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조식 선생 이야기!
살면서 좀 융통성 없고 고루한 남편을 보고 조선시대 사람이라고들 빗대어 아내들은 말한다. 이해는 가지만 깊이를 모르시는 말씀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19세기 중반부터 개신교 역사가 시작되었고 전통적 불교도 있었지만 규범을 강조해온 유교사상이 대다수 우리 가정에 깊숙이 배어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자의 든 타의 든 자신을 성찰할 시간에 인색한 우리에겐 영적인 잣대로는 감히 선현들의 영역을 넘볼 수 가 없다고 본다. 약 450년 전쯤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가 있었다면 동시대에 거목 남명 조식(1501-1572), 율곡이이(1536-1584)와 퇴계이황 선생(1501-1570)이 우리나라에 턱 버티고 있었다. 한분 한분 위대한 업적을 어떻게 일일이 어찌 논하겠느냐만 오늘은 남명 조식선생의 업적을 음미해보고자 한다. 마침 몇 년 전 보다 공개된 자료가 많아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중산-
생애 [편집] <남명 친영>
1501년 연산군 7년 경상도 삼가현 토골(현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 에서 승문원 판교 조언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였지만, 과거에는 1,2번 응시하고 이후로 응시하지 않았다. 1527년 중종 22년 부친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고, 1531년 생계가 어려워지자 처가인 김해의 탄동으로 찾아가 산해정을 짓고 제자교육에 힘썼다. 1539년 38세에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벼슬을 고사하였고, 1544년 관찰사의 면담도 거절하였다. 1549년 명종 4년 전생서주부에 특진되었으나 고사하였고, 집 근처에 계복당과 뇌룡사를 지어 강학에 전념하였다. 1556년 종부시주부로 다시 부름을 받았지만, 역시 고사하였고 1544년 벼슬길에 나가라는 이황의 권고도 거절하였다.
1561년 60세 때 지리산의 덕천동으로 옮겨 산천재를 짓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독특한 학문의 체계를 이룩하였다.
그의 제자로 김효원, 김우옹 등 저명한 학자들과 정인홍 같은 관료, 의병장 곽재우가 배출되었다. 일반적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우도 지역(오늘날의 경상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학맥을 형성하였다. 유명한 글로는 '단성소'라고 불리는 '을묘사직소'가 있다. 선조 때 대사간, 광해군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사상 [편집]
조식은 16세기 당시 경상좌도의 이황과 나란히 경상우도를 대표하던 유학자로서 양측이 다 우수한 문인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개중에는 두 문하에 모두 출입한 사람들도 있었다. 고려시대에 성리학이 전래된 이래 그것의 도입과 전개를 주도한 학자들이 영남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당시 영남의 좌․우도를 대표한 이들은 동시에 조선 유학을 영도하는 위치에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특히 경상우도는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등 영남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으로, 사림파의 실천적 학문 전통 가운데서 성장한 조식은 개인적으로 사림파의 인물들과 밀접한 인적 관계로 맺어져 있었으며, 그 집안의 학문적 배경도 사림파에 속했다. 그러한 까닭에 그는 평생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는 중국 송대의 학자들에 의해 이미 완성되었고, 남은 문제는 오로지 실천이라고 하는 원, 명대로부터 조선 전기로 이어지는 유학의 학문적 입장을 강조하였다.
조식이 말하는 실천에는 물론 ≪소학(小學)≫과 ≪가례(家禮)≫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적 예의 실천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유학의 본령으로 생각하는 ≪대학≫의 학문관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면이 강하다. 즉 유학자는 고답적인 이론에 매몰되어 현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실학적 학문관이다. 이는 성(性)과 천도(天道)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하고자 하지 않았던 공자 이래로 유학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된 견해이기는 하지만, 특히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학문적 문제의식의 핵심을 이룬 것이었다. 그러므로 조식은 조선 전기 사림파의 실천적 학풍과 조선 후기 실학파의 현실을 중시하는 학풍을 이어주는 사상사적 고리로 간주될 수 있다.
조식은 또한 우리나라의 유학자들 가운데서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그가 사직소를 통해 당대의 정치에 대해 과감한 비판을 행한 데에서 잘 드러나 있지만, 또한 역대의 인물에 대해 그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에 따라 비판을 감행한 데서도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성호 이익 같은 이는 그에 대해 “우리나라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東方氣節之最)”이라는 찬사를 부여하였고, 또한 퇴계학파는 인(仁)을, 남명학파는 의(義)를 중시한 점을 그 특징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대체로 조식 및 남명학파에 대한 공통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조식의 역대 인물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출처(出處), 벼슬에 나아갈 때와 나아가지 말아야 할 시기에 대한 명철한 판단 여부가 그 기준을 이루었다. 그는 제자들에 대해서도 “출처는 군자의 큰 절개”라 하여 이를 매우 강조하였다. 그 자신은 한평생 열 차례 이상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받았지만, 한 번도 취임한 적이 없었다.
산청군 덕천서원(德山書院)에 배향하였다. 처음에는 남명 조식 선생의 위패만 봉안했다가 최 수우당이 사절하자 수우당(守愚堂) 최선생을 종사 했다. 그러다가 10년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병화로 소실되자 중건(重建)했으며 광해군 원년 1609년에 사액(賜額) 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숭덕사(崇德祠), 경의당(敬義堂), 동무(東무), 시정문(時靜門), 세심정(洗心亭)이 있는데 수년전 국가보조로 담장과 홍전문(紅箭門), 서무, 관리인 막사가 지어졌다.
(4) 조식이 쓴 책
「남명집」,「남명학기유편」,「파한잡기」학기유편(學記類編),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등이 있다.
조선 전기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남명 조식(1501-1572)은 평생 벼슬을 사양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경계하며 살았던 올곧은 선비로, 퇴계 이황과 대 유학자로 쌍벽을 이룬 인물이다.
특히 그는 평소 '성성자'라는 방울과 '경의검'이라는 칼을 차고 다니며 선비 정신을 다잡고 생활했고, '실천궁행(實踐躬行)'을 덕목으로 삼아 언제나 자신이 터득한 도를 실천으로 옮기려 했다.
조식은 또한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문정왕후를 과부로, 어린 국왕 명종을 외로운 아들로 표현하며 국정을 비판한 상소문 '을묘사직소'로 유명하다. 이 상소문에 명종은 분노하여 엄중한 벌을 내리고 싶어했지만 재야의 영수였던 조식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조식이 오르고 올랐던 지리산과 61세부터 꼬박 10년을 머물렀던 경남 산청군 산천재를 찾는다. 조식이 지리산을 바라보며 후학을 양성한 산천재에는 그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유적지가 있고 지금까지 후손들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남명조식은 학자들사이에서는 조선시대 최대의 철학자로 손색이 없다고 말할정도로
인정을 받는 깊이의 사상을 가진 인물이지만 북인정권이 서인의 쿠테타에 의해서
붕괴되는 바람에 (가치가 없어지지는 아니해서 조식사상의 깊이를 증명할수는 있지만)사실상 대폭 은폐된 셈이다.
지리산과 南冥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두사충의 막하에는 풍수가 나학천(羅鶴天)이 있다.
그는 경상도를 책(柵)형, 즉 산줄기들이 둥우리처럼 두르고 있다고 했다. 오늘날 지도책으로 살필 적 그의 관찰력은 정확했음이 드러난다.
태백산에서 지리산까지의 산줄기(백두대간의 일부)와 지리산에서 김해 분산까지의 산줄기(낙남정맥).
또한 태백산에서 부산 몰운대에 이르는 낙동정맥들. 이렇게 백두대간 낙동 낙남정맥들이 울타리처럼 가둔 그곳이 바로 경상도이며 낙동향리(洛東鄕里)들인 까닭이다. 그중 낙동향리를 품은 산들 중에서도 지리산과 소백산은 풍수상 중요시 된다.
지리산은 민족의 영산(靈山)이기에 오늘날에도 당당히 국립공원 제1호라는 명칭부여에서도 알 수 있지만 소백산도 품새의 압권으로 인해 당대 풍수가 남사고 마저 큰절을 올렸고 정감록의 십승지가 절반가량이나 몰려 있는 풍수적 국보급이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에 있다는데 어찌 이러한 지령의 산세에서 인걸이 없을소냐. 1501년, 소백산과 지리산은 우리 민족에게 큰별을 두개나 내려 주었다. 하나는 소백산하의 안동향리에서 탄생한 퇴계(退溪)이황 (李滉)이요, 또 하나는 지리산하 삼가(三嘉)향리로 내려준 남명(南冥) 조식(曺植)이다.
퇴계와 남명.
퇴계학은 설득력으로 품어주는 자모(慈母)와 같아 소백산의 품새이며, 남명학의 직선적이고 대쪽같은 엄부(嚴父)의 기풍은 지리산의 기세를 닮고 있다.
사람들은 두 문하를 물줄기로서도 구별짓기도 했다. 낙동강 좌편에 자릴한 까닭에 퇴계문하는 강좌학파(江左學派)요, 또한 낙동강 우편에 자리한 남명문하를 강우학파(江右學派)라 칭했었다.
이렇듯 산줄기의 기풍과 물줄기로서 학파를 드러낸 인걸의 탄생에는 전래되어 왔던 풍수설마저 자릴한다.
옛적 풍수도인이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 있던 어떤 집 한채를 두고서 큰별이 태어나는 대단한 명당이라며 인걸은 유(酉)년에 태어난다고 예언을 하였다. 다음해가 바로 신유(辛酉)년으로 6월 26일에 남명이 탄생했다.
풍수하는 사람으로서 어찌 이를 지나칠 수 있겠는가. 지리산 천왕봉에서 삼가면 토동의 현장으로 잠시 하산해보았다.
주위의 산세가 아직도 백두대간의 험준함을 못벗고 있는데 유독 토동만은 부드럽게 감싸는 물길에다 순하디 순한 형을 보여준다. 토끼라는 토(兎)동의 지명과 그처럼 순한 지령(地靈)의 세(勢).
한눈에 옥토망월형(玉兎望月形)임이 잡혀왔다. 남명이 학문을 논했던 뇌룡정(雷龍亭)의 총관리자인 이길영씨를 아침에 논둑에서 만났다. 혹 이곳에 토끼에 관련된 풍수설이 없냐고 물었다.
옥토망월형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한 이씨는 그것이 남명의 출생을 풀어내는 직접적 열쇠라는 것은 정작 모르고 있었다. 남명의 생가는 토끼의 어느 부위에 해당되느냐고 물었다.
배(腹)부위 쯤이라는 것이 아닌가. 이정도면 풍수도인이 아닐지라도 풍수기초만 알면 쉽게 풀어 버릴 수가 있다. 땅(地氣)에 있는 옥토끼는 암컷이다. 이러한 옥토끼가 망월(望月), 즉 달을 쳐다 본다는 형상이다.
그런데 달에는 계수나무 밑에서 떡방아 찧고 있다는 옥토끼 전설이 있다. 이는 하늘(天氣)에 걸린 것이기에 수컷이 된다.
이러한 예언이 있었던 1년 후 남명은 탄생했고 인걸은 뇌룡정(雷龍亭)에서 우레와 같은 직언을 용상(龍床)에다 터트린다.
당시의 왕인 명종(明宗)은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등극함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이어졌고 외척들이 득세하여 을사사화로 선비들을 무수히 죽였던 암흑기였다. 바른말하는 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자 탐관오리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짰다.
이러한 난세의 병폐를 지적한 직언의 상소문이 남명에게서 터져 나왔던 것이다. 한마디로 뇌성벼락, 그것이었다. {…왕대비는 세상물정 모르는 일개 과부에 불과하고 임금은 한갖 어린아들이니…제아무리 성현이 정승자리에 있다해도 국사를 바로 잡을 수는 없다…}.
이렇듯 대쪽 같은 남명의 기품은 지리산의 기상(氣像)과도 같음이다. {봄산 어딘들 꽃과 풀이 없으리오/천왕봉이 하늘에 닿는 듯 자랑스럽다/빈손으로 자릴잡아 먹을 거야 없겠지만/맑은 물이 10리나 흐르니 마시고도 남겠네}(春山底處無芳草/只愛天王近帝居/白手歸來何物食/銀河十里喫有餘)
남명은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덕산의 물줄기 앞에다 산천제(山天齋)를 짓고서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지리산 물줄기로 마음을 씻고 정신은 천왕봉처럼 우뚝 솟아 지리산하 남명학의 기풍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천석의 거대한 종은/큰것으로 치지 않으면 울리지 않듯/지리산의 기상인 천왕봉은/하늘이 울지라도 울리지 않는다} (請看千石鍾/非大無聲/爭似頭流山/天鳴猶不鳴)
하늘이 울지라도 지리산의 기상은 울지 않는다는 남명 사후 20년.
하늘이 무너지듯 국란이 터졌다. 임진왜란이었다. 남명의 제자들은 모두 의병장이 되어 일어섰다. 천왕봉의 칼을 잡고 지리산을 방패로 삼아 기고만장한 왜적들을 지리산하의 낙동향리에서 쓸어 버렸던 역사에서 지리산기상의 장렬함이 드러난다.
1615년 남명 조식의 제자였던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이 신도비를 세웠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하자 북인들은 실각하게 되었다. 이때 남명의 신도비도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덕산(德山)에 신도비를 세웠고 남명 조식의 고향인 삼가(三嘉)에 우암 송시열이 신도비를 세웠다. 덕산의 신도비는 파손되었고 삼가의 신도비는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건해왔다.
[출처] 남명조식신도비 [南冥曺植神道碑 ] | 네이버 백과사전
남명의 제자인 정인홍(鄭仁弘)은 조선 중종 30년(1536년)에서 광해군 15년(1623년)까지 살아 간 산림학자이자 영의정을 역임한 대정치가로, 현 합천군 가야면 사촌리에서 출생했다.
자는 덕원(德遠)이고 호는 내암(來庵)이며 본관은 서산(瑞山)이다.
그의 시조는 정신보(鄭臣保)로서 본래 중국 남송 절강성(浙江省)사람으로, 인주태수로 있던 정신보가 남송이 망하고 몽고의 원이 들어서자 충청도 서산에 살게 되었다. 그의 아들 정인경(鄭仁卿 1267 - 1305)이 충렬왕을 도와 공신이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서산군의 호를 받았고 죽은뒤 양열(襄烈)이라는 시호를 받음으로써 관향을 서산으로 칭하게 되었다.
정인홍의 선조는 고려 말에는 중앙에 진출하여 재경(在京)하는 사족(士族)이었으나 조선에 들어와서 지배세력의 재편과정을 겪으면서 지방으로 하향하여 몰락하였으나, 그의 5대조가 다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시작한다. 그의 아들 성검(成儉)은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무안현감(務安縣監)을 지냈다. 그는 합천 사람 판관 경주 김순생의 여(女)와 혼인 하여 금릉으로부터 합천으로 이거 비로소 합천 사람이 되었다. 성검의 아들 희(僖)는 사마시를 거쳐 삼가현감이 되었고 후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증조가 사림파였던 김종직에게 사사(師事)하여 재야사림의 학문적 풍토를 집안에 심었다.
당시 정인홍의 외계(外系)와 처계(妻系)를 살펴볼 때 토착적 세력이 강하고 임진왜란 전후 당시까지의 자녀균분상속제와 연관하여 사회경제적인 토대가 유력(有力)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鄭仁弘 (號:來庵,字:德遠) : 1536년(중종30)生 ~ 1623년(인조1)卒
○ 1536년 (중종30): 現 합천군 가야면 사촌리에서 출생 (사마방목에 1536년생)
○ 1546년 (명종1): 해인사에서 독서함. (만10세)
- 이 때 지은「영송(詠松)」이라는 한시(漢詩)가 남아 있음.
*1548년에는 안음현이었던 現 거창 북상면의 ‘갈천 임훈(葛川 林薰, 1550~1584)’에게 잠시 수학함.
○ 1550년 (명종5): 現 삼가 외토리 토동마을「계부당(鷄伏堂)」에 ‘남명 조식’을 찾아가 입문(入門)함. (14세)
○ 1558년 (명종13): 사마시 합격 (22세)
○ 1570년 (선조3): 합천 유생 문경호 등이 찾아와 배움. (34세)
- 후일 1592년 5월 임진왜란 때 내암 門人들이 의병활동의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됨.
○ 1572년(선조5): 산청의 산천재에서 스승인 ‘남명 조식’의 임종을 지켜 봄. 스승의 행장(行狀)과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음. (36세)
○ 1592년(선조25) 5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창의함. (56세)
- 現 합천 가야 숭산동에서 약 3천명의 의병으로 창의함.
*이 때 창의한 합천사람으로는 전치원ㆍ이대기ㆍ전제ㆍ허자대ㆍ이흘ㆍ정질ㆍ정진철ㆍ윤탁ㆍ윤선ㆍ박사제ㆍ박사겸ㆍ박엽ㆍ진극신ㆍ권양ㆍ송희창ㆍ송희순ㆍ송희철ㆍ노흠ㆍ노순ㆍ조계명ㆍ하혼ㆍ문경호ㆍ박이장ㆍ문홍도ㆍ조응인ㆍ윤담손ㆍ정인영ㆍ정인함ㆍ문려ㆍ안극가 등등임.
- 6월에 진주목사, 7월에는 제용감정에 제수됨.
* 남원의 조경남(趙慶男)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정인홍은 자신의 전공(戰功)을 조정에 보고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 알고 있는 공로는 남보다 못하지만 사실은 경상도 의병장 가운데 정인홍의 공로가 으뜸이라고 증언하고 있음.
○ 1593년(선조26): 성주를 수복한 후, 국가재건계획이 담긴「사의장봉사(辭義將封事)」라는 사직상소를 올리고 영남 의병대장을 사직함. (57세)
○ 1615년(광해7): 궤장(?杖)을 하사 받음. (79세)
- 3차례 광해군을 독대하고 백성을 위한 구황책을 건의ㆍ실행케 함.
- 인목대비 폐모(廢母) 논의에「전은(全恩)」을 주장하고 광해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합천 가야 향리로 낙향, 소위 인조반정으로 죽임을 당할 때까지 서울에 올라가지 않았음.
○ 1618년(광해10):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3차례 사직상소를 올린 이후에는 죽임을 당할 때까지 글로써 조정에 상소하지 않았음. (82세)
○ 1623년(인조 즉위년) 4월: 소위 인조반정에 의해 만88세에 죽임을 당함. 묘소는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탑골에 있음.
* 80살이 넘거나 정승을 지낸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는「경국대전」및「대명률」의 규정을 무시한 서인(西人)의 무고날조에 의해 現 합천 가야에서 서울로 압송된지 5일만에 죽임을 당함. 제자인‘동계 정온’이 시신을 거두어 합천에서 장례를 치룸.
- 이 때(그 후) 現 합천 묘산의 교리 조정립은 중도부처ㆍ정언 조성생은 파직, 가회의 우참찬 윤선 파직, 고령의 이조좌랑 박종윤은 중도부처, 함안의 부응교 오여은 및 수찬 오익환 위리안치, 의령의 이조정랑 유활 파직, 합천 가야의 지평 정결, 고령의 승지 박종주 등은 처형되는 등 많은 정인홍 문인(門人)들이 화를 당함.
○ 1629년(인조7): 합천군이 정인홍의 고향이라 하여 합천현으로 격하됨. 15년 후인 1644년(인조22)에야 합천군으로 승격됨.
○ 1631년(인조9): 합천인 정한(鄭澣)이 북인(대북) 잔당을 규합하여 광해군 복위을 계획하다 鄭澣 등 30여명이 정형(正刑)을 받고, 10여명이 죽고, 6명이 유배됨.
○ 1931년: ‘단재 신채호(신천영과 같은 고령申氏로 선조가 무신사태 때 연루되어 화를 당함)’는 여순 감옥에서 홍명희에게 쓴 편지에, “「정인홍공약전(鄭仁弘公略傳)」을 지을 계획이었으나 자신과 함께 매몰될지 모르겠다”고 하였고, 우리나라 삼걸(三傑)로 을지문덕ㆍ이순신ㆍ정인홍을 꼽았으며, 특히 정인홍의 개혁정신을 높이 평가함.
○ 1983년: 영인본인「내암집」을 상하 2권으로 발간함.
○ 1997년 12월: 정인홍 관련 고문서 및 서적ㆍ교지 등 131점이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330, 331, 332호로 지정됨.
○ 1546년(명종1) 해인사에서 공부할 때 지은 「영송(詠松)」
*소나무는 만10살인 ‘정인홍’ 자신을, 탑은 판결사(判決使)인 함양 출생 ‘양희(梁喜: 이조참판 역임)’를 비유하여 지은 한시(漢詩). 그 후 정인홍은 ‘양희’의 사위가 됨.
작고 작은 외로운 소나무가 탑 서쪽에 서 있으니, 一尺孤松在塔西
탑은 높고 소나무는 낮아서 서로 가지런하지 않네. 塔高松短不相齊
오늘날 외로운 소나무가 작다고 말하지 마오, 莫言此日松低塔
소나무가 자란 뒤에는 탑이 도리어 작으리. 松長他時塔反低
○ 1595년 왜적과 화의(和議) 주장이 나오는 등 국론이 분열되자 ‘내암 정인홍’이 주화론자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지은 「과무계(過茂溪)」
*現 고령 성산면 무계지역을 지나면서 지은 한시(漢詩)
필마로 옛 싸움터 지나노라니, 匹馬經過舊戰場
강물은 한을 품고 유유히 흐르네. 江流遺恨與俱長
지금 그 누가 왜적과 주화하려 하는가, 於今誰唱和戎說
장군과 사병은 이미 원통하게 죽었는데. 將士當年枉死亡
옥계서원 (玉溪書院)
소재지 경남 합천군 봉산면 술곡리
율곡 이이의 유물인 『격몽요결 』과 『해동연원록 』등을 소장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이(1536∼1584)는 조선 중기 학자이며 정치가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이다.
옥계서원은 영조 3년(1725)에 지금 있는 자리에서 4㎞ 정도 떨어진 향옥동에 세웠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던 것을 고종 6년(1867)에 마을 동쪽 200m 지점에 다시 세웠다.
서원의 건물로는 강당, 소원사, 내삼문, 외삼문, 관리사 등이 있다.
강당은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소원사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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