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들의 무지에 관하여
다른 언어를 더 많이 할수록 재능은 더 많이 샐 뿐이다.
그것에 힘을 쏟을수록 그만큼 다른 분야의 결실은 감소한다.
히브리어, 칼데아어, 옛 시리아어는
그들의 문자처럼 사람의 지성을 후퇴시키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의 이해력을
오히려(그 문자를 쓰는 사람처럼)무력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여러 나라의 언어로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은
모국어로 가장 타당한 논리를 전개할 수 있는 사람보다
더 학식 있는 사람으로 통하곤 한다.
-새뮤얼 버틀러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저자와 독자는 모든 타인에 대한 이해가 가장 부족한 부류다. 읽고 쓰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보다 차라리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는 게 낫다.
글을 통해 기계적으로 떠오르는 것 외에는 어떠한 관찰도 못한다. 생각하는 피곤한 일은 피한다. 습관이 안 돼 있어서 생각을 하려 해도 견뎌 내지를 못한다.
그는 머릿속 빈 곳에 채워지고 끊임없이 서로를 삭제하는 낱말들과 설익은 비유가 지겹도록 끝없이 펼쳐지는 책에 만족하며 가만히 앉아 있다.
많은 경우에 학식은 상식을 돋보이게 하고 진정한 지식을 대체한다. 책은 자연을 바라보는 안경으로 쓰이기보다는, 시력이 약하고 나태한 성향의 소유자들을 위해 자연의 강렬한 빛과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차단하는 막으로 곧잘 쓰인다.
책벌레는 글자로 구성된 일반론의 거미줄로 스스로를 둘둘 말고서 다른 사람들의 두뇌에서 반사된 가물거리는 그림자를 볼 뿐이다.
책 없이 혼자 있게 되는 두려움은 진공 상태에 처하는 공포와 같다. 다른 사람들이 공공장소에서 공기를 호흡할 때 그는 학식의 분위기를 호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감각을 차용한다. 즉 자기 자신의 생각은 없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의존해야 한다. 습관성 음주가 위 기능을 손상시키듯이, 이질적 출처에 생각을 의존하는 습관은 “생각의 내재적 힘을 약화시킨다.
사고력은 오래 계속 쓰지 않으면 또는 관습이나 권위에 속박되면, 무기력하고 열의가 사라져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일에 부적합해진다.
그들은 모르는 문자로 된 책을 읽는 것처럼 생각이나 흥미를 자극하지 않는 행과 음절을 열심히 읽다가 결국 멍한 상태로 눈이 감기고 약한 손에 들려 있던 책은 떨어진다.
나는 비몽사몽 속에서 그렇게 내 인생을 허비하느니 차라리 하루 종일 ‘포비보스(태양신 아폴론의 별명)의 감시 아래 땀을 흘리고 밤에는 엘리시움에서 잠을 자는 나무꾼이나 가장 비천한 머슴이 되겠다.
학식 있는 저자와 학식 있는 학생의 차이는 전자가 읽은 것을 후자가 옮겨 쓴다는 점이다. 학식 있는 사람은 독자성이 없는 고된 문필을 업으로 한다.
독창적인 글쓰기를 시키면 그들은 혼란에 빠지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지칠 줄 모르는 독서광들은 끊임없이 그림을 모사하는 사람들 같다.
그들은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려고 하면 살아 있는 자연의 형태들을 그릴 수 있을 만큼 자신의 눈이 빠르지 않고, 손이 떨리고, 색이 선명하게 잘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학식은 책과 같은 인위적 수단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지식이다. 경험이나 열정이나 취미를 추구할 때 흥미를 끄는 지식은 학식이 아니다.
학식은 학자들만이 아는 무엇에 대한 지식이다. 학자는 일상생활과 현장에서 가장 멀리 동떨어진 것, 별로 실용적이지 않고 경험과 무관하게 많은 단계를 거친 불확실성과 어려움과 모순으로 가득한 것을 최대한 많이 아는 박식한 사람이다.
그들은 타인의 눈과 귀로 보고 들으면서 우리에게 자신들의 견해를 믿으라고 한다. 학자는 사람과 사물보다는 명칭과 역사적 날짜에 대한 지식을 자랑으로 여긴다. 책만 아는 단순한 학자는 필시 책에 대해서도 무지할 것이다. ‘책은 책의 이용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주제를 모르면서 그 책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박식한 현학자는 책이 다른 책을 바탕으로 (그 다른 책은 또 다른 책을 바탕으로)만들어진 경우에만 책에 정통하다.
그는 앵무새처럼 되풀이한 자들의 책을 또 앵무새처럼 되풀이한다. 머릿속에는 출처에 출처를 거듭한 것들과 다른 데서 한 인용에 인용을 거듭한 것들로 가득 채우는 반면, 감각과 이해와 열의는 감금시켜 둔다.
그는 세상의 금언과 관습에 밝지 않고 개인의 특색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는 자연이나 예술의 표정에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그에게 “눈과 귀의 위대한 세상(윌리엄 워즈워드 인용)”은 가려져 있고 “지식”의 문은 하나 외에 “전부 닫혀 있다.(존 밀턴의 실낙원에서 인용)”
그의 자부심은 무지의 편을 들고, 그의 자존감은 자신도 가치를 모르면서 그걸 알 가치도 없다고 멸시하는 대상들이 늘어날수록 부푼다.
그렇다면 시는 아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시의 음보를 셀 줄 알고 희곡의 막을 구분할 줄은 알아도 그것의 혼이랄지 핵심 같은 건 전혀 모른다.
농사를 짓거나 집을 세우거나 나무나 철을 다루거나 수리할 줄 아는 기술이 없다. 노동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지도 그것을 사용할 줄도 모른다.
모든 학예 분야에 박식한 교수는 그것들에 관해 백과사전에 실을 기사는 쓸지언정 그 어느 것도 직접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
문제는 간단하다. 사람이 정말 이해하는 것은 모두 매우 작은 범위(일상사, 경험, 우연히 알게 된 것, 공부나 연습을 할 동기)에 한정되어 있다. 나머지는 꾸밈과 속임이다.
보통 사람들은 수족을 쓰는 습관이 되어 있다. 노동이나 기술로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열정을 표현할 화술도 있고 마음 내킬 때 경멸을 표현해 웃음을 유발하는 재치도 있다.
무엇보다도 어떤 시대에나 대중에게는 학자에 없는 상식이 있다. 대중은 스스로 판단할 때는 올바른 선택을 하지만 눈먼 안내자에게 판단을 일임할 때는 그릇된 길로 간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대개 무언가를 잘 고안해내고 편견에서 자유롭다. 셰익스피어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상상력이 참신하고,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와 달리 밀턴은 생각과 감정의 결이 천생 학자였다.
셰익스피어는 미덕의 옹호나 악의 배척과 같은 주제로 학교에서 글을 쓰던 습관이 없었다. 이 덕분에 도덕에 대한 논조가 꾸밈없고, 충실한 극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천재의 힘을 알고 싶다면 셰익스피어를 읽으면 된다. 학식의 하찮음을 알려면 셰익스피어의 주석가들을 연구하면 된다.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윌리엄 해즐릿 에세이집’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윌리엄 헤즐릿 지음, 공진호님 옮김, 아티초크 출판> * 윌리엄 헤즐릿 : 당대의 최고의 문장가요 에세이스트였다. 그는 자유사상가이자 이단아였고, 반체제 운동의 열렬한 옹호자였자. 1778년 영국 메이드스톤에서 유니테리언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93년 런던의 헤크니 뉴 칼리지에 들어간 그는 급진적 사상가들과 친분을 맺었다. 철학서 <인간 행동론>을 <정치 에세이>,<좌담>,<시대 정신>을 출간했다.
인생의 전환점, 예상치 못한 일에서 얻게 되는 것들!
1972~1973년에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1,037명을 대상으로 더니든 연구에서 조사한 결과, 오늘날까지 많은 이가 청소년기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들은 군복무를 자기 삶에서 중요하고 긍정적인 전환점으로 여겼다고 했다.
어떤 세대에게는 전쟁이, 다른 세계에서는 1960년대의 대격변이, 또 2008년의 경제 붕괴 혹은 코로나19 팬데믹 등이 닥쳤다. 이처럼 세대마다 감당해야할 시련과 위기가 있었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비극적인 사고, 정신 건강 문제, 갑작스런 질병,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등 저마다 위기의 시련이 있다.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예상치 못한 일과 그에 대응하는 방식이 우리 삶의 방향을 바꿀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디시어 속담에“사람은 계획하고 신은 웃는다.”라는 게 있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항상 힘든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운명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되기도 하는데 거기에는 대부분 인간관계가 포함된다.
좋은 관계를 키워두면 그 혼란의 긍정성이 증가하고 유익한 만남의 기회가 늘어난다. 여러분의 예전 사진을 찾아서 들여다보라. 그 사건이 우연하고 긍정적인 만남의 증거물일 수도 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은 ‘만약 내가 그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 를 절대 만나지 못했을 거야.‘ ’그날 버스를 놓치지 않았다면 … 와 우연히 만나지 못했을 거야.‘의 연속이다.
운명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는 것은 사실이다. 운이 좀 좋았다고 해서 그걸 자기 힘으로 얻은 건 아니며, 운이 나쁘다고 해서 그런 꼴을 당해도 싼 건 아니다.
우리는 삶의 혼돈을 뛰어넘을 수 없다. 하지만 긍정적인 관계를 많이 키워들수록 이 험난한 여정에서 살아남아 번창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더나든 연구원 설문지에서 “당신과 아내가 함께하는 가장 즐거운 활동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조국을 위해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우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정식 교육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손으로 집을 짓고, 의붓아들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키우고, 지역사회에서 매일 자원봉사를 한 트레비스는 그와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그냥 함께 있는 것.“이라고 답했다.
삶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처한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 자신을 이렇게 큰 그림에 비추어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까?
당연히 도움이 된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만 생각하다 보면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거나 관계를 맺기가 어려워진다.
때때로 뒤로 물러서서 더 넓은 시야를 갖고 우리 자신과 우리가 아끼는 사람들을 더 긴 삶의 맥락에 비춰보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관계에 공감과 이해를 불어넣는 훌륭한 방법이다.
삶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인생 주기에서 현재 처한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기억하자. 그러면 서로에게 느끼는 죄절감을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있고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결국 우리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한 관점을 얻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앞으로 달칠 위험한 커브를 미리 예측하고 대비하도록 서로 도울 수 있다.
튀르키에의 옛 속담에도 있듯이 “좋은 동반자와 함께하면 먼 길도 가깝다.”
<‘세상에서 가장 긴 행복 탐구보고서’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로버터 월딩거/마크 슐츠 지음, 박선령님 옮김, 비즈니스북스출판> * 로버터 월딩거 : 하버드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의 하버드 성인 발달 연구 책임자 그리고 수명연구재단의 공동 설립자다. 현재 정신과 의사 겸 정신 분석가로 활동 중 /마크 슐츠 : 하버드 성인 발달 연구 부책임자, 브린 모어 대학 심리학과 석좌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