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도를 바꾸면 인생도 바뀐다
전문강사로 나선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비행기가 결항이 되거나 연결편이 순조롭게 이어지지 않으면 짜증과 실망을 주체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하지만 여행이 잦을수록 더 자주 비슷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제는 스케줄이 뒤엉키는 상황에서도 마음을 다잡는 능력이 생겼다. 낙천적인 태도를 가지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할 수 있다.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그 환경을 바라보는 시각을 수정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이른바 ‘발상의 전환’을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일단 몸에 배면 그 다음부터는 거의 반사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이 나온다.
올해 마흔 살에 들어선 척이라는 친구는 스무 살 때 앓았던 암이 재발해서 작년부터 투병중이다. 이번에는 종양이 중요한 장기들 한복판에 들어앉아서 방사선 치료가 불가능했다. 형편이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었지만 척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했으며 밝은 미래에 초점을 맞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방사선 치료가 불가능했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음이 드러났다. 때마침 척이 다니는 세인트루이스 병원의 담당의사는 방사선 치료를 할 수 없는 암 환자에게 사용할 약물을 시험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척의 종양은 전통적인 방식을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실험적인 치료법을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담당의사는 척의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보고 신약을 투여해도 좋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정맥에 연결된 튜브로 항암제를 투입하는 동안에도 척은 자리에 눕지 않았다.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아령을 들어 올리는 등 운동을 계속했다. 암 병동 직원들은 정말 그가 암환자인지 미심쩍어하며 이야기하곤 했다. “얼굴이나 행동이 전혀 환자 같지 않아서요.”신약을 투여한 지 몇 주가 지난 뒤에 척은 진찰을 받았다. 담당의사는 놀랍고도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고 했다. “종양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요. 다 사라졌습니다.” 의사는 종양을 이겨낸 것이 실험중인 항암제 덕인지, 척의 태도 때문인지, 기적인지, 아니면 그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지 자신 있게 설명하지 못했다. 다만 척이 암을 이기고 두 발로 병원을 걸어 나와서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결론만 말해 두겠다.
난관을 돌파하는 네 가지 태도(감사하는 태도, 행동하는 태도, 공감하는 태도, 용서하는 태도)를 선택하라. 내가 공감의 진수를 배운 건 2009년 오스트레일리아에 갔을 때 파티에 참석한 친구의 어린 딸을 통해서였다. 꼬맹이는 그맘때 아이들답게 요모조모 나를 살피면서 좀처럼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파티가 끝나고 돌아갈 때쯤 그 꼬마에게 아저씨를 한 번만 안아 달라고 하자, 아이는 수줍게 웃으며 조심스레 걸어와 멈춰 섰다. 그러더니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슬그머니 뒷짐을 지고는 내 어깨에 머리를 걸치고 목을 교차시켰다. 내가 다른 이들과 포옹하는 방식 그대로였다. 방안에 있던 이들은 나를 배려하는 꼬마의 모습을 보며 다들 깜짝 놀랐다.
공감은 대단한 재능이며 선물이다. 베푸는 쪽만 아니라 받는 편에서도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뿌리 깊은 가난과 엄청난 고통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을 여행할 때마다 그곳 주민들의 대응 방식을 보며 크게 감탄하곤 한다. 그들은 남자나 여자, 어린아이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얼마 전에 다녀온 캄보디아에서도 그랬다. 하루종일 집회를 인도하고 났을 때 나는 거의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주최 측 인사가 웬 꼬마가 나를 만나려고 여태까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나가보니 나보다 조금 작아 보이는 아이가 흙바닥에 홀로 앉아 있었다. 파리들이 달라붙어서 마치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것 같았다. 머리에는 상처가 나 있었고 살갗은 터져서 벌어진 채로 벌겋게 부은 상태였다. 몸에선 쓰레기 썩는 냄새가 났고 두 눈은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처럼 툭 튀어나와 있었다. 하지만 그 눈망울에는 나를 향한 동정이 가득 배어 있었다. 꼬마는 내 휠체어로 다가오더니 아픔을 어루만져 주려는 듯 내 뺨에 머리를 기댔다. 내가 얼마나 힘들지 그려보고 깊은 공감을 표현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아빠엄마를 잃고 몹시 힘들게 사는 아이였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캄보디아 쪽 관계자에게 아이에게 뭐든지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먹고 자고 보호받을 만한 시설을 찾아보겠다고 약속했다. 그 꼬마가 어떤 역경을 헤쳐 나왔으며 얼마나 힘든 삶을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대단히 고상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처지를 돌아보고 불쌍히 여긴다는 건 보통 능력이 아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고 따듯하게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닉 부이치치의 허그”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닉 부이치치 지음, 역자 최종훈 님, 두란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