동료 수감자들은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다가 갑자기 죽어나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바빌로프는 2년 넘게 꿋꿋이 버텼다. 감옥 속의 바빌로프는 그나마 남아 있던 인내력까지 소진해가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내고 있었지만, 헤어진 가족과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꿈을 떠올릴 때마다 절망감으로 몸부림쳐야 했다.
1943년 1월 24일, 그는 심한 열병으로 탈진 상태에 빠져 재소자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사라토프 재소자 병원의 의사협의회가 나서서 바빌로프의 상태를 점검했다. 그들의 기록에 의하면 바빌로프는 온몸이 아프다고 호소했다. 그들은 ‘영양 결핍, 창백한 피부, 발의 부기’도 확인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린 최종 진단은 ‘만성적인 굶주림으로 발생한 영양실조’였다. 1943년 1월 26일 아침 7시, 마침내 바빌로프의 심장박동이 멈췄다. 공식적인 사인은 감옥 마당에서 운동하다 걸린 것으로 추정되는, 감기로 인한 폐렴으로 기록되었다. 전 세계 인구를 먹여 살린다는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오대륙 곳곳을 누비고 다닌 위대한 식물탐험가가 아이러니하게도 영양실조로 숨을 거둔 것이다.
<“바빌로프”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피터 프링글 지음, 역자 서순승박사, 아카이브>
▣ 저자 피터 프링글
미스터리 소설『민들레의 날(The Day of Dandelion)』과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주목할 만한 책 『식품주식회사: 멘텔사社에서 몬산토사社까지-유전공학의 득과 실(Food,Inc: Mendel to Monsanto-The Promises and Perils of the Biotech Harvest)』(공저), 베스트셀러 역사책 『실탄 난사: 피의 일요일, 데리, 1972(Those are Real Bullets: Bloody Sunday, Derry, 1972)』(공저) 등 총 9권의 책을 출간하였다. 《인디펜던트》, 《워싱턴포스트》, 《애틀랜틱》, 《뉴리퍼블릭》, 《네이션》 등에 꾸준히 칼럼을 연재 중이다. 현재 뉴욕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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