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순간일망정 그가 존재했던 것은
정녕 그대의 심장과 함께하고파서가 아니었는지…….“
- 이반 투르게네프
조금 긴 요약 내용이라, 맨 아래 해설을 먼저 읽은 후 본문을 보세요!
나는 우스운 인간이다. 사람들은 이제 나를 미친 사람이라고 부른다. 서글픈 건 나는 진리를 알고 있는데 사람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아, 혼자만 진리를 알고 있다는 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걸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렴, 이해하지 못하고말고.
학문에서와 비슷하게 인생에서도 그랬다. 그들이 이걸 모른다는 게 내겐 무엇보다도 큰 치욕이었다. 그런 데는 내 잘못이 컸다.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죽어도 다른 사람에게 그걸 고백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누가 됐던 고백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권총으로 내 머리를 날려버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이가 들면서 나의 끔찍한 성격에 대한 자각은 더욱 깊어갔지만 동시에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정확한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 영혼 안에서 나의 존재를 초월하는 상황에 대한 동경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세상살이는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는 확신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된 것이기는 하나 완전히 확신하게 된 건 뜻밖에도 지난해였다. 세상이 존재하건 안 하건 또 무엇이 어디에 존재하건 안 하건 나와는 상관없다고 갑자기 느낀 것이다.
나는 점차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절대로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자 나는 문득 사람들에 대해 화를 내지 않게 되었고 그들을 거의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튼 나는 만사가 귀찮았다. 따라서 어떤 문제든 내게서 멀어져갔다. 정확히 11월 3일 나는 진리를 깨달았다.
지극히 어두운 밤 그렇게 어두울 수 없는 밤이었다. 온종일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지극히 차갑고 음산한 비, 인간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상당히 위협적인 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게다가 거리의 돌이란 돌은 모조리, 골목이란 골목은 모조리 수증기 같은 것을 내뿜고 있었다. 그러자 문득 가스등이 모두 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스등은 모든 것을 밝혀 마음을 한층 더 우울하게 할 따름이니까.
나는 매사에 의욕이 없었지만 그래도 아픔 같은 건 느낄 줄 알았다. 그러니까 만일 누군가 나를 때렸다면 통증을 느꼈을 것이다. 그건 정신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도 연민의 정을 느낀 적이 있다. 여자아이가 나를 붙잡고 도움을 청했을 때 온갖 상념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아이는 여덟 살가량 되어 보였고 스카프를 쓰고 외투도 입지 않은 채 흠뻑 젖어 있었다. 특히 아이의 너덜너덜한, 완전히 젖은 신발에 눈길이 끌렸던 게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나는 여자 아이가 너무 안됐다고 생각한 나머지 내 처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상한 아픔까지 느꼈다. 나는 전에 없이 화가 치밀었다.
내가 인간인 이상, 즉 아직 존재하고 또 사라지지 않은 이상, 살아 숨 쉬는 존재라면 괴로워하고 화를 내며 또 자신의 행동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속으로 ‘난 동정심도 못 느낀다. 이 순간 매정하고 비겁한 짓도 할 수 있어. 왜냐하고? 이제 두 시간 후면 모든 게 끝나니까’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리를 질렀다는 게 믿어지는지? 나는 지금 정말 그게 이유였다고 확신하고 있다. 나는 삶이나 세상은 나의 행동 여하에 달려 있다고 분명히 믿는다. 심지어는 세상이 오로지 나를 위해 창조된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다.
내가 죽으면 세상 또한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이나 세상 사람들과 나는 하나니까. 그러나 사실은 나의 의식만 사라지고 말겠지.
내 동생은 오 년 전에 죽었다. 그런데 나는 동생을 가끔 꿈속에서 만난다. 동생은 내 문제에 적극적이어서 나와 함께 진지하게 논의한다. 나는 꿈을 꾸면서도 동생이 죽어서 묻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밤새 책상 옆 안락의자에 앉아 아무것도 안 한다. 그러나 어떤 생각들이 떠오르면 그냥 내버려둔다. 초는 밤새 다 탄다. 나는 내가 그날 밤 자살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만일 그 여자아이가 아니었던들 정말 총을 쏘아 자살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 모두가 그처럼 높이 평가하는 삶을 나는 자살을 함으로써 마감하려 했었다. 그러나 꿈, 내가 꾼 꿈은, 내게 보여주었다. 새로운 삶, 갱생의 삶을!
“ 나는 자주 우리 지구에서 눈물이 없이는 저무는 해를 바라볼 수 없었다….그리움은 항상 내가 우리 지구에서 사람들에 대해 가졌던 미움과 연관이 있었다.
왜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데 미워할 수 없는 걸까? 사람들을 향한 나의 사랑 속에는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는데 난 왜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걸까?
왜 사람들을 미워하지도 않는데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 그들은 내 말을 듣고는 있었지만 이해하지는 못했다.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꿈은 수천 년을 가로질러 날아가면서 내 안에 전체적인 느낌만을 남겨놓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원죄의 근원이 나였다는 것이다.
혐오스런 섬모충. 국가 전체를 감염시키는 페스트균처럼 나는 ‘나’라는 존재를 통해 내가 오기 전에는 그토록 행복하고 순정했던 땅을 오염시키고 말았다.
그들은 거짓을 배우고 거짓을 좋아하게 됐으며 거짓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다. 아, 그건 어쩌면 악의 없는 농담이나 희롱, 사랑놀이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아니 사실은 어쩌면 세균이 원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거짓의 세균은 그들의 심장에 파고들었고 그들은 그게 싫지 않았던 것이다.
그다음엔 순식간에 욕정이 태어났고 욕정은 질투를 낳았으며 질투는 잔인함을 낳았다…. 그들은 죄를 저지르며 정의를 생각해냈고 이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법규를 만들어냈으며 법규를 수호하기 위해 단두대를 세웠다.
그들은 저마다 질투심에 가득 차 타인의 인격을 모독하고 위축시키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리고 그걸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노예제도가 생겨났고 자진해서 노예가 되는 이들도 나타났다. 약자들은 기꺼이 강자들에게 예속되었다. 자신들보다 더 약한 이들을 억압하는 데 강한 자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전부 다 얻기 위해 악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쟁의 당사자들은 저마다 과학, 지혜 그리고 자기보존 욕구가 궁극적으로는 인간들을 하나의 조화롭고 현명한 사회로 통합시켜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현자’들은 그러한 사회를 앞당기기 위해 자신들의 생각을 이해 못하거나 ‘무지한 자들’을 신속히 제거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사람들은 전부 다 얻기 위해 악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를 추구하고 무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기 위해 자기파괴를 설파하는 종교들도 등장했다.
사람들은 헛되이 공을 들이는 데 지치기 시작했고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러자 이들은 오로지 고통만이 의미가 있다며 고통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래를 통해서 고통을 찬미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들을 사랑했다.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했다. 아니 그럴 힘이 없었다. 그들은 내게 면죄부를 주며 자기들은 자신들이 원한 것을 받아들였을 뿐이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은 필연이라고 말했다.
벌써 아침이었다. 제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일어서 있다가 정신이 들자 갑자기 실탄이 장전되어 발사 준비가 끝난 권총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단숨에 권총을 밀쳐버렸다. 아, 이젠 사는 거야. 그래 사는 거야! 나는 두 손을 들고 영원한 진리에 큰 소리로 호소했다. 그래, 살면서 전도하는 거야! 무엇을? 진리를.
어쩌면 앞으로 상황이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 사실 전도를 제대로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세상에 그릇된 길을 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렇기는 해도 사람들은 모두 같은 곳을 향해 가고 있다. 적어도 현자로부터 시작해서 진짜 강도에 이르기까지 지향하는 바는 같다. 가는 길만 다를 뿐이다. 이건 오랜 진리다.
나는 사람들이 자상에서 살아가는 능력을 잃지 않고서도 선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보아서 알고 있다. 나는 악이 인간의 정상적인 상태라고 믿고 싶지 않을뿐더러 믿을 수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의 그러한 믿음을 비웃는다.
하지만 어떻게 그 믿음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진리를 보았는데 말이다. 나는 진리를 충만 된 전체로서 보았다. 때문에 인간에게 그게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믿을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그릇된 길을 갈 수 있겠는가? 아, 지금 나는 생생하고 힘이 철철 흘러넘친다. 진리는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귀띔하며 나를 지켜주고 바로 잡아주었다.
어쨌든 나는 전도할 것이다. 문제는 간단하다.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남들도 사랑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다른 건 필요 없다. 그러면 단 하루, 단 한 시간 만에 모든 게 제 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난 그에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이건 수십억 년 간 되풀이되고 읽혀온 오랜 진리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진리를 마음속에 깊이 새기지 않았다!
그러고는 ‘삶을 인식한다는 것은 삶 자체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 행복의 법칙을 안다는 것은 행복 자체보다 고상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주장과 맞서 싸워야 한다.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건 즉시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그 조그만 여자아이를 찾아냈다…. 난 그 아이에게 갈 것이다. 가겠다!
<‘우스운 자의 꿈’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고일님 옮김, 작가정신출판> * 도스토예스키 :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와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작가이다. 1821년 군인의 아버지와 상인의 딸인 어머니사이에 둘째 아들로 모스크바에서 출생. 육군 공병국 전역과 동시에 전업 작가 생활 시작. 작품 발표이후 페트라셉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 언도를 받고 모의 처형을 거쳐 4년간 시베리아 유형생활. 1856년 장교 신분 회복. 1862년 2년 간 유럽여행. 1866년 <죄와 벌>,<도박사>발표. 1878~80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발표. 1881년 폐질환으로 사망.
도스토예스키가 궁극적으로 역설하는 것은 불행한 우리 이웃에 대한 ‘연민’ ‘동정’ ‘사랑’이다. 그가 볼 때 지상의 낙원은 특별한 게 아니다. 바로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회인 것이다. 그는 “우리 모두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게 즉시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라고 외친다. 또한 그는 작품의 주인공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그런데 그게 그렇게도 어렵단 말인가?”가 아닐까<역자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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