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위한 정지
시간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 결혼생활에 위기가 왔을 때 우리 부부는 일주일에 두 번씩 부부 상담을 받았다. 그 무렵 시어머니가 우리 집에 들르셨다가 부부 사이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채셨다. “걱정하지 마라.” 시어머니는 나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셨다. “2년만 지나면 저 애도 너를 믿게 될 거야.”
2년이라니! 나는 한창 젊을 때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농담을 하시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후 참을성을 지니라는 당부였음을 깨달았다. 나보다 40년이나 더 결혼생활을 한 시어머니에게 2년이란 사랑하는 남자와 수십 년을 살기 전에 반드시 겪어야 하는 전주곡이었다. 지금 나는 그때 분개했던 일을 떠올리며 웃을 만큼 나이가 들었다. 신뢰가 쌓이는 데 2년쯤 걸린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균형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작은 대가라는 것, 연륜이 담긴 시어머니의 판단은 옳았다.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것은 행복하게 살기 위한 기본 태도다. 또 흘러가는 시간과 동맹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연되는 상황에서도 너그러워지려면 특정한 기본 전략이 필요하다. 노력을 기울이는 것, 더 잘 될거라고 믿는 것, 목표를 똑똑히 바라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 전략이 없으면 인내심이 사라진다. 또 인간관계가 힘들어지거나 일이 어려워지면 너무 쉽게 포기하게 된다. 목표를 늘 마음에 간직하고 기다리면 보람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며 보상을 그려보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욕구가 충족되지 않더라도 심사숙고하며 기다리는 능력이 생긴다. 충동적으로 행동하기보다 생각을 털어놓고 시간을 두고 난관을 헤쳐 나가게 된다. 심지어 현재의 어려움이 미래에 훨씬 더 나은 디딤돌이 될 것을 안다. 마치 힘든 지금 상황이 별것이 아니게 될 미래 어느 시점에서 돌아보는 것처럼 궁지에 빠진 상황에서도 훗날에 미칠 여파까지도 그려볼 수 있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에 대한 개념은 더욱 탄력적으로 변한다.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다. 94세의 융학파 심리학자인 폴린 톰슨은 과거 기간이 길어지면서 곧 일어날 미래를 예측하는 감각이 어떻게 발달하는지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나는 지난 90년보다 최근 4년 동안 미래를 더 잘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 ‘노년은 복도를 걸어가는데 앞에서 문이 모두 닫히는 모습을 봐야 하는 서글픈 과정’이라고 정의한 글귀를 읽었다. 하지만 나에게 노년은 빛을 향해 복도를 걸어가는데 양 옆에서 문들이 활짝 열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 과거가 쌓여 지금까지 이르렀고, 내가 의식하는 과거가 길수록 예측할 수 있는 앞날도 길어진다.”
결정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젊음이 부담스러운 이유는 한 번에 여러 분야 가운데서 어느 한 방향으로 가야 할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20대에 하는 선택에 따라 나머지 인생이 많이 달라지기도 한다. 우리는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야 하는지, 아니면 애써 찾아내지 않으면 놓쳐버리고 마는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짊어지고 가야 할 것은 무겁기만 하다. 66세의 한 노부인이 말했다. “젊었을 때 그렇게 고민되던 문제들이 이제는 해결되었죠. 결혼을 해야 할까? 아이는 낳아야 할까? 무슨 직업을 가져야 하지? 이런 모든 것이 지금은 해결되었어요. 전 절대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몸이 젊어지는 것은 몰라도 그때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나이가 들어 노년에 이르면 이미 지나온 선택의 기로마다 얻은 것들이 있다. 가지 않은 길도 수백 개쯤 될 것이다. 나이가 들면 선택을 잘못할까 봐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고심해서 선택한 길이 막다른 곳으로 이어지기도 했고, 그냥 직감으로 선택한 길이 예상치 못한 수확을 안겨주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 잘한 선택, 잘못한 선택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만 무슨 결정을 내리든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조금은 남을 수밖에 없다. 누구라도 이러한 딜레마를 피할 수는 없다.
나는 스물세 살 때 굉장히 부담스러운 선택을 해야 했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자리를 제안받았는데, 그걸 수락하면 하고 있던 두 가지 일과 남자친구를 포기해야 했다. 당시 필라델피아 시내에 있던 정신과 병원에서 파트 타임 보조로 일하던 나는 막 승진해서 몹시 우러러보던 팀과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터였다. 또 숙식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일주일에 5일씩 시내 야간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과 지내며 그들이 성공하는 인생을 살도록 도와주는 일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그때 코네티컷 웨슬리언 대학교의 3학년 학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이 왔다. 48시간 안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학교 측은 새 학기를 시작하자마자 학장이 사임하는 바람에 즉시 그 업무를 맡아서 할 정도로 학교 사정에 밝은 사람을 원했다. 나는 그들이 접촉한 최근 졸업생 명단 중에 첫 번째에 올라 있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한 나는 잠도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한 채 방 안만 왔다 갔다 했다. 병원에서 함께 일하기로 한 팀과 약속한 것을 깰까? 가르치는 일 년 동안 그렇게 나를 믿고 가깝게 지냈던 아이들을 어떻게 실망시키지? 결혼까지 이어질지도 모르는 남자친구를 떠나는 게 잘하는 일일까? 나는 활기찬 필라델피아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다시 대학으로 돌아간다면 퇴보하는 것일까, 아니면 발전하는 것일까? 무슨 길을 택해야 하지?
나는 운이 좋게도 나이 지긋한 어르신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결정할 시간이 24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야학 프로젝트에서 상담을 담당해온 교육위원 한 분과 오랜 시간 산책을 하게 됐다. 눈빛이 강렬하고 기품이 넘치는 60대 말의 은퇴자인 그는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나는 여러 가지 얽힌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지금부터 몇 년이 흐르면 무슨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를 끝낸다든지, 아이들을 떠나는 게 힘든 줄 알지만 이런 드문 기회를 또 어떻게 만날까요? 지금 이 순간이 세월이 흐른 후에 어떻게 보일지 생각해봐요.”
그가 해준 대답은 명쾌하고 놀라웠다. 나는 갑자기 몇십 년 후의 노인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킬까 봐 원하는 것을 잡지 못하는 젊은 여자를 돌아다보고 있었다. 값비싼 잔디를 깐 우아한 저택이 늘어선 가로수 길에 젊은 나도 있었고 나이 든 나도 있었다. 제안 받은 일자리를 잡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전화를 걸어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며칠 후 병원에 사직서를 내고 야학 프로젝트도 포기하고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짐을 쌌다.
학장으로 일하는 동안 전공 선택을 고민하거나 인생 문제로 씨름하는 학생들, 룸메이트와 일어난 불화나 갈등으로 괴로워하는 학생들을 수없이 도와줬다. 그때 다양한 삶을 이야기로 들은 덕분에 폭넓은 공감능력을 기르게 되었고, 장차 심리치료사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 시절 얻은 자신감은 필라델피아에서 생활하던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쑥쑥 자랐다. 존경하는 사람들의 삶을 겉으로만 보면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그 자리로 올라갔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보니 대부분 사람이 계획보다는 느낌에 따라 많이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막연히 안다. 목표를 정하지만,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기도 하고 예전에 벗어났던 길로 되돌아와 다시 나아가기도 한다. 그런데도 길을 정하면 처음부터 합리적으로 결정해서 일관성 있게 한 길만 걸어온 것처럼 이야기를 꾸민다. 나는 이제야 왜 야학 프로젝트의 위원이 내게 그런 말을 해줬는지 알 것 같다. 인생 후반기가 되면 타협은 더 이상 낯설지 않아진다. 현실적인 문제로 여러 번 좌절하면서 서로 충돌하는 가치도 예전처럼 그렇게 불편하지 않게 된다. 상반되는 감정과 모순되는 태도에도 익숙해진다. 모든 것을 얻거나 모든 것을 잃는 행동 방침은 현실에 없다는 것도 깨닫는다. 나이가 들수록 길을 찾기 위해 어둠 속을 더듬으며 힘겹게 빠져나가는 것을 더 잘 견딜 수 있게 된다. <“살아가는 동안 나를 기다리는 것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웬디 러스트베이더 지음, 역자 이은정님, 국일미디어>
벚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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