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가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791년 조선의 천재 임금 정조(1752~1800)는 어좌 뒤에 일월도(일월오악도)를 치우고 대신 책을 그린 책거리 병풍을 세웠다. 태조부터 이어져 온 왕가의 관례를 깬 파격이었다.
정조는 이어 "짐도 평일에는 책을 즐겨 읽지만 일이 많아 책을 볼 시간이 없을 때는 책가도(冊架圖·책거리)를 보며 마음을 푼다"며 본격적인 책 정치를 펼쳤다고 한다.
<책으로 채워볼까 생각하면서 새로 짓고 있는 정자>
옛날 그 시절에는 종이도 귀하다보니 책도 자연히 귀했을 것이다. 많은 장서를 그려놓은 책가도를 보면서 마음의 양식으로 삼았을 것이다. 옛 선비들도 책가도를 좋아했다. 그리고 오늘날 돌잔치에 병풍으로 애용되기도 한다. 인적이 드문 산골에 있다보니 때로는 적적하다. 이곳에서 육체노동을 할수록 휴식과 쾌락의 몰입도구로써 독서와 음악이 제격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같이 한 여름날씨에 물이 흐르는 정자에서 책을 펴놓고 차 한잔의 여유를 갖는 휴식이 절대 필요하다. 그래서 책가도를 대신할 조그마한 정자를 그늘진 곳에 만들기로 하였다. 책속의 등장인물들로 조용한 산골은 왁자지껄 시끄러울 것이고 잠시나마 또 다른 세계로 인도될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실존주의 작가 톨스토이는 손수 흙을 묻히는 시골생활을 그리워 하며 그곳에서 독서와 저술활동에 전념하였다. 말년에 도덕적 자기완성을 이루려고 노력하였듯이, 작가의 길이 아닌 농부의 길일지언정 감히 그 언저리라도 흉내내어 보고자 한다. 화장실이나 길가에도 책을 놓아둔다.육신의 노곤함이 두뇌까지 전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독서만큼 지적인 벗을 찾기 어려우며 마음의 안식처를 찾기 어렵다. 앞으로 정자가 완공되어 책들로 채워지면 지혜의 숲속공간에서 많은 자양분을 얻으며 지루함과 고단함을 동시에 날려버릴 것으로 기대해 본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인생수업>에서 이렇게 말했다."많은 사람들이 가슴뛰는 직업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그를 위해 열정을 쏟아 부을 수있는 행복한 삶을 사는건 아니다. 대부분은 삶따로, 꿈 따로인 채로 산다. 잘나가는 남자라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말도 현역에 있을 때는 현실의 불만과 더불어 잘 와닿지 않지만 퇴직이후에는 굉장히 호사스러운 말로 들린다. 시원섭섭함을 뒤로하고 현직에 물러나 있으면 경제적인 여건은 물론 바뀐 문화와 정서에 많이 당황하게 된다.
요즘같은 더운 날씨에는 등산이나 낚시 등의 취미활동도 힘든 상황이다. 그렇다고 집에 머물며 TV와 벗하면서 집사람의 휴식공간을 침범하는 것은 더더욱 삼가해야 할 일이다. 도시 사람들은 짬짬이 도서관을 찾게되면 시원한 바람과 함께 많은 책들이 반겨 줄것이다. 산골이면 헌책이라도 몇권씩 갔다 놓고 읽으면 된다. 은퇴이후에도 대부분 연착륙하지 못하고 워크홀릭으로 남아있어 적당히 긴장되어있다. 그래서 쉬면서 여유를 갖는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뭐라도 결과물을 내려고 한다. 자칫 경험부족으로 새로운 일에 도전하다 마지막 종자돈마저 날릴 수 있어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여야 할 것이다.
나이들어서 무슨 일을 하든 경제적으로 큰 보탬은 되지 않지만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형편에 맞춰 살아가야 한다. 적당히 보람을 주는 일과 고추론적 정신성장을 위해 부단히 노력은 하여야 할 것이다. 또다시 굴러 떨어질 지언정 시시포스가 거대한 바위를 수백번 정상을 향해 떠받쳐 올리듯이 말이다.
지금까지 허겁지겁 앞만보고 달려왔지만 은퇴 이후의 삶은 자유의지대로 삶과 꿈이 하나된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 "쉴 곳을 찾아 세상을 뒤지고 찾아 헤맸으되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이 없더라"라는 독일의 한 수도사의 말처럼 은퇴한 남자들이 머물곳이라는 것을 한번쯤 권해보고자 한다.
<완공 후 정리 중에 있는 정자 모습>
<'세우정'이란 이름으로 현판을 하였다>
작가는 늙어가는 슬픔을 소설로 풀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늙어가는 슬픔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이에 대한 조언을을 해주신다면요?(이재은 작가)
정답은 없어요. 그러나 분명한것은 스스로 노력하는 거죠. 사회구조의 책임도 많아요. ~ 지금 늙은 아버지 들은 10시간 넘게 일하고 계속 달려와야 했기 때문에, 문화 정서적으로 노후를 대비할 수 있는 틈을 사회에서 다 빼앗은거나 다름 없지요. 노후대비라는 것은 돈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죠. 경제적인 대비도 해야겠지만, 문화 정서적인 대비도 해야죠. 경제적인 노후대비와 아울러 어떤 삶의 본원적인 문화, 정서에 따른 대비, 어떻게 시간을 받아들이고 이겨 갈지에 대한 노후대비, 이런 것들을 반드시 해야 된디고 봐요(박범신 작가)
톨스토이는 손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직접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농민의 삶을 가장 위대한 삶이라고 간주했다. 대학2년을 중퇴하고 그는 젊은 시절부터 고향에서 농민교육에 나서고 그들과 함께 직접경작하며 매우 근면하고 건전한 생활을 했다. 오십대 초반 정신적 위기 이후 그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무엇보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비폭력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교회가 자신에게 부여한 어떤 신비적이거나 초자연적인 혜택이 아니라 신에게 이끌리는 삶을 살아가리라는 내면적 확신에 의해 궁극적으로 구원을 믿게 되었다<참회록><나의 소망>
1891년 전국적인 대기근이 발생하자 그는 무료급식소를 설립하고 가족과 함께 기아구제활동을 전개하였다. 1872년 7월까지 246개소에 매일 1만3천명의 급식을 제공하였다.
후기 톨스토이는 도덕적 자기완성에 보다 방점을 두기 시작한다. 그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지상의 왕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앞서 자신 속에 내재된 신에 대한 사랑을 우선해야하고 그럴 때만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 가져올 수 있는 인간적 욕망이나 이기주의를 경계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와 브론스키의 정열적인 육체적 사랑은 도시 귀족 사교계를 배경으로 발생한다. 하지만 농촌에서 직접 농사일에 참여하는 레빈과 키티의 삶은 행복하고 이상적으로 그려진다. 이 레빈은 바로 톨스토이의 이상적 삶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안나 카레니나>를 끝낸 뒤 정신적으로 완전히 탈진했다. 문학적 형상으로 변형시킬만한 개인의 경험은 다 고갈되었다. 대신 그는 형이상학적인 명제를 추구했다. “왜 우리는 이곳에 존재 하는가” “선이란 무엇인가” 등 이제 톨스토이는 예술가에서 현자 혹은 성자로 발전해 간 것이었다.
저녁식사 후 아들이 보는 가운데 소파에 같이 앉아 담소를 나누던 그 부부의 관계는 이제 서서히 멀어졌다. 톨스토이의 영혼적위기가 이런 현상을 불러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그는 <참회록><인생론> 등 저작에서 최종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해 결론을 내린다.
인간의 삶이란 주어진 생명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이고, 그 생명에는 신으로부터 받은 신의 요소, 최고의 영혼이 담겨있으므로, 영혼의 명령(이성의 법칙, 신의 계율)에 따라 도덕적 자기완성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오직 그리고 진정한 삶이라는 것이다!
시골생활하면서 움막(토굴)하나 지어놓으면 작물저장은 물론 요즘같은 더위에 더없는 피서장소가 될 수있다. 땅속 온도가 일정하여 에어콘을 항상 켜놓은 상태와 같기 때문이다. 때로는 독서와 명상의 장소로 활용할수도 있다. 땅을 파고 방수천(또는 하우스 비닐)으로 에워싸서 빗물 유입을 막는다. 내부는 돌로 쌓으면 습기에도 견디고 토굴의 운치를 느낄수 있어 좋다. 장소가 여의치 않으면 지상에 노출하여 돌과 흙으로 에워싸면 된다. 토굴은 태양이 내리쬐는 바깥열기와 또 다른 세상을 체험할수 있으며 일년 내내 일정한 온도로 음식물을 숙성시킬 수있는 저온창고 역할을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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