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세계 역사

[중산] 2011. 7. 28. 12:48

 

첫째 날. 고대의 세계1

 

오리엔트 세계의 성립

큰 강 유역에서 탄생한 두 개의 문명: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 그리고 황하 문명을 일컬어 세계 4대문명이라고 한다. 세계 4대문명의 공통점은 모두 큰 강 유역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당시 사람들은 큰 강 유역에 큰비가 내려 발생하는 홍수를 이용해 농사를 지었다. 홍수는 많은 양의 물과 함께 새로운 흙을 실어다 주었다. 그래서 해마다 새로운 흙에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홍수가 일어나는 시기를 미리 예측할 수 있거나 물을 관리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절대적인 권력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전제군주가 출현하게 되었다. 오리엔트는 해가 뜨는 동쪽이라는 뜻으로, 지중해 동쪽에 있는 여러 나라를 의미한다. 이 표현은 훗날 로마인이 동쪽에 위치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일컬은 데서 비롯되었다.

 

 

이집트 문명의 기원: 고대 오리엔트 세계는 크게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로 나눌 수 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을 일컬어 함어족의 문명이라고도 하는데, 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세 아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이다. 성경에 따르면 타락할 대로 타락한 인간들을 심판하기로 마음먹은 신은 착실하게 신을 섬기며 살아가던 노아에게 잣나무로 큰 배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윽고 노아는 방주를 완성했고 신이 지시한 대로 자신의 가족과 각종 동물들을 한 쌍씩 태웠다. 하지만 그 후 노아의 후손들이 또다시 신을 업신여겼고 심지어 자신들이 신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하며 높은 탑을 세웠다. 이에 분노한 신은 인간의 언어를 복잡하게 만들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나뉜 언어들은 노아 아들들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고, 각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을 일컬어 셈어족과 함어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는 동쪽과 서쪽이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으로는 지중해, 남쪽으로는 나일 강의 거대한 강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런 폐쇄적인 지리적 특성 덕분에 몇 번의 예외는 있었지만 외적의 침입이 적었다. 이집트 왕조는 대체로 함어족이 이어갔다. 나일 강 유역에 노모스라 불리는 도시국가가 성립되었고, 이는 크게 상上이집트와 하下이집트로 나뉘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3000년경에 이르러 이집트는 하나로 통일되었고, 그 시대는 크게 고왕국 시대, 중왕국 시대, 신왕국 시대로 나뉜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번영한 도시국가 폴리스

도시국가 폴리스의 탄생: 기원전 8세기경 도시국가 폴리스가 탄생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는 이오니아인이 세운 아테네가 있다. 당시 평민과 귀족은 자유민으로, 주종관계는 성립되지 않았다. 평민은 중소 토지를 소유한 농민을 말한다. 한편 귀족은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당초에는 전쟁에서 중장기병으로 활약했으나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토지를 소유했다. 다만 좀 더 넓은 땅을 차지했으므로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경쟁하는 두 강대 폴리스

올림픽 마라톤 대회의 기원: 이 무렵 소아시아를 지배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에게 해 연안에 위치한 이오니아 지방으로 지배력을 확장시키고자 했다. 이에 그리스의 식민도시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페르시아군에 대항하는 반란군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그리스 본토 폴리스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스파르타는 이들의 요청을 거절했으나 아테네는 지원군을 보내주었고, 그 결과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페르시아 전쟁이다.

 

기원전 490년 아테네군은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페르시아의 원정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이때 한 병사가 승전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마라톤 벌판에서 아테네까지 40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를 달려갔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에서 마라톤 대회가 시작되었다.

 

 

마라톤 전투가 있은 지 10년 후 페르시아군은 육지와 바다를 통해 그리스로 쳐들어왔다. 이때 페르시아 육군에 맞서 싸우던 스파르타군은 테르모필레에서 전멸당했다. 한편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부녀자와 노인을 피신시킨 뒤 싸울 수 있는 남자들은 배를 타고 살라미스의 좁은 수로로 건너갔다. 살라미스 수로로 침입한 페르시아의 해군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페니키아의 군사들이었다. 당시 해전에서는 배를 충돌시키는 전술을 구사했는데 크기가 작고 기동력이 뛰어난 아테네의 배가 페니키아의 배를 침몰시키자,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는 서둘러 군대를 퇴각시켰다. 그 후 페르시아군은 플라타이아이에서도 그리스군에게 패배하여 결국 그리스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건설한 대제국

동방원정에 나선 알렉산드로스 대왕: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되고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동방원정을 단행했다. 토지를 갖지 못한 자유민(무산시민)이 크게 늘어 불만이 팽배해지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들에게 토지를 지급하기 위해 페르시아 원정을 단행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은 동방 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장악한 동방의 각 지역에는 그리스의 식민도시를 상징하는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마을이 건설되었다. 현존하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도 그때 만들어졌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대는 인더스 강 유역까지 진출했으나 용병들의 거부로 강을 건너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고 돌아오는 길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바빌론에서 죽음을 맞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망 후 무장들이 싸움을 일으켜 제국은 분열되어 이집트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리아에서 이란에 걸쳐서는 셀레우코스 왕조, 마케도니아에서는 안티고노스 왕조가 새롭게 등장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원정을 시작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멸망하기까지 약 300년 동안을 헬레니즘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 오리엔트 문화와 그리스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했다.

 

 

위풍당당한 로마제국의 탄생

팍스 로마나: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으로부터 존엄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았으나 정작 본인은 제1의 시민이라는 뜻의 프린켑스를 자처하며 원로원과 공동 통치 형식으로 로마를 다스렸다. 이는 공화주의자들의 반발을 샀던 독재자 카이사르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정치는 물론이고 종교, 군사의 최고 관직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이때부터 로마 제정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 체제를 프린키파투스(원수정)라고 한다.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오현제 시대까지 약 200년의 안정과 번영의 시대를 일컬어 파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라고 한다.

 

 

로마 제정 초기에는 지극히 평범하거나 반대로 악정을 행사하는 황제가 나타나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칼리굴라와 네로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네로는 크리스트교도를 박해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네로는 시인임을 자부했으나 좀처럼 좋은 시상이 떠오르지 않자 영감을 얻기 위해 로마에 불을 질렀다. 대형 화재로 이어져 민심이 혼란스러워지자 네로는 자신의 죄를 크리스트교도에게 뒤집어씌우고 대학살을 자행했다고 한다.

 

 

크리스트교의 국교화와 로마제국의 분열

비대해진 로마: 3세기 말에 즉위한 군인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원로원과 공동으로 통치하는 공화정의 전통을 버리고 전제군주정치를 수립했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제국을 네 개로 나눈 다음, 동서에 각각 황제와 부황제를 두어 분할 통치하는 사분통치를 시행했다. 황제를 신격화하여 숭배할 것을 강요하던 그가 권력이 분산됨에도 불구하고 사분통치를 시행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로마제국이 혼자서는 통치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이다. 이후 사분통치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사후에 분쟁이 일어남으로써 붕괴되었다.

 

 

한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크리스트교도 박해를 감행했는데, 그 규모가 매우 컸다. 그러나 이후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수백 년 동안 탄압받아온 크리스트교를 공인했고, 325년에는 니케아 공회의를 개최하여 아타나시우스파를 정통파로 인정하는 등 교의(敎義)를 통일시켰다. 또한 그는 그리스 식민도시 비잔티움을 로마제국의 수도로 정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개칭했다. 그 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92년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제정하고 다른 종교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고 난 뒤 로마제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동서로 분열되고 말았다.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게르만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되었으나, 동로마제국은 1453년에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되기까지 오랫동안 그 명맥을 이어갔다.

 

 

둘째 날. 고대의 세계 2

 

통일의 꿈을 이룬 시황제

중앙집권국가의 성립: 기원전 221년 제나라가 마지막으로 진나라에게 멸망당한 후 중국은 진나라에 의해 통일 시대를 맞았다. 통일 왕국 진나라의 정政은 왕의 칭호를 버리고 새롭게 황제의 칭호를 도입했다. 그리고 첫 번째 황제라 하여 자신을 시황제라 칭했다. 시황제는 전국에 군현제를 실시했다. 군현제란 전국을 군群과 현懸으로 나누고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는 제도다. 진시황은 주기적으로 배치를 달리하여 중앙집권을 행사하려 했다. 또한 화폐와 문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통일을 도모했는데, 화폐를 반량전으로 통일하고 문자도 소전체로 통일했다. 또한 사물을 재는 단위인 도량형도 통일했다.

 

 

또한 법가의 이사는 승상의 자리에 올라 농업, 의학, 점술 등 실용적인 서적을 제외한 모든 서적들을 불태우고 진나라의 정치를 비판하는 유학자들을 생매장시켰다. 이것이 그 유명한 분서갱유다. 또한 위협을 가하는 북쪽의 흉노족에 대한 대책으로 전국시대에 연나라와 조나라가 만들어 놓은 장성을 연결하여 방호벽을 만들었다. 이때 만들어진 장성은 흙으로 된 토성으로, 만리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해 있다. 참고로 베이징의 대표적인 관광지 만리장성은 한참 후 명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셋째 날. 중세시대

 

민족 대이동으로 변모한 유럽 세계

게르만족의 대이동: 게르만족은 인도-유럽어족 중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민족이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유틀란트 반도 일대에서 농사와 목축업을 함께 했으나 인구가 크게 늘어 토지가 부족해지자 차츰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도나우 강과 라인 강을 끼고 로마제국과 인접해 있던 게르만족은 일찍이 소작인 콜로누스와 노예 등 다양한 형태로 로마제국에 침투했으나, 집단으로 이동한 것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최초였다. 그렇다면 게르만족이 이렇듯 대대적으로 이동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동쪽으로 이주해온 훈족 때문이었다. 훈족은 중국 북쪽에 살던 북흉노의 후예인 것으로 보고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훈족은 게르만 민족의 동고트족을 지배하고 이어서 서고트족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에 375년 서고트족이 이동을 개시함으로써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전개되었다.

 

 

서고트족은 이베리아 반도에 왕국을 세웠고, 부르군트족은 갈리아의 남동부(오늘날의 프랑스) 일대, 반달족은 아프리카로 건너가 오늘날의 튀니지 일대, 동고트족은 이탈리아에 왕국을 세웠다. 앵글로색슨족은 영국으로 건너가 칠왕국을 세웠고 프랑크족은 갈리아 북부에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하지만 이들 왕국은 여러 세력에 의해 멸망되었고 유일하게 프랑크 왕국만 살아남았다.

 

 

발전하는 중세도시

봉건제도와 장원제: 중세 시대의 유럽 국가는 오늘날의 국가와는 크게 달랐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의 개념은 주권 국가가 성립된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중세 시대의 유럽 국왕은 영토를 직접 지배하는 대신 각 지역에 제후를 두어 다스리게 했고, 국왕은 그들의 우두머리에 불과했다. 중세 유럽의 봉건제도는 토지로 성립된 주종관계로, 이 제도를 통해 국왕, 제후, 기사의 봉건적 계층 서열이 형성되었다. 제후와 기사는 장원제도의 토지 소유 형태를 채택하여 토지를 경영했는데, 불수불입권이 있어 국왕도 함부로 개입할 수 없었다.

 

 

장원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농민은 농노였다. 이들에게는 노예와는 달리 자유가 주어졌으나 거주 이전과 직업 선택의 자유는 없었다. 또한 영주에게 부역과 함께 현물을 납부해야 하는 공납의 의무를 지고 있었으며 영주의 재판권에 복종해야 했다. 장원은 영주의 직속 경지로, 농노의 부역으로 경작하는 영주 직영지와 영주가 농민들에게 할당해준 농민 보유지가 있었다. 부역이란 영주 직영지에서 경작하는 일이고, 공납이란 농민 보유지에서 생산된 곡물을 사망세, 혼인세 등 다양한 명목으로 거둬들이는 세금이다. 또한 수입의 10분의 1을 교회에 내는 십일조도 있었다.

 

 

이슬람 제국의 태동

이슬람교의 성립: 유럽에서 게르만족 국가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한 6세기 무렵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이 서아시아를 무대로 항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로 인해 동서 무역로가 단절되자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한 홍해로 돌아가는 새로운 루트가 개척되었다. 이 가운데 아라비아 반도에 살고 있던 유목민 아랍인들 중에서 중계무역에 종사하는 이들이 나타났고 빈부의 격차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사회 변화와 더불어 이슬람교가 새로운 사회 규범으로 등장했다. 이슬람교는 아내를 네 명 이상 두지 않는다, 음주를 금한다, 돼지고기를 금한다 등 일상생활의 소소한 부분까지 규정짓고 있었다.

 

무함마드(마호메트)는 610년경 알라 신의 계시를 받고 메카에서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622년 그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박해를 피해 메디나로 이동했는데 이것을 헤지라라고 하고, 이 해를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았다. 무함마드는 메디나에 이슬람 공동체 움마를 세우고 메카의 세력과 싸워 630년 마침내 메카를 함락시켰다. 또한 카바 신전에 모셔져 있던 여러 신의 우상을 부수고 그곳을 이슬람교 신앙의 중심지로 삼았다.

 

 

몽골고원에 혜성같이 나타난 일대 세력

유럽을 전율시킨 제국: 13세기 초 몽골고원에 혜성같이 나타난 일대 세력이 있었다. 바로 몽골제국이었다. 테무진이 유목민 부족을 통일하고 1206년 부족장 회의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의 지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칭기즈 칸이다. 그는 중앙아시아의 호라즘을 멸망시킨 데 이어 서하를 멸망시켰으나 원정길에서 생을 마감했다. 원래 몽골족에게는 수도가 없었으나 제2대 오고타이 칸이 카라코룸을 수도로 정하고 금나라를 멸망시켰다. 또한 바투를 유럽으로 보내어 본격적으로 유럽 원정을 시작했다. 바투는 발슈타트 전투에서 유럽연합군을 무찔러 유럽을 전율케 했으나 전투가 끝난 직후 오고타이 칸이 죽자 즉각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리고 귀국길에 들른 남러시아에 그대로 정착하여 킵차크한국을 세웠다. 몽케 칸 시대에는 훌라구가 서아시아 원정을 감행하여 1258년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키고 일한국을 세웠다.

 

 

그렇다고 몽골족이 침략을 일삼은 난폭한 무리였다고 오해하지는 말길 바란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몽골족의 이미지는 실제 이미지와는 크게 다르다. 유목민족인 몽골족에게는 장자상속 관습이 없었으므로 쿠릴타이(왕공들의 대집회)를 통해 칸을 선발했다. 그래서 항상 분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회의가 열리는 동안에는 연회를 벌이며 어떻게든 결론을 냈다고 한다. 제5대 쿠빌라이 칸은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고 원나라를 세웠는데 쿠빌라이 칸의 즉위에 반발하여 카이두의 난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몽골제국은 다시 킵차크한국, 일한국, 오고타이한국, 차기타이한국과 원나라로 분열되었다.

 

 

넷째 날. 근세 시대

 

이탈리아에 꽃핀 르네상스

그리스로마 문화의 부흥: 14~16세기에 걸쳐 유럽에서는 새로운 문화풍조인 르네상스가 발전했다. 르네상스는 재생을 의미한다. 고전 · 고대, 다시 말해 그리스 로마 문화를 재조명함으로써 인간의 지적 · 창조적 힘을 새롭게 불러일으키고자 했던 것이다. 르네상스의 발상지 이탈리아에서는 일찍이 도시 국가가 발달했는데, 이것이 르네상스 탄생의 토대를 마련했다.

 

 

왕은 오로지 신에게만 책임이 있다

절대왕정의 등장: 유럽에서는 주권국가의 등장과 아울러 절대왕정이 성립되었다. 절대왕정이란 국왕의 권력이 절대적인 정치 체제를 말한다. 국왕에게 권력이 집중되려면 국왕의 수족이 되어 국정에 힘쓸 관료들이 필요했으므로 관료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봉건적 주종관계로 필요할 때에만 소집되던 기존의 군대를 대신하여 국왕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올 수 있는 상비군이 편성되었다. 그리고 중상주의 정책을 시행하여 관료제와 상비군을 유지하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을 충당했다. 또한 절대 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므로 인민은 저항권이 없다라는 왕권신수설이 등장했다.

 

 

 

절대주의의 정점, 루이 14세

태양왕 루이 14세: 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루이 14세를 대신해 재상 마자랭이 정치를 시행했다. 마자랭은 30년 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종결시켰다. 또한 귀족들이 고등법원을 거점으로 일으킨 프롱드의 난을 진압하고 왕권 강화에 힘썼다. 마자랭이 죽자 루이 14세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루이 14세는 콜베르를 재무장관으로 위임하고 전형적인 중상주의 정책을 펼치는 한편 라인 강을 프랑스 국경으로 한다는 자연국경설을 내세워 주변 국가들을 침략했다. 1701년에는 손자 펠리페의 에스파냐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이에 반대하는 제국들과 에스파냐 왕위 계승전쟁을 벌였다.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펠리페 5세가 에스파냐의 왕위를 계승했으나 에스파냐와는 영구히 합병할 수 없다는 조항을 수락하고 영국에게 아메리카 대륙 등 영토의 일부를 내주었다.

 

 

명나라를 계승한 이민족 왕족

여진족이 세운 왕조: 17세기 초 명나라가 쇠퇴하자, 누르하치는 12세기에 금나라를 세우고 북송을 멸망시켰던 여진족을 통일하여 중국 동북 지방에 후금을 세웠다. 그의 아들 홍타이지는 내몽골 차하르로 원정을 떠나 그곳을 평정하고 이듬해에 국명을 청나라로 바꾸고 조선을 속국으로 삼았다. 청나라의 3대 황제 순치제의 시대에는 청나라와 명나라의 국경이 산하이관까지 이르렀다. 명나라의 장수 오삼계가 산하이관의 수비를 맡고 있을 때 마침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 명나라가 멸망했다. 그러자 오삼계는 산하이관의 철문을 열어 청나라 군사들을 불러들였고 청나라는 오삼계를 앞세워 베이징으로 들어가 이자성의 반란군을 무찔렀다. 순치제에 이어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의 3대 황제가 즉위한 130년 동안 청나라는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아시아에서 탄생한 이슬람 제국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은 1209년 오스만 베이(오스만 1세)가 세운 튀르크족이 이슬람교도 국가다.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 제국에게 패했으나 그 후 부흥하여 1453년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수도를 옮기고 그 이름을 이스탄불로 개칭했다. 오스만 제국은 쉴레이만 1세 시대에 최고 전성기를 맞았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승리하여 헝가리를 점령하고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향했다. 쉴레이만 1세는 프랑스 왕과 손을 잡고 신성로마 제국의 카를 5세에게 대항했다. 비록 빈을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함대는 프레베자 해전에서 유럽 연합 함대를 무찌르고 지중해 제해권을 거머쥐었다. 쉴레이만이 사망한 뒤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유럽 함대에게 패했으나 그 후로도 오스만 제국은 유럽 제국에게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러다가 17세기 후반에 제2차 빈 포위에 실패하고 카를로비츠 조약에서 오스트리아에게 헝가리를 할양하는 등 쇠퇴하기 시작하여 19세기에는 빈사상태의 환자라고 불리는 모욕을 당하게 됐다.

 

 

다섯째 날. 근대의 세계

 

들불처럼 번진 혁명의 기운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1789년, 175년만에 베르사유에서 삼부회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표결 방법을 놓고 난항을 겪었다. 제1신분과 제2신분은 전통적인 신분별 표결방식을 주장했고 제3신분은 개인 표결을 요구했던 것이다. 결국 제3신분이 독립하여 국민의회를 자칭하자, 제1신분과 제2신분 중 일부도 이에 합류했다. 그 후 왕이 군대를 보내어 국민의회를 탄압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파리의 시민들은 시민군을 결성해 무기를 확보하고 1789년 7월 14일 전제정치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프랑스 국민회의는 8월 4일 봉건적 특권 폐지선언을 발표했고, 같은 달 26일 프랑스 인권선언을 채택했다. 그 내용을 일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조, 인간은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한다. 사회적 차별은 공동 이익을 근거로 해서만 있을 수 있다. 제2조,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소멸될 수 없는 권리를 보전함에 있다. 그 권리란 자유, 재산, 안전, 그리고 압제에의 저항 등이다.

 

 

중국 시장을 노린 영국의 개항 요구

아편 전쟁과 애로 전쟁: 1757년 이후 청나라는 유럽과의 무역을 광저우항으로만 제한하고 특수 상인 조합인 공행에 독점 무역권을 허용했다. 당시 청나라는 조공무역을 시행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청나라와 무역을 하고 싶으면 광저우로 조공을 가져와야 했다. 18세기 후반 이후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은 중국에 면직물을 수출하려 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유럽과의 무역을 광저우항으로 제한했으므로 영국의 개항 요청를 번번이 거절했다. 당시 영국은 중국의 주요 수출품목인 비단과 차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은(銀)을 중국에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수출함으로써 영국의 차 구매자금을 조달했다. 그로 인해 중국에서는 은 가격이 폭등하고 아편 중독환자가 급증했다. 그러자 1839년 청나라의 관료 임칙서가 광저우에서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몰수해 폐기했는데 영국은 이것을 구실로 1840년 아편 전쟁을 일으켰다.

 

 

아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영국은 난징조약을 맺고 중국 시장을 개방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면직물의 수출량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때마침 영국 선적 애로호가 광저우 항에서 해적 용의를 받아 선원 전원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구실로 1856년 영국은 추가 개항을 요구하며 애로 전쟁을 일으켰다. 제2차 아편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애로 전쟁은 1860년 베이징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마무리되었는데, 중국은 이 조약을 통해 11개 항을 추가로 개항해고 외국 공사의 베이징 주재와 크리스트교 포교 활동은 물론이고 아편 무역까지 허용했다.

 

 

여섯째 날. 현대의 세계 1

 

유럽의 화약고에 불을 당긴 사라예보 사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다: 1914년 6월 28일 마침내 일대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처가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당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1개월 후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동맹국들까지 합세하여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독일은 벨기에를 통해 단숨에 프랑스로 쳐들어갔으나 마른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저지당했다. 한편 독일을 공격했던 러시아 군이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패하여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이 고착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었고 결국 총력전으로 발전했다

 

 

국민의 지지를 받아 성장한 나치스

나치스 정권의 성립: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독일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다. 배상금 지불이 늦어지자 프랑스와 벨기에군이 루르 지방을 점령했다. 더욱이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1924년도 화폐가치가 10년 전인 1914년에 비해 1조 분의 1로 크게 하락했다. 히틀러를 주축으로 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통칭 나치스는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했다. 1922년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이끈 파시스트당이 로마 진군에 성공하여 정권을 획득하자 나치스도 1923년에 뮌헨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로 끝났다.

 

 

1924년에는 미국 자본을 도입하는 도스안이 성립되어 배상금 문제가 호전되었고, 이듬해에는 프랑스와 벨기에군이 루르 지방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1924년 배상금을 감액하기로 결정한 영안이 성립되고 얼마 되지 않아 세계공황이 불어닥쳤다. 세계공황 이후 나치스는 의석수를 급격히 늘렸고 1932년에는 독일 제1당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1933년 1월 마침내 히틀러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후 히틀러는 다른 정당들을 차례로 해산시키고 이듬해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죽자 나치스당 당수, 수상 그리고 대통령직까지 겸하여 자신을 총통이라 칭했다.

 

 

나치스는 여러 이유로 각계각층의 독일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특히 공항의 타격을 직격으로 받은 중산계층은 나치스가 독일을 공항에서 탈출시켜줄 것으로 기대했다. 한편 농민들은 수입이 수확기에 한꺼번에 들어오므로 그전에는 유대인들에게 돈을 빌려 써야 했다. 그래서 농민들 역시 반 유대를 표방하는 나치스를 지지했다. 게다가 젊은이들에게 나치스는 왠지 멋져 보였던 모양이다. 이렇듯 나치스는 독일 국민들의 다양한 요구와 기대 속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일곱째 날. 현대의 세계 2

 

다시 치솟은 전쟁의 소용돌이

공산주의와 손잡은 나치즘: 1939년 히틀러는 폴란드에 폴란드 회랑(제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유조약에 의해 독일이 폴란드에 할양한 길이 400km, 너비 128km의 좁고 긴 지역)에 대한 특권과 단치히를 요구했다. 독일은 이번에도 영국이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한편 이러한 상황들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소련은 영국, 프랑스, 독일이 반소동맹을 결성할 것을 우려하여 같은 해 8월 23일 독일과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손을 잡자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러한 결과는 그간 영국과 프랑스가 유지해왔던 유화정책의 명백한 실패를 의미했다. 그리하여 영국과 프랑스는 서둘러 폴란드와 상호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9월 1일 독일이 전격적으로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했고,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는 히틀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을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자 소련은 폴란드 동쪽을 점령했다. 이것은 독소불가침조약 비밀협정에서 결정된 시안이었다.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통과하여 프랑스로 진격했다. 독일이 파리를 점령함으로써 프랑스는 독일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이탈리아는 독일이 파리를 점령하기 나흘 전 독일 편으로 참전했다. 독일은 프랑스를 지배하는 데 필요한 병력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프랑스 북부 지역만 직접 지배했으며 남부 비시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페탱 장군을 국가원수로 내세워 정부를 수립하고 남부 지역을 통치하게 했다. 한편 영국 런던에서는 프랑스의 드골 장군이 망명 정권 자유 프랑스를 세우고 BBC 방송을 통해 프랑스에서 전개되고 있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지휘했다.

 

무조건 항복: 1943년 1월 처칠과 루즈벨트가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 모여 회담을 갖고 지중해에서 펼칠 작전을 검토했다. 루즈벨트는 적국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할 것을 제안했다. 연합군이 시칠리아 섬에 상륙하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이 무너지고 바돌리오 정권으로 교체되었다. 바돌리오 정권은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요구를 수용했다. 무솔리니는 독일의 도움으로 탈출했으나 북이탈리아에서 민중에 의해 처형되었다.

 

 

1943년 11월과 12월에는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처칠과 루즈벨트가 회담을 열었다. 중국의 장제스도 참석해 일본에 대한 방침을 거론하면서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약속했다. 이어서 처칠과 루즈벨트는 이란의 테헤란으로 회담 장소를 옮겼는데 이때는 소련의 스탈린도 참석했다. 이 회담에서는 제2전선 문제가 거론되었다. 소련과 독일이 싸우고 있는 전선이 제1전선이었는데, 스탈린은 영국과 미국이 배후에서 독일을 공격할 것을 요청했다. 이른바 제2전선이었다. 이듬해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제2전선이 실현되었고 8월에는 파리가 해방되었다.

 

1945년 2월 크림 반도 얄타에서 처칠, 루즈벨트, 스탈린으로 구성된 3자 회담이 다시 개최되었다. 여기서 4개국에 의한 독일의 관리 등을 골자로 한 얄타 협정이 체결되었고 이 비밀협정에서는 독일을 제압하고 3개월 이내에 소년이 대일전쟁에 참전한다는 약속이 체결되었다. 1945년 4월 말 히틀러는 연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린 뒤 동반 자살했다. 그리고 며칠 뒤 5월 7일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유럽에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7월과 8월 베를린 근교 포츠담에서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모여 포츠담 회담을 열기로 했으나 이 무렵 시행된 선거에서 처칠의 보수당이 패하고 노동당의 애틀리가 수상이 되면서 처칠을 대신해 애틀리가 회담에 참석했다. 회담에서는 전후 독일 처리에 관한 포츠담 협정이 체결되었고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었다. 또, 이 선언에서는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만든다는 약속이 재확인되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소련의 붕괴까지

소련의 해체와 동구권 국가의 민주화: 1980년 폴란드에서는 바웬사를 의장으로 한 자주관리 노조인 연대가 결성되었다. 원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정부가 노동조합을 결성한다. 따라서 당국은 자유노조 불법화를 선언하고 이 연대를 탄압했으나, 1989년 선거에서 자유노조연대가 승리를 거두었다. 1956년 헝가리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그랬던 것처럼 소련이 개입할 것을 두려워했지만 소련은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자 동구권 국가의 공산당 정권은 단숨에 붕괴되었다. 1990년에는 동서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졌고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다. 한편 1991년 보수파의 쿠데타로 소련 공산당이 해체되고 같은 해 12월 소련이 해체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세계사”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우메무라 미츠오 지음, 역자 박화님, 감수 공미라님, 명진출판>

▣ 저자 우메무라 미츠오

1953년에 태어나 오카야마 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철학 전공을 수료했다. 한때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가와이쥬쿠에서 세계사를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최근 100년의 세계사』, 『카리스마 선생님의 세계사 カリスマ先生の世界史』 등이 있다.

                                                                                 <참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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