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외로운 까닭은 다리가 아닌 벽을 세우기 때문이다.
- 조지프 포트 뉴턴
요즘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가 가까워졌던 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만 있으면 일상을 공유할 수 있고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외롭다고 말합니다.
마음에는 아직 다리가 놓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겉으로는 소통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마음에 커다란 벽을
세워놓는다면 다른 사람과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개성화와 가면(페르소나)!
스위스의 심리학자 카를 융은 자신의 책에서 각 개인의 완전성을 획득하는 심리적 과정을 ‘개성화individuation'라고 설명했다.
삶을 살며 우리는 사회에 의해 어떤 특정한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도록 요구받는다. 세계에서 기능하기 위해 우리 모두 끊임없이 어떤 역할을 연기한다.
이것을 융은 ‘가면, 가짜로 꾸민 얼굴’을 의미하는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라고 부른다. 고대 로마의 연극무대에서 배우는 가면을 쓰고 ‘그 너머로 소리를 냈다.
사회적으로 기능하려면 사람은 이런저런 가면을 써야 한다. 그런 가면을 쓰기를 거부하는 이들조차 “절대로 싫어!” 같은 ‘거부’라는 가면을 쓴다.
가면은 장난스럽고 기회주의적이고 피상적인 경우가 많지만, 우리가 모르는 깊이가 있는 것도 있다. 모든 살아 있는 사람은 인격, 곧 깊이 각인된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
타인은 물론 본인조차 이 페르소나를 통한 모습을 보는 것이며, 그게 없다면 그 사람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가면을 벗고 본인의 모습으로 마주합시다!”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렇지만 가면이라고 다 같지는 않다. 젊음의 가면이 있는가 하면 노년의 가면이 있고, 다양한 사회적 역할의 가면이 있으며, 우리가 무의식중에 타인에게 씌우는 가면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흐려놓은 그들의 모습에 반응한다.
예컨대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모르는 남자와 잡담을 나누고 있다고 치자. 객실 승무원이 지나가다가 공손하게 그를 “상원의원님”이라고 칭한다.
승무원이 지나간 뒤 당신은 조금 전처럼 그를 편하게 대할 수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당신에게 그는 권위를 가지는 사회적 가면, 융이 말하는 ‘마나인격mana-personnality'(평범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대단히 위대하고 큰 인격)이 된 것이다.
이제 당신은 그냥 어떤 사람이 아니라 저명인사와 이야기 하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아랫사람, 상원의원과 공손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미국 시민의 처지로 낮춘다.
적어도 당신관점에서는 이 짧은 장면에서 페르소나들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원의원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 조금 전까지 거들먹거리지 않았다면 그는 여전히 거들먹거리지 않을 것이다.
해방된 개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융의 용어로 ‘개성화’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다양한 사회적 역할에 해당하는 가면을 언제 어떻게 쓰고 벗을지 알아야 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하는 것처럼 집에서는 의사당에서 쓰는 가면을 쓰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처럼 쉽지 않은 이유가 가면 중에는 깊숙이 파고드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판단과 가치, 자존심과 야망, 성취, 현혹이 이에 포함된다.
자신의 가면이나 타인의 마나 가면에 지나치게 깊은 인상을 받고 집착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개성화는 이렇게 강박적으로 영향을 받지 말 것을 요구한다.
개성화는 자신의 중심을 찾아 그에 의거해 사는 법을 배우고 자신이 찬성하는 것, 반대하는 것을 통제할 것을 요구한다.
융은 이렇게 말한다.
“결국 모든 삶은 전체성의 실현, 다시 말해 자아의 실현이며, 그렇기에 이를 ‘개성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삶은 그것을 실현하는 개인과 결부되어 있어서, 개인이 없이는 삶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각 개인에게는 각자의 운명과 목적이 있으며, 이것을 실현할 때 비로소 삶은 의미를 갖는다.“
이는 동양에서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 위대한 성인과 현자에게도 강요하는 이상과 정반대다. 동양에서는 사회적으로 부과된 지위의 가면이나 역할과 전적으로 동일시해야 하며,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고 나면 대양으로 스며드는 물방울처럼 자기 존재를 완전히 지워야 한다.
왜냐하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재된 운명과 성격을 삶의 ‘의미’와 ‘완성’으로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서구와는 달리, 동양에서는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근대 공산주의 독재국가에서 그러하듯)기존 사회질서이기 때문이다.
독특하고 창의적인 개인은 그곳에서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되며, 소속된 사회집단의 원형과 동일시함으로써 복종할 것을 요구받는다. 동시에 개인적 삶을 향한 욕망은 모두 억제해야 한다.
교육은 주입 또는 오늘날 말하는 세뇌다. 브라만은 브라만이, 구두공은 구두공이, 전사는 전사가, 아내는 아내가 되어야 하며 그 이상도 이하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사회에서는 가르침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권위를 가진 교사를 전적으로 신뢰해서 그의 성문화된 정보뿐 아니라 버릇, 판단기준, 전반적인 페르소나의 이미지를 열심히 흡수하려는 학생이 이상적인 학생이다. 학생 또한 이 페르소나가 말 그대로 ‘되어야’한다.
어차피 달리 될 것도 없고, 서구적인 의미에서의 자아라고는 존재하지 않으며, 개인적 의견도 호불호도 독창적인 생각이나 목표도 없으니까 말이다.
<'다시, 신화를 읽는 시간‘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조지프 캠벨 지음, 권영주님 옮김, 더퀘스트출판> * 조지프 캠벨 : ’최고의 시화 해설자‘로 불리는 신화종교학자이며 비교신화학자.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컬럼비아대학교에서 하사와 석사를, 뮌헨 대학교에서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했다. <신의 가면>, <신화의 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와 인생>, <신화의 세계> 등의 저서가 있다. 1987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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