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시오 ‘어니스트 헤밍웨이’
헤밍웨이는 1899년 미국 시카고 교외 오크파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수렵 등 야외 스포츠를 좋아하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음악을 사랑하고 신앙심이 돈독한 크리스천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부모의 상반된 성향은 그의 인생과 문학에 미묘한 영향을 주게 된다. 헤밍웨이는 고교시절에는 풋볼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고, 그때부터 시와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이미 그의 유명한 문체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전부가 나타난다.
1917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헤밍웨이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캔자스시티의 《스타 Star》지 기자가 되었다가, 1년 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의용병으로 이탈리아 전선에 종군했다. 그러나 그는 전쟁 중에 다리에 중상을 입고 밀라노 육군병원에 입원하였다가 휴전이 되자 1919년에 귀국하였다. 그 후 헤밍웨이는 캐나다 《토론토스타》지의 특파원이 되어 유럽으로 건너가 각지를 여행하는가 하면, 그리스와 터키간의 전쟁에 뛰어들어 이를 보도하기도 했다. 그런 뒤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거트루드 스타인, 에즈라 파운드 등과 친교를 맺으며 그들의 창작 기법들을 배웠다.
1928년 헤밍웨이는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그 해에 아버지의 권총 자살 등 몇몇 불행한 사건을 겪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그는 이듬해에 전쟁의 허무함과 비련을 주제로 한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를 발표하여 국내외적으로 큰 방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1936년,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자 그는 공화파 정부 지지를 표명하고 스페인에까지 가서 내란에 참전하였다. 그리고 이 체험을 바탕으로 걸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에는 자신의 전쟁 체험과 인생관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는 오랫동안 스페인 내전이 제2차 세계대전이 전주곡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예견해왔다.
스페인 내전이 끝난 뒤 헤밍웨이는 쿠바의 아바나 교외에 그리 넓지 않은 농장을 구입하여, 그곳에서 재혼한 아내와 함께 생활했다. 그러나 얼마 후 자신이 예견했던 대로 또 다른 전쟁, 즉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잠시 그것을 취재하기 위해 중국에 가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쿠바로 돌아온 뒤에는 그곳에서 집필에만 전념하였고, 저녁이면 시내 바에서 칵테일을 즐기며 현지인들과 담소를 즐기곤 했다.
헤밍웨이는 1952년 53세 되던 해에 『노인과 바다』를 발표하고 이 작품으로 2년 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정작 노벨상 수상식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그 해 1월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사냥여행을 하던 중 두 번이나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해 심하게 다쳤기 때문이다.
1960년 쿠바에서 카스트로의 혁명이 일어나자 헤밍웨이는 쿠바로부터 추방되어 1961년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심한 우울증과 망상에 시달렸다. 여러 차례에 걸친 부상, 이혼과 재혼, 알코올 중독, 당뇨, 문학적 재능을 상실했다는 절망감 등으로 우울증에 시달렸고, 쿠바에서 활동했었기 때문에 FBI 요원들이 자기를 감시하고 은행 계좌를 뒤지며 조국을 배반한 반역자로 몰아 체포할 것이라는 공포에 시달렸다.
그래서 가족들은 그를 미네소타주에 있는 메이요 클리닉센터에 입원시켰고, 그는 전기충격 치료까지 받았다. 하지만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아침, 그의 부인은 남편이 장총을 손에 쥐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놀란 그녀는 즉시 남편에게 안정제를 먹인 후 다시 메이요 클리닉센터에 입원시켰다.
그로부터 두 달 후, 헤밍웨이는 우울증에서 회복되었다면서 퇴원을 요구했다. 부인은 그를 차에 태우고 메이요 클리닉센터에서 아이다호주까지 먼 길을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안심이 되지 않아 집안에 있는 모든 총기류를 지하실 창고에 옮겨 잠궈 두었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부인이 잠든 사이 가운을 몸에 걸치고 식당 싱크대 위에서 창고 열쇠를 찾아냈다. 그는 지하실로 내려가 창고 문을 열고 쌍열장총 한 자루를 골라잡았다. 그가 비둘기 사냥 때 즐겨 쓰던 장총이었다. 그는 집 앞 마루로 올라와 전에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총을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가 죽자 생전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몇몇 문인들과 가족, 친구들의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리고 시신은 아이다호주 케첨 공동묘지, 옛 사냥친구 테일러 윌리엄즈가 묻혀있는 옆자리에 묻히고 묘비에는 이런 말이 새겨졌다.
“일어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시오!”
<“인생 열전”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박영만 지음, 프리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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