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믿음의 승부다
성경은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한다. 열 살 전후로 좌절의 시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신체적으로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모자라는 건 단 하나, 바로 믿음이었다. 그때는 오직 눈에 보이는 것들만 믿고 의지했다. 자연히 가능성보다는 한계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계와 부족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절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다. 무엇이든 꿈꾸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고 길을 열어가라. 차질이 생기거나 비극적인 상황에 부닥친다 해도 모든 일에는 선한 뜻이 숨어 있음을 믿으라. 비극적인 사건이 커다란 기쁨으로 변할 수도 있다.
2008년, 강연 차 하와이에 갔다가 세계적인 파도타기 선수인 베다니 해밀턴을 만났다. 서핑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2003년 타이거 상어의 공격을 받고 왼팔을 잃은 여성 서퍼를 기억할 것이다. 이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그녀는 고작 열세 살에 불과했다. 베다니는 혈액의 70퍼센트를 잃어버릴 만큼 출혈이 심했던 참혹한 일을 겪고도 다시 파도타기 선수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은총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지금은 나처럼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힘을 불어넣고 믿음을 나누는 사역을 하고 있다. 그녀는 그날의 사고가 여러 면에서 축복이었다고 고백한다. 시합에 나가 선전할 때마다 저절로 “인생에는 한계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녀는 끔찍한 일이 생긴다고 해도 거기서 선한 열매를 거둘 수 있음을 굳게 믿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용기가 불끈 솟아서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특별한 일을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파도타기를 배워 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베다니는 두말 않고 일어서더니 하와이 와이키키 바닷가로 날 데려갔다. 너무나 흔쾌히 응해 줘서 도리어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먼저 잔디밭에 보드를 놓고 그 위에서 균형을 잡는 법부터 가르쳤다. 오랫동안 서퍼가 되는 꿈을 꾸었고 수영으로 단련된 몸이라 물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제아무리 노련한 전문가가 도와준다지만 과연 보드를 타고 파도 꼭대기에 올라탈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이었다. 베다니가 물속까지 들어와서 격려해 주었지만, 시작부터 실수연발이었다. 파도에 몸을 싣고 일어서려고 할 때마다 보드에서 굴러 떨어졌다. 여섯 번 시도했는데 여섯 번 모두 물을 먹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 와이키키에서 파도타기 대회가 열리는 날이어서 구경꾼은 점점 더 늘어났다. 수없이 많은 카메라들이 돌아가고 있었다. ‘발가락 두 개로 파도를 타는 장애인’ 따위의 제목이 달린 유튜브 동영상의 주인공이 되려는 ‘야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마침내 일곱 번째 시도에서 큰 파도를 타고 내려오면서 보드에서 일어서는 데 성공했다. 얼마나 짜릿했는지 얘기하지 않겠다. 다만 거대한 물결 꼭대기에 서서 마치 초등학생처럼 비명을 질렀다는 말밖에는…. 두 시간 동안 파도를 타고 또 탔다. 한 스무 번쯤은 서핑을 즐겼던 것 같다. 서핑 대회를 취재하러 온 사진기자들이 대기하고 있던 덕분에 서핑 전문지 《서퍼(Surfer)》의 표지모델이 되는 행운을 누렸다. 갓 서핑을 배운 초보로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해 나는 콜롬비아, 우크라이나, 세르비아를 거쳐 루마니아까지, 그리고 인도와 인도네시아 등 열다섯 개 나라를 도는 선교 여행을 계획했다. ‘사지 없는 삶’(Life Without Limbs) 팀 멤버들이 계획을 세우고 예산을 산출했다. 경비는 모금을 통해서 충당하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모금액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나는 당초 계획했던 대로 밀고 나가자고 주장했다. 캘리포니아 주에서 성공한 비즈니스맨이자 우리 모임의 이사인 바타 삼촌이 실무적인 차원에서 처음 계획했던 경유지 가운데 주요한 도시 두 군데를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자금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정세가 불안해서 여행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보도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삼촌은 대단히 지혜로운 분이었으므로 이러니저러니 토를 달지 않고 그냥 삼촌을 믿겠다고만 했다.
그리고 강연을 하러 곧장 플로리다 주로 날아갔다. 자원봉사자만 450명에 이르는 커다란 집회였다. 사람들을 격려하고 기운을 내게 하려는 취지로 마련된 모임이었는데 오히려 청중들이 내게 열정을 심어 주었다. 한편으로는 지금 계획하고 있는 선교 여행 기간 동안 줄곧 그처럼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또 구했다. 자금이 부족하고 치안이 불안하다 하더라도 꼭 인도와 인도네시아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갈수록 강렬해졌다. 주리고 목마른 영혼들을 섬기는 데 최선을 다하면 나머지는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왔다.
“주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한 주만 더 기다려보자.” 참을성 많은 삼촌이 말했다. 선교 여행에 필요한 자금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없는 돈을 미리 당겨쓰지도 않았다. 그저 기도하며 해결 방법을 모색했다. 아직까지는 문이 닫혀 있지만 언젠가 또 다른 기회가 열릴 거라고 판단했다. 찾고 또 찾으면 길이 보이게 마련이다. 며칠이 지났을 때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플로리다 집회에서 메시지를 들었다는 브라이언 하트라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서 재단에 적지 않은 돈을 기부하겠다고 했다.
다음에는 인도네시아 집회 관계자가 연락을 해왔다. 홍콩에 스타디움 두 군데를 빌려놨다면서 거기서 강연을 해주면 인도네시아에서 집회를 개최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충분히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는 캘리포니아 주의 어느 자선단체에서 여행 경비를 대고도 남을 만큼 큰돈을 지원하겠다고 알려왔다. 불과 며칠 사이에 경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 방문하려고 하는 지역의 치안 상태는 여전히 불안했지만 그 역시 하나님께 맡기면 그만이었다.
필요한 비용이 마련되었으므로 우리는 일정을 다시 조절해 처음 계획보다 일주일 빨리 인도를 방문하는 쪽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그 일정 변경이 팀 가족들과 내 목숨을 구했다. 행사를 마치고 뭄바이를 떠난 지 고작 이틀 뒤에 우리가 방문했던 지역 세 곳이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았다. 타지 호텔과 공항, 뭄바이 남부 기차역에서 폭발이 일어나서 180명이 사망하고 3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원래 스케줄대로라면 사건이 발생한 시각에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닉 부이치치의 허그”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닉 부이치치 지음, 역자 최종훈 님, 두란노>
<맥문동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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