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본 길에서 마주치는 행복
“나는 길이 없는 곳으로 갈 것이고, 길은 나와 함께 갈 것이다.” 호주 출신의 시인 조슬린 오트-사이드의 글이다.
길 없는 곳으로 떠나는 것, 그것이 바로 여행이자 모험이다. 남들이 가본 적 없는 길, 어떤 모험이 펼쳐질지 모를 그 길, 우리는 벌거숭이 빈손으로 태어났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
그 사이의 모든 것은 모험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늘 두 가지 선택에 놓이게 된다. 유지 혹은 변화. 이 두 개의 가치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안전 혹은 자유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안전함 혹은 자유로움. 안전에 좀 더 많은 가치를 두면 자유를 포기해야 하고, 자유에 비중을 높이면 안전이라는 보호막을 어느 정도 거둬들일 각오를 해야 한다.
성실하게 직장을 다니는 사람은(월급이 만족스럽든 그렇지 않든) 생활이 안정되고 경제적 안전도 어느 정도 보장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자유의 관점에서 보면 직장에 얽매여 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시공간의 자유를 어느 정도 포기하면서 그만큼 안전을 선택한 셈이다. 반대로 사업체를 운영하거나 프리랜서로 일하는 사람은 직장인보다 능동적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지만, 불안하다고 느낄 수 있다.
여행에서도 안전함과 자유로움의 가치는 공존한다. 떠나기 전부터 모든 일정이 갖춰진 패키지 여행 상품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자유롭게 여행지 이곳저곳을 탐험하듯 다니려는 사람이 있다.
사실 여행의 숱한 순간에 안전함과 자유로움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반영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여 삶의 태도가 되고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결정 짓는다.
해가 갈수록 세상사는 일이 빡빡하다. 사회적인 갈등도 첨예해지고 두 눈과 귀를 의심하게 하는 끔찍한 사건도 비일비재하다.
‘생존’이라는 키워드는 경제적 ∙ 사회적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간다. 요즘 세상에서는 자유로움보다 안전을 선택하게 된다.
철옹성 같은 안전 앞에서 변화나 모험은 불온하고 위험한 선동 문구로 전락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안전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우면 더 많은 이윤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벽한 안전은 없다. “완벽한 안전과 보안을 원한다면 감옥에 가라.”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1890-1969)가 말했다. “옷과 음식도 제공 받고 아프면 의료 서비스도 받을 수 있는 감옥은 완벽하게 안전한 장소다. 다만 한 가지, 자유가 없을 뿐이다.
과학과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고 하지만, 죽음은 여전히 삶의 일부다. 태어난 순간 죽음을 향해 다가간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지금 우리가 스스로의 행복과 안전을 내세우며 행하는 많은 선택들이 오히려 감옥을 만드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긴장 좀 풀고 자유를 느껴 봐요.” 안전에 너무 많이 얽매여 있는 사람들에게 한 번쯤은 이렇게 외치고 싶다. 안전의 빗장을 풀고 자유를 느끼기에 여행만큼 좋은 것은 없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죽음의 숙명 앞에서 유일한 차이는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냈느냐이다. 달리 말하면 얼마나 많은 것을 경험해 보았는가 하는 물음이다.
성패와 상관없이 시도해 보았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느나는 인생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여행은 바로 그 숱한 시도들의 결과물이다.
여행을 앞두고 짐을 싸다보면 알게 된다. 최소한의 물건을 꾸리다 보면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나라는 사람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하게 된다.
배낭 안에 든 것이 전부일 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껴질 때 비로소 내 마음에 찾아오는 감정이 있다. 바로 안도감이다.
어떤 삶을 살든 매일의 삶이 반복되면 일상이 된다. 일상에 익숙해지면 더 이상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기 마련이다. 현대인에게 그 일상을 왠지 그럴듯하게 가공할 수단이 있다.
바로 SNS다. SNS는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고 생각과 느낌을 공유하는 순기능도 있지만, 자신을 가공하고 다르게 꾸며 가짜 인생을 다른 이에게 보여주는 역기능이 있다.
특별한 순간만 따로 떼어 내면 그럴듯한 인생을 사는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현실에서 ‘행복하기’보다 온라인에서 ‘행복해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환상을 갖고 싶지 않다.
미국의 소설가 폴 보스(1910~1999)는 모험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중산층에서 태어난 그는 파리를 거쳐 모로코에 정착해서 죽을 때까지 52년을 살았다. 그의 소설<The sheltering sky>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면서도 삶을 무한한 우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일은 특정한 횟수만큼, 그것도 손에 꼽을만큼 일어난다. 당신은 어린 시절의 오후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나?
나흘? 닷새? 어쩌면 이보다 더 적게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당신은 앞으로 보름달이 떠오르는 풍경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기껏 스무 번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도 인생의 모든 것은 여전히 무한하게 보인다.“
나는 기억나는 오후가 그리 많지 않은 날들보다 아름다운 보름달을 자주 볼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부지런히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싶다.
누구든지 죽음 앞에서 인생이란 통장을 열어보게 되면 그동안 미뤄두었던 자유가 얼마나 들어 있는지 알게 된다.
안전한 인생을 사느라 더 이상 쓸모없어진 수많은 선택의 순간은 얼마나 많을까? 모험적인 일상을 살 수 없더라도, 낯선 곳에서 떠오르는 보름달을 최소한 스무 번은 볼 수 있는 여행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한국인들의 이상한 행복‘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안톤 숄츠 지음, 문학수첩출판> * 안톤 숄츠 :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청소년시절부터 격렬한 운동을 좋아했고, 동양의 철학 종교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독일을 방문한 한 스님의 강연을 듣고 그 스님의 조언에 따라 한국에 들어와 수행을 시작했다. 함부르크 대학에서 한국학을 전공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20년 넘게 살고 있다. 독일 공영방송 ARD 프로듀스, 비즈니스 컨설턴트, 교수, 다큐멘터리 제작자 등 다양한 직업으로 한국 사회를 경험했다.
널리 존경받는 법조인 루이스 브랜다이스(1856~1941)는 “우리는 선택을 내려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가질 수도 있고 소수의 손에 부가 집중되는 체제를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둘 다 가질 수는 없다.“
자본주의가 거침없이 날뛰던 시절의 사람인 브랜다이스도 막대한 부가 소수에게 집중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브랜다이스는 “햇빛은 최고의 살균제”라는 말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음지에 있는 비밀을 꺼내 밝은 빛 아래에 놓아서 그것에 영향을 받은 모든 이들이 내막을 파악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몹시 가차 없고 영민한 프로파간다 전문가였던 (나치의)요제프 괴벨스는 이렇게 말했다. “엄청난 거짓말도 충분히 반복해서 하면 사람들은 곧 믿게 된다.”
오늘날 코크가 돈을 대는 급진우파가 하는 엄청난 거짓말은 우리 사회가 ‘생산자’와 ‘탈취자’로 나뉜다는 것이다. 이것을 믿으면, 생산자가 자신의 것을 빼앗아가는 탈취자에 대해 선악 이분법적인 투쟁을 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일례로, 카토 연구소의 보아즈는 경제 행위자가 약탈자와 희생자로 나뉘어 있는 “기생경제”에 대해 언급했다. 또한 1인당 5만 달러 이상을 후원한 고액 후원자들 대상의 연회에서 [당시 공화당 대선후보] 미트 롬니가 유권자의 “47%“”생산적인“ 미국인의 피를 빨아먹는 존재라고 언급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미국인의 거의 절반이 조세제도를 통해 부유한 사람들을 등쳐먹으려 하는 사람들이라는 증거는 있는가? 가장 부유한 계층을 정부가 불공정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사실이라면, 이 사실을 억만장자의 비서가 상사인 억만장자보다 높은 세율을 적용받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이렇게 의도적으로 왜곡된 주장들은 이들의 진정한 목적, 즉 자신의 자유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다른 이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통제하려는 강박적인 목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청년시절부터 찰스 코크는 그가 인생의 스승으로 삼은 발디 하퍼를 통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사회적 과제는 ‘정치라는 신체에서 자유를 잠식하는 병균을 막기 위한 예방의학을 어떻게 고안할 것인가’이다”라고 배웠다.
하퍼는 “예방에 실패해서 일단 질병이 진행되고 나면, 이미 잃어버린 자유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매우 쓴 약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제임스 뷰캐넌은 그 약이 얼마나 쓸지를 알려주었다. 자신의 노후에 무엇이 얼마나 필요할지 미리 내다보고 저축해두지 않은 사람은, 2005년에 부캐넌이 쓴 표현을 빌리면 “인류 중 종속적인 부류로,(…) 의존적인 가축과 비슷하게” 취급받게 될지 모른다.
타일러 코언은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는 번성하겠지만 “다른 이들은 길옆으로 밀려나 떨어지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뷰캐넌의 뒤를 이어 조지 메이슨 대학의 타일러 코언은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코언의 예상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메디케이드가 축소될 것”이고 정부와 고용주가 부담하던 ‘여러 비용이 노동자들에게로 전가되면서 실질임금이 줄어들어“ 많은 이들이 재정적인 곤란에 처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코언은 “정부로부터 받던 혜택이 삭감된 사람들은” 실질임금 감소를 상쇄하기 위해 텍사스 주처럼 생활비가 적게 드는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게 좋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그는 사실 “미국이 전체적으로 더 텍사스 같아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코언은 미국의 일부 저소득층은 “멕시코나 브라질 같은 환경”에 다시 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임금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정부가 제공하는 서비스가 줄어들면서 싼 주거지를 원하는 사람들의 수용에 부응하기 위해 “부분적인 판잣집”이 생겨날 것이라고 한다.
그는 “텍사스 주에서 볼 수 있는 몇몇 현상들이 상당수의 미국인들이 직면할 미래”라며, “각오하고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한다.~
<‘벼랑 끝에 선 민주주의’ P522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낸시 매클린지음, 김승진님 옮김,세종출판. * 낸시 매클린 : 듀크대학교 역사학, 공공정책학 교수. 저서로는 ,기사도의 가면 뒤에>,<시카고 트리뷴>,<자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등이 있다. 그녀는<벼랑 끝에 선 민주주의>를 통해 뷰캐넌이 어떻게 자본가들을 대신해 민주주의를 억압하기 위한 ‘극우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비밀리에 추진해왔는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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