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안부 전화

[중산] 2025. 4. 8. 09:45

 

 

 

안부 전화를 드릴 때면 “아침에 눈뜨면 왜 사는지 모르겠다”라며 빨리 가고 싶다는 대사를 반복하는 시어머니의 말은 진심일까.

 

살고 싶다는 말에 표현에 비가 새는 것이라 여겼다. 나 자신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면서 시어머니의 말은 왜 반어법이라고 단정했을까.

 

늙은 자의 말, 그것은 생의 갈망도 생의 포기도 전부 다 생의 미련으로 번역했다. 일종의 투사일까. 내가 생에 미련이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합정역 2번 출구 파리바게트 앞을 지나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아침 10시부터 휴지통에서 먹을 것을 뒤진다.

 

저 할아버지는 지금 살고 싶을까, 죽고 싶을까. 내가 빵을 사들고 나오다가 할아버지에게 “저기…시장하시면……” 했더니 빵을 빼앗아 빛처럼 사라진다.

 

살기 위해서 죽고 싶어져야 하는 생이 지긋지긋할 것 같다. 아무도 모른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므로.

 

일흔을 앞둔 어느 목수. 전란에 태어나 고생이 극심했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최장 5일까지 굶어 봤다고 했다.

 

고생 끝에 낙이 왔다. 흔치 않은 귀결. 아니 보상. 요즘은 에쿠스를 탄다.(…) “옛날에 살기가 너무 힘들었는데 지금은 돈도 쉽게 벌고 일이 잘 되니까 오래 살고 싶다며 내 눈을 쳐다본다.

 

애처롭게, 늙은이 욕하지 말라는 듯이. 처마 끝에 하얀 구름이 흘러갔다. 연민 없이 15초 정도가 흘렀다.

 

오래 살고 싶다고 대놓고 말하는 어르신, 처음 봤다. 문득 나도 오래 살고 싶어졌다. 생에 매달리지도 않고 생에 발목 잡히지도 않고 양껏 사는 법이 있을 것 같다.     -

 

                                - 은유 첫 산문 <양껏 오래 살고 싶다>에서 일부 발췌

 

산수유

 

 

일요일 아침 일찍 전화가 왔다. 비통한 어조. 후배가 남자친구랑 헤어졌다고 한다. 부부보다 더 오래 살 것 같은 짝이었다.

 

이혼보다 더 충격으로 다가온 소식을 들은 나의 첫마디. “너 밥은 먹니?” 못 먹어서 살이 6킬로그램이나 빠졌단다.

 

역시 체중 감량에는 마음고생만 한 게 없다. 사람이 나간 자리만큼 몸도 비워진다. 왜 헤어졌는지 이유를 들었다. 그녀는 몇 가지 사건과 신상의 변화를 언급한다.

 

남자의 이기심에 질렸다. 생일인데 문자도 안 온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원망과 회한의 말들을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시점과 시제의 이탈, 논리의 비약이 더해진 이야기. 조금 헷갈렸다. 원래 이별한 사람은 문법에 맞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김수영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이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발생하는 왜곡과 혼란과 과잉의 정서가 바로 슬픔의 실체다.

 

내가 아는 후배의 남자친구는 진중하다. 나로서도 지금 상황이 믿기지도 이해되지도 않았지만, 일단 그 애가 남겨진 것은 사실이므로, 남자들이란 자기밖에 모른다, 정말 너무하다고 맞장구쳤다.

 

만남의 불가피성이 있다면 헤어짐의 불가피성도 있을 거다. 살뜰한 7년 세월이다. 체형에 맞게 늘어난 청바지처럼 서로에게 잘 맞춰진 사이였다.

 

어제까지 입던 옷이 오늘 불편해진다는 것은, 청바지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물은 유전한다.

 

한 시절 편안하고 맵시 있게 입더라도 옷은 낡고 체형은 늘고 그리하여 어느 날 몸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때가 온다.

 

정확히 말하자면 몸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의 시점이 온다. 연심의 변심 혹은 절심은 언제나 비약으로 다가오는 사건이지만, 생물성이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이치이기도 하다. 

 

<‘올드걸의 시집’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은유 첫 산문, 서해문집출판> * 은유 : 산문, 인터뷰 등 논픽션을 쓰고, 글쓰기 수업을 진행한다. 산문집<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다가오는 말들>, 인터뷰집<폭력과 존엄 사이>,<출판하는 마음>,<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글쓰기 에세이 <쓰기의 말들>,<글쓰기의 최전선>이 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독서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의 전환점!  (5) 2025.04.14
생을 담은 물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  (7) 2025.04.11
얼룩에 대하여  (7) 2025.04.05
나는 우스운 인간이다!  (12) 2025.04.02
긴장 좀 풀고 자유를 느껴 봐요!  (12) 2025.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