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은 국제적인 상황을 변화시키며 유럽에 긴장을 불러왔다. 미국 주식시장과 뒤이은 금융 산업의 붕괴는 미국 경제와 긴밀한 유대관계에 있던 유럽 경제와 은행들에 커다란 타격을 주고 실업률을 증가시켰다. 또 유럽 각국은 금본위제도 폐지 등의 보호주의 경제정책과 긴축재정을 실시하여 실업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기존의 외환 질서가 붕괴하자 세계 경제는 침체되었고, 결국 과거의 적대국이나 새로운 국제질서는 비난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또한 이념과 권력에 근거하여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극단적인 운동이 전 유럽에 등장하였다. 이는 민주주의를 제약하였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많은 국가들이 독재 체제로 바뀌었다. 오직 소련만이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스탈린에 의한 강제적인 농업 집단화와 이어진 공업화 계획의 실패로 인해 상황은 더욱 심각하였다. 이에 반대하거나 반대한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이 축출되면서 소련의 사회계층은 사라지게 되었다
유럽에서 전쟁으로 가는 길
독일은 1923년 이후 경제적으로 안정되면서 극우나 극좌 세력이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전쟁에서의 패배와 베르사유조약으로 인해 도입된 민주주의는 그 뿌리가 대단히 약했으며, 결국 대공황의 돌풍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소련이 대공황을 피할 수 있었던 점을 강조한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공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많은 지지를 얻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강한 지도력을 갖춘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자들(나치Nazi)은 위대한 독일의 역사적 전통을 대변하며 중산층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굴욕적인 베르사유조약의 원상회복과 독일 민족의 통일을 목표로 하였으며, 독일이 직면한 문제들을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보수주의자들은 나치즘을 공산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유용한 무기로 보았고, 1933년 1월 히틀러가 총리로 취임하는 데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곧바로 보수주의자들의 지원이 필요 없어졌으며, 공포를 자아내는 비밀경찰과 집단수용소에 의해 유지되는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1934년 7월에는 ‘장검의 밤(Night of Long Knives)’이라고 불리는, 나치의 준군사조직인 나치 돌격대에 의한 숙청을 통해 육군을 손에 넣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서거와 동시에 히틀러는 스스로를 총통이라 칭하며 국가의 수반이 되었다.
초기에 대부분의 외국 정치가들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조치들을 회복하려는 히틀러의 시도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정해진 10만 명 이상으로 육군을 증강하고 공군을 창설하였을 때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히틀러도 상당히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점점 야심찬 계획을 실현해나갔다. 히틀러가 야심찬 계획을 실현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였다. 프랑스는 독일 동쪽의 국가들과 이미 방어 동맹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영국은 특히 나치보다 더 믿지 못하고 있던 러시아와의 협정 체결에 부정적이었다. 국내의 혼란에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프랑스는 점점 더 수세적인 마지노선(Maginot)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영국의 외교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수행할 의지도 없고 준비도 부족했던 영국은 ‘유화정책’으로 히틀러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가장 결정적인 유화정책은 히틀러가 비무장화되어 있는 라인란트에 군대를 파병하였을 때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더욱 자신감을 얻은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나치 당원들을 독려하여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합병에 성공하였다. 이어서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내에 독일 민족이 주로 거주하고 있는 주데텐란트(Sudetenland)의 양도를 요구하였다. 체코 정부는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독일과의 전쟁을 준비하였지만, 이와 반대로 전쟁 준비가 부족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1938년 9월 뭰헨에서 히틀러와 협상하여 주데텐란트의 합병을 용인하였다.
이러한 히틀러의 팽창정책은 영국 수상 체임벌린이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으며, 영국은 외교정책의 급격한 전환을 하고 피동적이지만 러시아와 협상을 시작하였으며 재무장을 시작하였다. ‘유화정책’은 결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 적이 없었다. ‘생활권’(독일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영토 범위-옮긴이) 확보라는 히틀러의 목표는 단순히 독일 민족의 재통일을 넘어선 것으로 여겨졌다.
독일 통치하의 유럽, 1940~1941년
독일이 점령한 유럽 대륙은 크게 독일 제국의 영토, 위성국이나 동맹국, 그리고 점령지의 세 가지 범주에 포함되었다. 제3제국(1933년 1월부터 1945년 5월까지 독일 나치 정권의 공식 명칭)에 즉각적으로 통합된 지역은 역사적으로 독일 영토였거나 독일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으로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모라비아 등은 전쟁 이전에 합병되었으며, 폴란드 회랑과 알자스-로렌 그리고 벨기에의 몇몇 지역이 전쟁 발발 이후에 합병되었다.
덴마크, 노르웨이, 프랑스의 비시 정부,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는 내부적인 자치 정부가 허용되었으며, 독일이 외교권과 군사작전 권한을 보유하고 전쟁이 진행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경제적 인적 자원을 착취한 지역들이다. 마지막 범주는 독일군 및 동맹국 군대에 의해 직접 통치된 지역으로 경제적 착취와 강제 노동이 강요되었으며 유대인, 집시, 그리고 정치적 적대세력과 같은 ‘불순한’ 요소들이 색출당한 지역이다. 여기에는 그리스, 알바니아, 세르비아, 중부 및 동부 폴란드, 벨로루시, 우크라이나가 포함되었다. 특히 폴란드, 벨로루시, 우크라이나의 세 지역에서는 인종청소 및 독일인 이주정책이 실시되었다.
이탈리아의 선전 포고로 인해 지중해 지역도 새로운 전구가 되었다. 이는 영국의 이익에 대한 분명한 위협이 되기도 하였지만, 반대로 영국 해군이 특정 지역을 공격하여 추축국(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연합국에 대항해 형성한 동맹)의 경제력에 피해를 줄 수 있는 기회의 장이기도 하였다. 지중해 지역에 대한 히틀러의 관심 부족은 이미 비시 정부(1940년 6월에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후, 비시에 세운 친독(親獨) 정권)에 프랑스의 지중해 해안 지역을 넘겨준 데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1940년 중반에 남동 유럽에 대한 히틀러의 정책은 지중해와 인접한 지역(유고슬라비아·그리스·알바니아) 등을 이탈리아가 지배하게 하고 독일은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태평양전쟁 발발
1941년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에서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루스벨트는 미국 내의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이후 전면 수출 금지 조치로 확대하였는데, 여기에는 석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의 수출 재개 조건은 명확하였다. 즉 일본군이 중국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수출 금지 조치를 번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1941년 8월에 열린 회담에서 루스벨트와 처칠은 독일이 더 큰 위협이지만 일본에 대해서도 강경한 태도를 취해 최대한 일본을 저지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정책은 불행하게도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일본군은 중국을 굴복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철수할 의도가 없었지만 장제스에 대한 추가적인 압박을 가하지 않고서 승리를 거두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물적, 인적 자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고노에(近衛文磨) 총리가 이끄는 일본 정부는 중국 사태가 해결된 후에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제안하면서 외교적 해결을 위해 계속 노력했지만 미국의 정책을 바꾸진 못했다. 10월에 전쟁성 장관이던 도조(東條英機) 장군이 고노에 총리 후임으로 총리가 되었다. 도조는 외교적 협상을 계속하는 한편, 협상의 마감시한을 11월 말로 정하였다. 그는 이 시점이 지나면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미국의 암호 해독 전문가들은 일본이 군사작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분명히 경고하였다. 그들은 매직(Magic) 작전으로 암호화된 일본 외교문서 송수신기(암호명 퍼플 purple)를 해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일본의 공격 대상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11월 25일 미 육군참모총장 마셜 장군은 태평양의 모든 미군 기지에 전쟁 대비 경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 내용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연락 체계도 미비하여 일본은 완벽한 기습 공격을 할 수 있었다.
12월 7일 일요일 새벽 나구모 중장이 이끄는 6척의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전투기는 하와이의 진주만에 정박 중인 미 태평양 함대를 공격하였다. 미 태평양 함대는 1940년 4월부터 전쟁 억제 목적으로 진주만에 배치되어 있었다. 당시 함대는 좁은 항만 때문에 어뢰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일본 조종사들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두 번에 걸친 공격으로 미 해군 함선 18척이 침몰하였고, 완파 2척을 포함하여 모든 전함들이 피해를 입었으나, 항공모함은 훈련 중이어서 공격받지 않았다.
또한 일본군은 187대의 미군 항공기를 파괴했는데, 대부분 태업에 대비하여 활주로에 집결해 있던 상태에서 공격을 받았다. 총 사망자는 2,403명이었다. 음모론자들은 루스벨트가 일본의 공격 의도를 알고 있었고, 미국 내에서의 고립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태평양 함대에 대한 공격을 묵인했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공격으로 인해 즉각적으로 영미 간에 대일본 동맹이 형성되었다. 처칠은 미국이 마침내 참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으며 이제는 승리가 확실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미국이 독일과의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는 개연성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있어 적은 일본이었다. 그런데 12월 11일 히틀러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그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전쟁은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대전이 되었다. 히틀러가 대미 선전포고를 한 것은 미국의 자원을 분산시켜 일본의 승리를 돕고(일본이 승리하면 영국과 소련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해 독일 잠수함 부대가 대서양의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힘의 균형이 바뀌어 1942년에 확실한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가 성공하지 못하자 장기적으로 미국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전쟁에 쏟아 붓게 되었고, 이로 인해 히틀러는 일본처럼 돌이킬 수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전시 미국
1940년 12월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이 ‘민주주의의 병기고’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실제로 연합군의 승리에 대한 미국의 공헌은 종종 무기 생산의 측면에서 설명되곤 한다. 미국은 8만 6,000대의 전차, 30만 대의 항공기와 6, 755척의 군함을 생산한 반면, 추축국 전체의 생산량은 전차 5만 5,500대, 항공기 15만 7,000대 및 군함 1,400척이었다. 이러한 생산량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원과 노동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관리하기 위해 루스벨트는 ‘전시 노동위원회’와 ‘전시 동원청’ 등의 기관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이 항상 효율적으로 조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물가와 임금은 법적으로 통제되고 있었지만, 노동력 징집이나 생산시설의 국유화 또는 전국적인 공공사업의 통제 계획은 없었다. 대신에 정부와 각 부처들은 기업을 통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고, 기업에서 능력을 발휘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정부의 새로운 부서에 고용되었다. 따라서 미국이 전쟁 중에 발휘한 어마어마한 생산능력은 대부분 일반 기업에 의해 달성되었다. 예를 들면 카이저 조선소는 무장상선을 만들었으며, 포드 자동차의 윌로우런 공장은 폭격기를 생산하였다.기업들은 세금 혜택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투자는 정부에 의해 재정상의 보증을 받았다.
생산성의 증가로 인해 뉴딜 정책(1933년대 불황 시 루즈벨트가 미국정부의 경제정책을 일신할 의도로 사용한 정책)이 직면했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었으며, 이것은 곧 다른 참전 국가들과 달리 미국에서는 전쟁이 번영의 시기였음을 의미한다. 연합군과 자국 군대의 끊임없는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기업들은 공장 가동 시간을 하루 24시간으로 늘렸다. 이미 수백만 명에 달하는 군인들이 복무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현상으로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졌고,
전쟁 이전에는 취업이 힘들었던 계층, 특히 흑인들이 더 많은 보수를 받고 숙련공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이 완전하게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지만 여성들 역시 더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었고, 선전 캠페인은 이전에는 일한 적이 없었던 중년의 중산층 여성들을 노동력으로 끌어들였다. 이러한 상황의 전개는 또한 인구의 대규모 이동을 가져왔다. 흑인들은 고립된 남부를 떠나 북부와 서부로 이동하였으며, 브라세로(bracero) 협정으로 20만 명의 멕시코인들이 북부로 유입되었다. 인종적으로 다양한 집단의 유입으로 인종 갈등도 일어났다.
진주만 공격(하와이 오아후 섬의 진주만에 있던 미국 해군기지에 대한 일본의 공중 기습공격, 1941년 12월 7일.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다.)으로 미국인들은 전쟁을 지지하며 하나로 통합되었다. 미국의 공헌은 종종 생산적인 관점에서 조명되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이 160만 명의 남녀 군인 및 연합군 중 최대 규모의 해군과 무장상선 그리고 전략 폭격 부대를 보유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맨해튼 계획(제2차 세계대전 중 이루어진 미국의 원자폭탄 제조 계획)의 결과물인 원자폭탄은 미국의 산업 및 과학적 노력의 가장 큰 성과였다.
나치 대학살
독일에서 나치의 지배가 시작된 이래로,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인구 ‘정화’였다. 열등하거나 불순한 인종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제거되어야 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와 같은 정치적 적대세력, 집시나 슬라브족, 동성연애자, 그리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해당되었다. 이를 위한 실행방법은 시간이 흐르면서 안락사, 집시의 몰살, 그리고 ‘최후의 해결책’ 등으로 점점 발달하였다. 제3제국 점령 초기 몇 년간 유대인들은 시민권과 경제적 자산을 박탈당하며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분리되었다. 1935년 제정된 뉘른베르크법으로 반유대주의에 대한 법적 기초가 확립되었으며, 유대인의 사업은 몰수되었다.
점령한 영토에서 대규모의 유대인을 다루는 ‘제3의 해결책’은 1940년 봄에 시작된 유대인 집단 거주 지역(게토)의 형성이었다. 유대인 집단 거주 지역은 바르샤바, 우치, 테레지엔슈타트, 같은 도시 내에 있는 제한지역이었다. 유대인에게 필수품을 지원하지 않아 바르샤바에서는 한 달에 2,000명이 굶어 죽었다. 일부에서는 몰살정책을 해결책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나치 국가안보국과 친위대 및 게슈타포로 혼합 구성된 처형 부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국가보안본부 휘하에 있던 준(準) 군사조직으로 인종청소와 학살을 전담하였다.)은 독일군의 바르바로사 작전에 뒤이어 나타났다. ‘인민대원 학살령’에 의해 모든 소련 인민위원들은 즉결 처형되었으며,
나치 친위대뿐만 아니라 일반 부대들도 슬라브 민족을 열성 인종으로 간주하여 제3제국을 위해 죽을 때까지 일하게 하거나 즉결 처형시키는 정책을 취했음이 분명하다. 아인자츠그루펜 부대는 독가스를 이용하는 이동식 처형트럭을 개발하여 특히 키예프처럼 유대인이 많은 도시에서 대량학살을 자행했으며, 1942년 초까지 이들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서 최소한 50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 이것이 ‘제4의 해결책’이었으나, 너무 많은 목격자들이 생겼다. 광신적인 나치주의자들은 기아와 처형으로 전체 유대인을 몰살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하였다.
‘마지막 해결책’은 대량학살로, 국가보안본부의 간부이며 ‘이주정책(resettlement, ‘죽음의 수용소’로의 이주를 의미하는 표현)’을 담당하던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통제하에 시작되었다. 첫 번째 죽음의 수용소는 헤움노에 세워져 1941년 12월 8일부터 하루에 1,000명 이상의 유대인이 이곳에서 학살되었다. 대량학살 정책은 군사작전처럼 호율적이고 비밀리에, 그리고 자원을 우선적으로 배분하면서 중앙집권적으로 운용되도록 하였다. 유럽의 점령 지역에서 모든 유대인들은 지역 경찰에 의해 체포된 후, 기차로 멀리 떨어진 수용소에 이송되어 독가스로 살해되었다. 아인자츠그루펜 부대의 실험을 통해 이제 산업화 수준의 학살이 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근처 비르케나우(Birkenau)에서는 건강한 유대인은 분리되어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가 결국 살해되었고, 어린이와 노약자는 독가스로 죽임을 당하였다. 당시 사용된 독가스는 ‘치클론B(Zykion-B)’로 청산(시안화수소)의 일종이었는데, 샤워를 한다고 유대인들을 속여서 방 안에 가둔 후 이 가스로 살해하였다.
전 유럽에 걸쳐 1만여 곳의 유대인 공동체가 사라졌다. 유대인 대량학살과 ‘유전자가 바람직스럽지 않아 개량이 필요한 민족(비게르만 민족)’에 대한 대규모 학살의 기록은 불완전하거나 나치가 범죄를 감추기 위해 없애버렸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살 규모에 대한 수치는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유대인 600만 명, 소련군 전쟁포로와 강제 노역자 300만 명, 그리고 여타의 민족 300만 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 지배하의 아시아
1938년 10월, 일본 총리 고노에는 아시아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 일본의 목표라고 선언하였다. 즉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형성하고 여기에 일본, 중국, 만주, 한국 및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의 동남아시아 식민지 지역을 포함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동아공영권’의 범위는 후에 필리핀까지 확대되었다. 이러한 계획은 범아시아주의와 반식민주의적 정서를 이용하여 일본이 아시아를 유럽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자유해방군으로 자처하면서 자국의 제국주의를 지원하려는 시도였다. 일부에서 경제적 통합이 이루어졌으나, 일본의 통치 역시 착취적인 방법이어서 유럽의 식민지 통치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일본은 점령한 영토를 매우 가혹하게 통치하였다. 노동력은 무자비하게 착취당했고 경제 자원은 약탈당했다. 한국은 특히 심한 고통을 받았고 일본군 위안부로 여성들이 끌려갔다.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합의 실패는 두 가지 결과로 나타났다. 첫째, 저항운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특히 공산주의자인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과 장차 독립을 약속한 미국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필리핀에서 그러했다. 둘째, 일본이 경제적·군사적 목적으로 점령한 지역은 도움보다는 큰짐이 되었다. 점령지의 경제는 일본의 국내 경제와 일관되게 연결되지 못하였고, 자원 수송로에 대한 보호도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 내부적으로 군대는 도조의 통치하에 국가를 효과적인 독재체제로 지배하고 있었다. 일본 사회는 1920년대부터 꾸준히 군국화되었다. 군대는 대공황 기간과 그 이후에 더 큰 권력을 잡게 되자, 전통적인 가치와 국민들의 희생을 강조하는 애국주의적이고 절제된 사회 문화를 형성하려고 하였다. 군대는 ‘국방 국가’를 건설하고 싶어했으나, 권력은 집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분산되어 있었다. 실질적으로 헌법적 상징일 뿐인 천황의 지배 아래 대본영, 전시 내각, 그리고 재벌과 연계된 핵심적인 정부 부처 등은 모두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 종종 서로 경쟁하였다. 노동력은 학생 300만 명과 100만 명 이상의 중국 및 한국 노동자들에 의해 충당되었는데, 후자는 임금을 준다고 유혹하거나 강제로 동원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200만 명의 한국인들이 군대에 징집되었다. 일본의 총동원은 적절한 계획 하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산업은 모두 이윤과 생산 통제권을 가진 민간 기업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전쟁의 세계적 영향
표면상으로, 일본 제국의 붕괴를 제외하면 종전으로 아시아 각 나라의 정치 상황은 예전 상태로 되돌아갔다. 미국은 영향력이 없던 작은 국가들과 함께 일본의 점령 지역을 인수하였다. 미국이 천황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한 것은 일본에 입헌주의가 지속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휘권을 가진 맥아더 장군은 일본을 자본 민주주의 국가로 변화시키기 위한 개혁을 제안하였고, 전범재판을 열어 도조를 처형하였다.
그러나 급진적인 변화는 일본 사회에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인들은 군국주의 시기를 단순히 과거의 일로 치부할 수 있게 되었다. 전후 일본은 쉽게 극동의 경제대국 지위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아시아의 다른 지역은 사실상 급진적인 변화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한국의 북한 지역은 소련이, 남한 지역은 미국이 각각 점령하였고, 양측은 그들이 선호하는 정권을 수립하였다.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은 1950년 6월 남침을 감행하여 한국전쟁을 일으켰다. 한국전쟁은 냉전 그 자체를 지속시킨 냉전을 위한 충돌 전역이었다. 중국에서는 장제스 군대가 거의 즉각적으로 마오쩌둥의 공산당과 새로운 분쟁을 일으켰다. 미국의 원조와 전쟁 동안 양성된 대규모 군대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은 패배하여 대만으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자신들이 진정한 중화민국이라고 선언하였다. 대만은 1970년대까지 일본처럼 미국의 보호와 투자를 받아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중국 본토에서 마오쩌둥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이듬해에 소련의 동맹국이 되었다.
1941년부터 1942년까지 일본에 의해 유럽 국가들의 아시아 식민지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일본의 패전 이후 서방에서 교육받은 식민지 엘리트들은 독립을 추구하여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원칙들이 혼합된 자유화 계획을 제시하였다. 영국은 버마, 말레이 반도, 싱가포르 및 보르네오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였고, 한때 미국이 노렸던 중국의 일부를 차지하는 조건으로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원했다. 베트남은 종전과 함께 독립을 선언하였다. 미국의 지지를 예상했으나 대신 프랑스와 끊임없는 협상을 한 후에야 독립전쟁에 돌입하여 30여 년간 다양한 형태의 전쟁을 벌였다. 미국은 필리핀을 독립시키는 한편 그 대신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태평양에서 확실한 전략적 요충지인 괌을 확보하였다.
비록 목표를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도 똑같은 문제에 부딪쳤다. 전쟁과 유럽 점령 지역에 대한 책임 그리고 본토에서의 사회주의 개혁 프로그램으로 재정이 파탄에 이르자, 애틀리 정부는 아시아에서 계속 식민지를 유지할 수 없음을 재빨리 깨달았다. 민주국가로 남아 있는 조건으로 영국은 인도를 1947년 미련 없이 분리 독립시켰다. 버마와 실론도 인도와 마찬가지로 영국의 식민지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영국에 대한 어떤 존경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지배는 아시아 각지에서 빠르게 끝을 맺었다. 똑같은 현상이 아프리카에서도 재현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까지 전후 15년 동안 유럽 제국의 아프리카 식민지들 대부분은, 비록 제국주의 국가들 중 일부는 저항하였고 특히 프랑스는 알제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지만, 독립을 쟁취하거나 그 길로 나아갔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들 강대국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힘이 급격히 줄어들어 더 이상 군사력으로 식민지를 지킬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들의 신속한 이탈은 비식민지화가 독립을 야기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세계의 많은 지역은 안정되거나 평화로워지지도 않고, 번영을 누리지도 못한 채 남아 있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의심의 여지없이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스스로 운명을 책임지도록 만들었다. 일본, 독일, 이탈리아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시작된 전쟁은, 비록 그 대가와 희생은 막대하였으나 그런 측면에서 성공적이었다. 서부 유럽은 경제적 무질서를 바로잡고 예상치 못했던 평화시기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독일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유럽 통합을 강요하기보다는 자발적인 움직임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은 전쟁으로 인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위대한 번영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부 요약 발췌, 마틴 폴리 지음 , 생각의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